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신 학교

한자 永新 學校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학교
지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성격 교육 기관
설립자 윤상철
개교 시기/일시 1910년 10월 7일
개칭 시기/일시 1912년 9월 14일
최초 설립지 용정촌
현 소재지 용정시
정의

1910년 한인 유지들이 용정에서 민족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설립한 교육 기관.

교육 목표(교훈 포함)

영신 학교는 설립 당시 민족 교육을 통하여 한민족의 문화와 전통을 이어 가려는 데 목적을 두었다.

변천

영신 학교의 전신은 윤상철이 설립한 광성 서숙(光成書塾)이었다. 광성 서숙이 1912년 9월 14일에 용정 예수교 장로회 중앙 교회에 경영권이 넘어 가면서 영신 학교로 이름을 고쳤다. 1922년 12월 상해에서 공산주의 운동을 하다가 용정에 돌아온 임호 등은 영신 학교에 들어가 마르크스주의를 선전하였다.

1925년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으면서 영신 학교의 경영권이 일본인에게 넘어 갔다. 이리하여 영신 중학교는 일본 제국주의 식민 노예 교육의 기지로 전락하였다. 1934년에 재단 법인 광명 학원(光明學院)이 설립되고 영신 학교는 광명 학원 중학부로 되었다. 일본인이 영신 학교 교장을 담임하였다.

1938년 1월 일본 제국주의가 ‘만주국’에 대한 치외 법권 철폐를 선포한 후, 영신 학교의 경영권은 ‘만주국’ 간도성(間島省)에 넘어 가면서 간도성립 광명 국민고등학교(間島省立光明國民高等學校)로 되었다. 1941년에 간도성립 용정 제1 국민고등학교(間島成立龍井第1國民高等學校)로 개칭되었다.

교육 활동

1922년 임호는 상해에서 공산주의 운동을 하다가 용정에 돌아와 마르크스주의를 선전하였다. 1925년 영신 학교를 졸업한 김훈(金訓)은 10월 사회주의 혁명과 반일 사상을 선전하다가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살해되었다. 1930년 영신 학교에서는 광주 학생 운동을 지지 성원하는 시위 행진을 전개하였다.

역사 교사 이동신은 역사 교과서의 일부 역사 서술의 왜곡된 점을 조목조목 지적하면서 학생들에게 올바른 역사 지식과 역사 인식을 심어 주는 데 노력하였다. 일본 제국주의는 영신 학교에서 식민지 노예 교육 체제를 건립하였지만, 교원과 학생들은 이에 과감하게 맞서 투쟁하였다. 이들의 노력으로 영신 학교에서는 반일 애국 운동이 전개되고 마르크스주의를 선전하고 연구하는 열기가 일어났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수많은 진보적 청년들이 배양되고 반일 투사가 육성되었다.

현황

1946년에 영신 학교는 용정의 다른 학교인 은진중학교·대성 중학교·동흥 중학교·명신 여자 학교·광명 고등 여자 학교 등과 합병하여 성립 용정 중학교로 되었다. 1963년에 연길현 제1 중학으로 고치고 고급 중학반도 설치하였다. 2011년 현재 1,000여 명의 학생이 있고 모두 조선족 학생이다.

참고문헌
  • 중국 조선 민족 력사 발자취 총서 편집 위원회, 『개척』중국 조선 민족 력사 발자취 총서(1), 민족출판사,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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