| 한자 | 古長城 遺蹟 |
|---|---|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 지역 |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시 |
| 시대 | 고대/삼국 시대/고구려 |
| 성격 | 성곽 |
|---|---|
| 양식 | 산성 |
| 소유자 | 국유 |
| 관리자 | 연길시 |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86년 |
| 현 소재지 | 화룡현과 용정시 및 연길시의 북부산지 |
고장성은 호형을 나타내는데, 대부분 흙으로 쌓았고, 돌 혹은 돌과 흙을 섞어 쌓은 구간도 있다. 대부분 구간은 산등성이 또는 산등성이의 한쪽 면에 쌓았고, 부분적 구간은 산을 넘고 골짜기와 강을 지나갔다.
고장성의 축조 시기에 대한 첫 번째 설은 고구려 시대 읍루인의 남침을 막기 위하여 쌓은 것이라는 설이다. 둘째, 발해의 중경인 서고성 주위에 뻗었으므로 발해 시대의 유적이라고 보는가 하면, 셋째, 금나라 말기 동하국의 남경인 성자산 산성을 둘러싸고 있기 때문에 동하국의 장성으로 보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고려가 일찍이 갈란전을 점령하고 9개 성을 건축하였는데 동고성이 갈란전의 소재지였으므로 고려 시대에 쌓은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들은 모두 문헌과 고고학적 자료가 부족하다. 때문에 고장성의 축성 연대에 관한 문제는 추가적인 연구 조사가 필요하다.
1986년에 연변 박물관은 연길시 북쪽 청차관 부근의 망루대 횡단면에서 채집한 목란 표본을 방사성C14로 연대를 측정하였다. 그 결과 1580±75년전이라는 측정 연대가 나왔는데, 이 시기는 중국의 동진 시대, 즉 고구려 중기에 해당하는 시기이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읍루에는 다음과 같이 기재되어 있다. 읍루의 “남쪽은 북옥저와 잇닿아 있다.”, “이 나라 사람들이 배로 이웃나라에 쳐들어 가서 약탈한 탓에 이웃나라들은 재난을 당했다.” 같은 책 동옥저전에는, “읍루가 늘 배를 타고 북옥저에 쳐들어와 노략질을 한 데서 북옥저 사람들은 무서워 여름이면 산속의 동굴에 들어가 방비하고, 물이 얼어 뱃길이 막힌 겨울에야 부락에 내려와 살 수 있었다.”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삼국 시대 북옥저에 대한 읍루의 위협이 매우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양진(兩晉) 시대는 북방의 읍루의 세력이 점차 강성하여 서쪽으로 부여를 침략하고 남쪽으로 고구려의 영역으로 팽창하던 시기였다. 당시 북옥저는 고구려의 통치 밑에 있었다.
이곳에는 고구려의 중요한 통치 거점인 성자산 산성이 있고, 또 연길시의 흥안 고성, 용정시토성둔 고성, 동흥촌 고성 등이 있었다. 그러므로 고구려의 통치자들이 읍루의 남침을 막기 위하여 북옥저 사람들을 동원하여 이와 같은 군사 방어 시설을 쌓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