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東興 中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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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야 | 역사/근현대 |
| 유형 | 기관 단체/학교 |
| 지역 |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성격 | 천도교에서 용정에서 설립한 중등 교육 기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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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립자 | 최익룡 등 |
| 인가 시기/일시 | 1920년 |
| 개교 시기/일시 | 1921년 10월 1일 |
| 최초 설립지 | 용정 |
| 현 소재지 | 용정시 제3 중학 |
동흥 중학교는 한인 2세들에게 중등 교육을 실시할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동흥 중학교는 1921년 천도교 종리원의 명의로 설립되었다. 학교의 운영 경비는 주로 당지와 국내의 천도교 신도와 반일 유지인사 그리고 학생의 학비에 의하여 마련하였다. 건교 초기에 교원수는 3명, 학생은 113명이었다.
1924년 7월 동흥 중학교의 임계학 등이 8월 11일 천도교회부터 학교의 경영 관리권을 인계 받았다. 하지만 경영난으로 인하여 경영권을 다시 천도교에 넘겨줄 것을 요구하자 교직원과 학생들이 반대를 하였다. 조선 총독부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학교를 장악하려고 하였다. 이런 와중에 윤익선을 위주로 하는 타협파와 박재하를 위주로 하는 반대파 간의 투쟁이 벌여졌다.
일제 세력에 의부한 타협파들이 학교의 경영권을 장악하고 진보적인 교원들을 해임시켰다.
1926년 11월 29일 친일파의 행위에 격분한 동흥 중학교 학생들이 동맹 휴학을 선포하고 대성 중학으로 전학을 하였다. 후에 설립자 조합에서 학교 운영권을 넘겨 받았다. 대성 중학과 동흥 중학을 합병하려는 움직임도 있었으나 일제의 간섭으로 성사되지 못하였다.
동흥 중학교는 천도교가 설립한 학교로서 교수 내용에 봉건 유교적인 사상이 가미되어 있었다. 1922년에 학교 내에 마르크스주의를 공부하는 모임, 광명회가 조직되어 마르크스주의를 공부하는 학생들이 나타났다. 학생들은 사회과학 연구회 등을 조직하여 새로운 사조를 공부하고 접수하였다. 1924년 7월 진보적 사상을 가진 교사 임계학(任啓學) 등이 교사단을 조직하여 동흥 중학교를 관리하기 시작하였다. 박재하(朴載河), 이주화(李周和), 임계학(任啓學) 등이 중심이 되어 1927년 5월 1일에 용정과 두도구에서 수천 명 학생과 군중이 모여 시위 행진을 단행하여 메이데이를 기념하였다. 일본 간도 총영사관에서는 박재하(朴載河) 등을 체포하여 이른바 제1차 간도 공산당 사건을 조작하였다.
1930년 1월 23일에 수천 명 학생들은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자는 구호를 부르면서 시위 행진을 하였다. 간도 일본 총영사관 경찰들은 무력으로 학생을 해산시켰다. 1월 23일과 28일의 시위대오가 간도 일본 총영사관 경찰에 무력으로 체포된 후 2월 6일에 분노한 학생들은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교문을 나가서 신문 등을 나누어주고 반일 구호을 부르며 일제의 압박 정책에 맞서 투쟁하였다. 이러한 학생 운동은 점차 농민의 운동과 결합하면서 새로운 차원에서 전개되었다. 1934년 초 동흥 중학교와 대성 중학교를 합쳐 민성 중학교를 만들었으나 강한 반대에 부딪쳐 1년만에 종전대로 분리시켰다.
현재 동흥 중학교는 용정 제3 중학이란 이름으로 경영되고 있으며, 조선족 학교가 아니고 한족 학생들이 공부하는 학교로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