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中國 音樂史에서 두 가지 처음을 記錄한 朝鮮族 音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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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현대/현대 |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05년201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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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8월 연길에서 중국 조선족 음악 연구회박장수 상무 부회장을 만났다. 고희를 넘긴 나이임에도 그는 시종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2010년 중국 한인[조선족] 음악이 이룩한 역사를 말했다. 그가 들려준 중국 음악 역사에서 두 가지 ‘처음’을 기록했던 한인[조선족] 음악의 현대사는 감동 그 자체였다.
‘10’이라는 글자가 세 번이나 겹치는 삼련십(三連十)의 날, 사상 최고의 길일로 중국의 수도 북경에는 평소보다 몇 배나 많은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2010년 10월 10일 저녁, 국가 민족사무위원회 문화선전사와 중국 문화 예술 연합[중국 문련] 국내 연락부가 주최하고 중국 조선족 음악 연구회와 중국 음악가 협회 민족음악위원회의 주관으로 중국 조선족 작곡가 교향 음악회가 북경 음악청에서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이날 원[전] 전국 인민 정치 협상 회의[전국 정협] 부주석 조남기, 원[전] 국가 민족사무위원회 주임이덕수, 원 중국 문련 주석 오조강, 중국 음악가 협회 명예 주석 부경진 등 유명 인사들과 저명한 음악인, 북경 거주 한인[조선족]과 한국인[류우익 주중 한국 대사 포함]을 포함한 관중 900여 명이 음악회를 관람했다. 중국 한인[조선족] 음악의 최고의 날로 역사에 기록되는 순간이었다. 55개 소수 민족 중에 자신들이 창작한 교향악만을 모아 수도 북경에서 그것도 중국 교향악단의 협연 속에 음악회를 가진 것은 중국 음악 역사에서 처음이었다. 2010년 10월 10일은 중국 한인[조선족] 음악사를 넘어 중국 음악사에도 기록되어야 할 역사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2008년 북경 올림픽, 2010 상해 엑스포에서 중국 한인[조선족]은 ‘가무의 고장’ 연변의 힘을 다시 한번 중국 사회와 세계인들에게 보여준 바 있다. 그런데 과거 연길을 경유하는 백두산 관광 상품에서 한국 관광객은 백두산을 다녀오는 길에 용정에서 윤동주 시비를 볼 수 있는 대성 중학교 기념관과 일송정, 또 경우에 따라서는 윤동주의 고향집인 명동촌을 들르고연길에 도착해서는 노래방이나 발마사지를 즐기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었다.
그러나 2~3년 전부터 연변 관광이 달라졌다. 2007년 3월에 첫 선을 보인 연길시 조선족 예술단의 조선족 민속 풍정 가무 「계절의 노래」를 연길 문화 예술 센터에서 관람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계절의 노래[四季如歌]」[일명 연길 찬가, 사계절의 노래]는 평소 연변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연변이 ‘가무의 고장’임을 확인하게 해주고 있는데, 5월부터 10월까지 매일 저녁 7시 30분 연길시 문화 예술 센터에서 오르고 있는 중국 한인[조선족]의 풍토와 인정, 아름다운 세태를 그린 대형 가무극 「계절의 노래」가 연변 관광의 브랜드로 자리 잡은 것이다. 2011년 8월, 동옥선(董玉善) 단장은 어떤 때는 단 9명의 관중 앞에서 공연을 한 적도 있었으나, 이제는 연변을 알리는 문화 상품으로 자부할 만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연길시 조선족 예술단은 무용부, 연기부, 성악부, 기악부로 이루어진 100여 명 규모의 종합 예술단이다. 따라서 예술단의 공연으로 한인[조선족] 무용과 한인[조선족] 연극의 수준도 알 수 있으며, 한인[조선족] 음악의 현재를 판단할 수 있는 무대이기도 하다. 연변의 한인[조선족] 예술은 무용, 연극, 음악 외에 미술과 사진 등이 각기 전문 협회를 구성하고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으나, 모두 길림성 산하 단체로 등록되어 있다. 그런데 음악은 중국 국가가 인정하는 사단 법인으로 중국 조선족 음악 연구회가 활동하고 있다.
중국 조선족 음악 연구회는 1980년 8월 중국 음악가 협회의 비준과 북경과 동북 3성 음악가 협회의 동의를 거쳐 전국 범위에서 한인[조선족] 음악 골간을 중국 음악가 협회 연변 분회 회원으로 흡수한 후, 그 후 여러 차례 전국성적인 활동을 함께 한 기초 위에서 박장수가 발기하고 중국 음악가 협회의 비준을 거쳐 1989년 3월 12일 연길에서 공식적으로 성립되었다. 또한 1999년 12월 29일, 중국 조선족 음악 연구회는 정부의 재차 등록을 거쳐 중국 문련 산하의 전국성적인 학술 단체로 되었다. 중국 음악 역사에서 두 가지 ‘처음’이라는 역사가 만들어진 것은 바로 중국 조선족 음악 연구회와 연구회를 실질적으로 이끈 박장수 상무 부회장의 숨은 노력 덕분이었다.
