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장성 유적

한자 古長城 遺蹟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시  
시대 고대/삼국 시대/고구려
상세정보
성격 성곽
양식 산성
소유자 국유
관리자 연길시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86년
현 소재지 화룡현과 용정시 및 연길시의 북부산지
정의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현, 용정시, 연길시의 북부 산지에 걸쳐 있는 고구려 시대의 장성 유적.

개설

고장성 유적고장성과 주변 유적을 포함하고 있다. 고장성의 축성 시기에 대해서는 현재 네 가지 설이 있으나, 해란강과 부르하통하 분지를 지키기 위한 군사 시설이라는 견해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위치

고장성연길시에서 약 50㎞ 떨어진 화룡시 팔가자진풍산에서 시작하여 화룡현의 서성향, 용문향을 지나고 또 용정시의 세린하향, 도원향, 동불향, 조양향, 팔도향, 연길시의 연집향, 도문시의 장안진 마반촌[성자산 부근]을 지나 동쪽의 장안진계림북산까지 뻗었는데, 그 총 길이는 약 100㎞이다.

건립 경위

고장성은 호형을 나타내는데, 대부분 흙으로 쌓았고, 돌 혹은 돌과 흙을 섞어 쌓은 구간도 있다. 대부분 구간은 산등성이 또는 산등성이의 한쪽 면에 쌓았고, 부분적 구간은 산을 넘고 골짜기와 강을 지나갔다.

고장성의 축조 시기에 대한 첫 번째 설은 고구려 시대 읍루인의 남침을 막기 위하여 쌓은 것이라는 설이다. 둘째, 발해중경서고성 주위에 뻗었으므로 발해 시대의 유적이라고 보는가 하면, 셋째, 금나라 말기 동하국의 남경인 성자산 산성을 둘러싸고 있기 때문에 동하국의 장성으로 보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고려가 일찍이 갈란전을 점령하고 9개 성을 건축하였는데 동고성이 갈란전의 소재지였으므로 고려 시대에 쌓은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들은 모두 문헌과 고고학적 자료가 부족하다. 때문에 고장성의 축성 연대에 관한 문제는 추가적인 연구 조사가 필요하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1986년에 연변 박물관연길시 북쪽 청차관 부근의 망루대 횡단면에서 채집한 목란 표본을 방사성C14로 연대를 측정하였다. 그 결과 1580±75년전이라는 측정 연대가 나왔는데, 이 시기는 중국의 동진 시대, 즉 고구려 중기에 해당하는 시기이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읍루에는 다음과 같이 기재되어 있다. 읍루의 “남쪽은 북옥저와 잇닿아 있다.”, “이 나라 사람들이 배로 이웃나라에 쳐들어 가서 약탈한 탓에 이웃나라들은 재난을 당했다.” 같은 책 동옥저전에는, “읍루가 늘 배를 타고 북옥저에 쳐들어와 노략질을 한 데서 북옥저 사람들은 무서워 여름이면 산속의 동굴에 들어가 방비하고, 물이 얼어 뱃길이 막힌 겨울에야 부락에 내려와 살 수 있었다.”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삼국 시대 북옥저에 대한 읍루의 위협이 매우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양진(兩晉) 시대는 북방의 읍루의 세력이 점차 강성하여 서쪽으로 부여를 침략하고 남쪽으로 고구려의 영역으로 팽창하던 시기였다. 당시 북옥저는 고구려의 통치 밑에 있었다.

이곳에는 고구려의 중요한 통치 거점인 성자산 산성이 있고, 또 연길시흥안 고성, 용정시토성둔 고성, 동흥촌 고성 등이 있었다. 그러므로 고구려의 통치자들이 읍루의 남침을 막기 위하여 북옥저 사람들을 동원하여 이와 같은 군사 방어 시설을 쌓을 수 있었다.

현황

현재 고장성은 이미 대부분 자취를 감추고 일부 구간만 남아 있다. 고장성의 좌우 양쪽의 몇 십개의 망루 자리가 있는데, 그것은 전망대거나 봉화대로 쓰였을 것이다.

고장성에 대한 조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그 두 끝이 어디까지 뻗었는가 하는 것도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고장성혼춘시 경내의 고장성[변호령 또는 변벽이라고도 한다]과 연관되는가 하는 것도 조사해야 할 과제이다.

의의와 평가

고장성 유적발해, 동하국 시대에도 계속 사용되었을 수 있지만, 고장성이 고구려 시대 읍루의 남침 방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참고문헌
  • 연변인민출판사, 『연변 문화 문물 략편』(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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