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海蘭江 大流血 事件 淸算 大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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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야 | 역사/근현대 |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 지역 |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시 |
| 시대 | 현대/현대 |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46년 10월 3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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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결 시기/일시 | 1946년 11월 5일 |
| 발생|시작 장소 | 길림성 연길시 서광장 |
1946년 해란강 대유혈 사건을 일으킨 친일 세력을 처단하기 위해 개최된 대회.
1946년 10월 30일부터 11월 5일까지 중국 공산당 연길현 위원회(中國共産黨延吉縣委員會)는 길림성 위원회의 직접적인 영도 하에 연길시의 서광장에서 해란강 대유혈 사건 청산 대회를 열고 친일 세력의 죄행을 청산하였다.
1946년 여름, 길림성 연길현 각지에서는 악질 분자 청산 투쟁을 전개하였다. 민중들은 도처에서 일제 강점기의 친일 세력을 색출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격분을 참지 못하여 정당한 절차를 밟지 않고 친일 세력을 타살하는 과격한 행동도 나타났다.
이에 중국 공산당 연길현 위원회 서기 송일평(宋一平)은 민중들의 친일 세력 청산 투쟁을 올바르게 지도하기 위해 연길시 위원회 서기 송진정(宋鎭政)에게 공작단(工作團)을 거느리고 해란구에 내려가 학살 사건의 진상을 철저히 조사하도록 지시하였다.
공작단은 열사 가족 김신숙(金信淑)을 통하여 남편 김학준(金學俊)의 유서-하동 자위단(河東自衛團)이 혁명가를 살해한 기록을 확보하였다. 공작단은 최남순(崔南順)·박희선(朴姬善)·김동후(金東厚) 등 친일 세력 18명의 죄행을 파악하고 이들을 체포하였다.
해란강 대유혈 사건 청산 대회 준비처는 동북 각지의 피해자 가족들에게 대회에 참가하여 친일 세력의 죄상을 밝히도록 미리 통지하였다. 1946년 10월 30일부터 11월 5일까지 열린 해란강 대유혈 사건 청산 대회에는 동북 각지에서 온 600여 명 피해자 가족과 1만여 명 민중들이 참가하였다.
5일간에 걸쳐 개최된 해란강 대유혈 사건 청산 대회에서 30여 명의 피해자 가족들이 일본군 토벌대와 친일 세력의 죄상을 성토하였다. 그들의 피눈물 나는 성토는 1만여 명 가까이 운집한 대회 민중들의 의분을 자아냈다.
중국 공산당 연길현 위원회 서기 송일평은 “극악 무도한 적들은 우리의 계급 형제들을 살해하였으나 수천수만의 혁명 대오는 그들의 피흘린 자국을 밟고 전진하였습니다. 우리는 혁명 선열들의 뜻을 이어 계속 분투하면서 승리의 전취물을 지켜냅시다!”라고 연설하였다.
해란강 대유혈 사건 청산 대회는 죄질이 무거운 최남순(崔南順)·박희선(朴姬善)·이철우(李哲宇)·김동우(金東宇)·박승준(朴承俊)·허남철(許南哲)·황병윤(黃炳允) 등 7명을 사형에, 서봉묵(徐奉黙)을 무기 도형(無期徒刑)에, 허병선(許炳善)을 유기 도형(有期徒刑) 7년에, 박영춘(朴英春)을 유기 도형(有期徒刑) 5년에, 최성일·허동룡·윤승화·허경규·허동간·박병순·박경규 등 7명을 유기 도형 1년에 처하였다. 박명호는 죄질이 가볍고 죄를 인정하며 뉘우치는 태도를 보였다는 이유로 석방하였다.
해란강 대유혈 사건 청산 대회는 민중들이 함부로 사람을 죽이는 과격한 행동을 제지하도록 하고 그들의 투쟁을 정상적인 궤도에 올려 놓는 본보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