중국 조선족 음악 연구회는 한인[조선족] 민족 음악 문화의 유실(遺失)을 방지하고 한인[조선족] 음악을 계승·발전시키기 위해 1999년부터 편집 위원회를 조직해 자료를 모으고 정리에 들어갔으며 2001년 집필을 시작, 5년 만에 대작을 완성했다. 62만 자에 달하는 이 책은 한인[조선족] 음악의 역사를 이민 시기·해방 전쟁 시기·건국 초기·동란 시기[문화 대혁명 시기]·개혁개방 시기로 구분하고 전통 음악·항일 음악·사회 음악·학교 음악·군인 음악·전문 예술 단체의 음악 등의 내용을 싣고 있다. 음악 교육과 음악 출판 및 방송 그리고 음악 연구 등에 대해서도 정리했다. 그리고 각 시기, 장르별로 대표 인물도 소개했다.
『20세기 중국 조선족 음악 문화』는 중국의 56개 민족 가운데 처음으로 단일 민족의 음악 문화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책이다. ‘가무의 고장’ 연변 예술의 절반 이상이 이 책에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모든 문화 예술 활동의 정상적인 활동이 불가능했던 동란 시기를 제외하고는 건국 초기부터 2005년까지 대중음악 활동을 담당해 온 문화관, 예술관의 음악 활동과 전문 음악 예술 단체의 음악도 자세하게 서술되었다. 그러나 한글로 쓰여 중국의 주류 사회에 널리 알리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이에 중국 조선족 음악 연구회는 바로 중문판 작업에 착수했다.
2010년 8월 『中國朝鮮族音樂文化史』[중문판]가 출판되었다. 『20세기 중국 조선족 음악 문화』가 출판된 이후 2008년까지의 성과가 추가로 반영된 것 이외에 내용은 거의 다름이 없다. 마침내 100여 년에 걸친 중국 한인[조선족] 음악의 찬란한 역사를 담은 중국 음악사의 ‘처음’, 56개 중국 소수민족 가운데 한인[조선족] 음악의 역사와 문화가 집대성 된 중문판 책이 완성된 것이다. 이로써 중국 한인[조선족] 음악은 중국 전역에 널리 알려질 수 있게 되었다.
2010년 9월 21일 중국 음악가 협회와 국가 민족사무위원회 문화선전사에서 공동 주최하고 중국 조선족 음악 연구회와 민족 출판사에서 공동 개최한 『중국 조선족 음악 문화사』[한문판] 출판 좌담회가 민족 출판사에서 진행되었다. 좌담회에는 국가 민족사무위원회, 국가 신문 출판 총서, 중국 문련, 중국 음악가 협회, 민족 출판사 등 관련 분야의 관계자들과 음악 관련 언론 매체 인사 40명이 참석해 중국 한인[조선족] 음악 문화사의 발전에 대해 회고하고 민족 문화 예술을 보호, 발전시켜야 할 중요성에 대해 깊이 있게 논의했다.
중국 음악가 협회 부주석 서패동(徐沛東), 중국 음악가 협회 명예 주석 부경진(傅庚辰), 국가 민족사무위원회 문화선전사 부연구원인 왕경삭, 국가 신문 출판 총서김의천 원[전] 부사장 등이 『중국 조선족 음악 문화사』의 가치와 성과를 극찬하였다. 한편, 출판 좌담회가 진행되는 동안, 박장수중국 조선족 음악 연구회 상무 부회장은 중국 음악사에 또 하나의 ‘처음’, 중국 조선족 교향악 음악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2010년 초, 한인[조선족] 음악인 모임에서 중국 조선족 음악 연구회장천일 부회장은 “조선족의 음악 우세를 발휘하려면 최고 차원의 음악회를 개최해야 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 모인 사람들 모두 일리가 있는 일이라고 동의했다. 조선족의 제일 우수한 작품, 제일 우수한 표현 예술가들로 북경의 제일 우수한 교향악단, 제일 훌륭한 극장에서 가장 성공적인 음악회를 개최하기로 합의했다. 전국적인 행사인 만큼 주최 단위를 찾아야 했다. 이런 일은, 늘 그렇듯이, 표현 예술가나 학자보다도 중국 조선족 음악 연구회 살림을 도맡아 온 박장수 상무 부회장의 몫으로 남게 되었다.
