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來豐洞 虐殺 事件 |
|---|---|
| 분야 | 역사/근현대 |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 지역 |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시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성격 | 한인 학살 사건 |
|---|---|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31년 11월(음력) |
1931년 일본 군경이 화룡현 내풍동에서 자행한 한인 학살 사건.
1931년 만주 사변 후, 조선족으로 이루어진 항일 적위대원들이 친일파인 차두균을 살해하자 일본 영사관은 200여 명의 군경을 파견해 1931년 11월 2일(음력)에 평강 일대에 대하여 ‘토벌’을 감행하였다.
1931년 10월 7일, 중국 공산당 비암 지부 소속의 염기순(廉基舜)·염학순(廉鶴舜)·심증국(沈曾國)·김문명(金聞明) 등 항일 적위대원들은 동성 용남촌(東盛 龍南村)에 가서 친일파인 차두균을 살해하였다.
1931년 11월 2일(음력) 일본 총영사관 군경들은 용남촌에서 염기순·염학순·심증국·김문명 등을 체포하고, 소오도구·대마록구에서 최현국·문경팔을 체포하여 기성촌으로 압송하였다. 일본 총영사관 군경들은 체포한 6명 적위단 대원들을 가혹하게 고문하였지만, 그들을 끝까지 비밀을 누설하지 않았다.
1931년 11월 3일 일본 총영사관 군경들은 염기순 등 6명을 내풍동에 있는 북일 소학교에 압송하여 교실 안의 기둥에 묶어 놓고 불을 질렀다. 이어, 총기를 난사하여 살해하였다.
내풍동 학살 사건은 일본 군경의 잔학성을 만천하에 그대로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이다. 격노한 항일 군민들은 일본 군경의 탄압에 굴복하지 않고 새로운 항일 투쟁에 뛰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