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왕청 보위전[1933년]

한자 小汪清 保衛戰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왕청현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성격 유격 근거지 보위전
발생|시작 시기/일시 1933년 봄
종결 시기/일시 1933년 봄
발생|시작 장소 왕청현
정의

1933년 일본군 토벌로부터 소왕청 항일 유격 근거지를 보위하기 위해 전개한 전투.

개설

1933년 봄 왕청현 유격대가 적위대와 협동 작전하여 소왕청 유격 근거지를 보위하고 일제의 진공을 물리치는 전투를 전개하였다.

역사적 배경

소왕청 항일 유격 근거지는 중국 공산당 동만 특별 위원회와 왕청현 위원회가 있던 구마촌을 중심으로 하여 왕청현 소왕청 골안의 뾰족산 동쪽 지대에 위치하여 있었다. 동만특위와 왕청현 위원회는 구마촌에서 동남쪽으로 700m쯤 들어간 이수구의 밀림속에 자리잡고 거기서 200m쯤 다시 내려와서 왕청현 유격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일제는 수비대를 기본 역량으로 하여 만주국 군대, 경찰, 자위단을 긁어모아 수백 명의 병력으로 일거에 구마촌을 삼키려고 들었다.

경과

1933년봄, 일제는 대량의 병력을 모아 소왕청 항일 유격 근거지를 진공하였다. 왕청현 당위 서기 이용국은 현 당 위원회 확대 회의가 소집하여 무장으로 근거지를 보위할 방침을 수립하였다. 1933년 4월 17일 아침, 적들은 600여 명의 병력으로 근거지를 진공하자 항일 유격대는 뾰족산에서 제1선, 제2선 방어진을 치고 적들이 접근하면 반격을 시작하였다. 타격을 받은 적들은 분노하여 뾰족산 남쪽과 서쪽으로부터 진공하여 올라왔다. 이때는 아군의 제2선 방어진에서 반격하였다. 호된 타격을 받은 적들은 왕청 쪽으로 도망쳤다. 다음날, 적들은 또 더 많은 병력을 동원하여 세 갈래로 나누어 근거지의 중심인 마촌을 향해 진공하여 왔다. 우리 군은 삼면으로 쳐들어오는 적들을 물리치기 위하여 적들의 주공 노선인 마촌과 서대파 사이의 고개와 마반산에서 방어진을 치고 매복 습격을 하여 적들의 진공을 물리쳤다.

1933년 4월 19일 적들은 또 병력을 집중하여 왕청으로부터 대감자, 북고령을 건너 진공하여 왔다. 하지만 항일 유격대는 이미 매복하고 기다렸다가 적들을 호되게 습격을 하였다. 적들은 겁에 질러 철퇴를 하고야 말았다.

결과

소왕청 근거지 보위전은 승리로 끝났다. 왕청 항일 유격대는 적들에 드센 공격을 펼쳐 동만 지구 여러 민족 인민의 항일 투쟁을 격려하며 반 ‘토벌’ 투쟁의 승리를 거둔후 기타 항일 대오와의 연합 작전을 통하여 유격대를 발전시키고 유격구를 확대하였다.

의의와 평가

소왕청 보위전은 적은 병력으로 일본군의 토벌을 물리치고 근거지를 보위한 승리적인 전투였다. 이번 보위전은 근거지가 창설된 이래 규모가 큰 첫 전투였고 첫 승리였다. 동만 항일 유격 전쟁의 초기에 모범을 보여준 전투였다. 소왕청 항일 유격 근거지 보위전 이 후 간도 지방에서는 항일 유격 근거지가 점차 확산되어 항일 투쟁의 근거지로 되었다.

참고문헌
  • 중국 조선 민족 발자취 총서 편집 위원회, 『봉화』(중국 조선 민족 발자취 총서 제3권, 민족 출판사, 1989)
  • 延边 朝鲜族史 编写组,『延边 朝鲜族史』(上) (延边 人民 出版社,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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