박장수 부회장은 다시 또 하나의 ‘처음’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가장 큰 문제인 행사비를 마련하는 일이었다. 박장수 부회장은 집을 팔겠다는 각오까지 했는데, 다행히 음악인 출신인 대련의 무석 시무래스 그룹[無錫西姆萊斯集團]박용화 이사장이 사업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흔쾌히 거금을 지원함으로써 해결되었다.
음악회에 어떤 작품을 올릴 것인가도 반복적인 토론을 거쳐야 했다. 길림성 가무단 예술위원회 전임 주임최의광의 관현악 서곡 「축전(祝典)」, 연변 가무단 저명한 작곡가 최창규의 명상곡 「봇나무」, 연변 가무단 저명한 작곡가 허원식의 교향 조곡 「아침 해 솟았네」의 제3악장 「해란강」, 연변 가무단 1급 작곡가 황기욱의 교향시 「장백소묘」, 중국 음악 학원 부주임 우영일의 관현악 「명절」, 흑룡강성 가무극원 1급 작곡가 황송철의 「아리랑 광송곡」, 상해 음악 학원 작곡학부 부주임 윤명오의 교향음화(音畵) 「운(韻)」, 연변 문련 주석이자 중국 조선족 음악 연구회 회장인 박서성의 제1바이올린 협주곡 「장백인상」, 중국 인민해방군 정치부 가극단 예술 총감독 장천일(장군)의 교향 조곡 「운남기상」의 제4악장 「타가(打歌)」, 연변 가무단 저명한 지휘자 안국민의 기상곡 「나의 살던 고향」 등 11명 작곡가의 11부 작품이 무대에 올려졌다. 지휘는 중국 가무극원 상임 지휘, 중국 교향악단의 상임 객원 지휘자 강금일이 음악회의 지휘봉을 잡았으며, 바이올린 독주자로는 중국 음악 학원 현악 교연실 주임인 김휘가 나섰다.
주최 단위의 섭외 또한 어려운 문제였다. 그는 우선 중국 음악가 협회를 찾아갔다. 전에도 ‘정률성 작품 음악회’ 등 행사에서 여러 번 합작한 적이 있다 보니 동의할 줄 알았는데 새로운 규정에 따르면 협회를 주최 단위로 하려면 20만원을 납부해야 하므로 그 산하의 민족 음악 위원회의 명의로 하라고 대답했다. 예산에는 이 금액이 들어있지 않았고 있다고 해도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 작품이 남에게 뒤 질것이 없다는 자부심에서였다. 이처럼 간고한 준비 사업을 거쳐 상기 행사들이 무난하게 치러질 수 있었다. 결국 중국 문련과 국가 민족사무위원회가 한개 민족 단체의 행사에 공동 주최 단위로 참여했는데, 이 또한 처음이었다.
2010년 10월 11일, 음악회 다음날 개최한 좌담회에서 중국 음악계 전문가들은 이번 음악회를 격찬했다. “이번 음악회는 우리나라 음악사상 처음으로 수도에서 개최한 단일 소수 민족 음악회로서 어떤 작품은 국내 교향악 작품 중에서도 가장 우수한 작품 반열에 속한다.” “국내 교향악 작품 음악회 중 아주 수준 높고 멋진 음악회였다.” “이와 같은 음악회는 당신들 조선족들만이 해낼 수 있다.” “이처럼 수준급 음악회를 개최할 수 있는 것은 조선족이 훌륭한 음악 인재와 우수한 음악 작품이 많다는 것을 보여준 것으로 생각된다.” “아주 감동적이었고 흉금을 울리었다. 국내 대표성을 띤 음악회로서 중국 음악 악계의 성대한 행사였다고 말할 수 있다.”
‘가무의 고장’ 연변은 노래 잘 부르고 춤을 잘 추는 한인[조선족]을 말하는 대명사가 되었다. 그러나 2010년 10월 10일 음악회는 한인[조선족]의 민속 풍정을 노래하는 민속 음악 외에 교향 음악도 최고 수준임을 중국 전역에 확인해 주었다. 중국 조선족 음악 연구회박장수 상무 부회장은 교향악 음악회 다음으로 저명한 독주자와 독창자를 무대에 올리기를 바라고 있다. 모든 중국인이 보는 가운데 한복을 곱게 입고 우리말로 노래를 부른 한인[조선족] 가수 김미화, 북경에서 먼 길 마다하지 않고 동북의 조선족 축제에 참석해 축가를 부르는 바리톤 김영철. 한인[조선족] 가수들의 미성이 또 연주자들의 아름다운 선율이 다시 북경 음악청에 울려 퍼질 날이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