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間島 共産黨 事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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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야 | 역사/근현대 |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 지역 |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27년 10월 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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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28년 9월 2일 |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30년 5월 중순 |
1927년부터 1930년까지 일제가 간도[현재 중국 연변]에서 활동하던 공산주의 운동가들을 검거한 사건.
간도 공산당 사건은 3차에 걸쳐 전개되었다. 먼저 제1차 간도 공산당이 설립되는 역사적인 상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26년 3월 조선 공산당은 중앙 집행위원회를 다시 건립하고 만주 총국·상해 총국·일본 총국을 건립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에 1926년 5월 16일 조봉암(曺奉岩)·최원택(崔元澤) 등이 영안현 영고탑에 만주 총국을 조직하였다. 동시에 고려 공산 청년회 만주 총국이 건립되었다.
1926년 10월 28일 연길현 용정촌에서 건립된 조선 공산당 만주 총국 동만국 집행위원회의 위원은 모두 9명이었고 전용략을 책임 비서로 하였다. 만주 총국 동만국은 잡지 『화염』을 간행했는데 2,000여 부를 발행하였다.
1927년 5월에 이르러 만주 총국은 13개 지회와 3개 군회로 발전하였으며 당원은 모두 43명이었다. 동만구역국의 건립과 동시에 고려 공산 청년회 만주 총국 동만도 조직을 건립하고 이정만을 책임 비서로 하였다. 1928년 9월 고려 공산 청년회 만주 총국은 군간부 6개소에 59개 세포, 230명 회원으로 발전하였다.
제2차 간도 공산당은 제1차 간도 공산당 사건이 발생한 후 국면을 만회하고 투쟁을 견지하기 위하여 한상묵(韓相默) 등이 북풍파벌[북풍회] 사람들과 관계를 맺음으로써 비롯되었다. 1928년 2월 혁명 조직을 회복한 동시에 노동자들에 대한 조직 공작을 강화하고 노동 조합·농민 동맹 등 혁명적 대중 조직을 확대하였다.
1928년 5월 김봉익(金鳳翼)·주채희(朱埰熙) 등의 지도 밑에 노동 조합·농민 동맹과 청년 총동맹을 동원하여 5·1 기념 시위 행진과 5·30 유혈사 3주년 강연회를 가지고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만행을 성토하였다.
제3차 간도 공산당 사건은 1929년 말과 1930년 초의 역사적인 상황과 맞물려 있다. 먼저 1929년 7월 장학량(張學良)이 소련을 반대하는 중동로 사건(中東路事件)을 일으켰다. 소련이 운영하던 북만주의 중동 철도를 장학량이 무력으로 점령하고 소련 영사관 폐쇄, 외교관을 추방한 것이다. 한국에서는 광주 학생을 중심으로 전국적인 학생 반일 투쟁이 일어났다. 연변 청년 학생들은 한국 내 반일 투쟁의 영향 밑에 또 한 차례 반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제1차 간도 공산당 사건은 1927년 10월 2일 용정 일본 총영사관이 정탐의 밀고에 용정대성 중학교와 동흥 중학교의 교원인 박재하(朴載廈)·임계학(林啓學) 등 수명을 체포하면서 비롯되었다.
이에 조선 공산당 만주 총국 동만국은 일제의 백색 테러를 반대하고 체포된 동지들을 구출하기 위해 이튿날 수 백 명의 학생들을 동원하여 시위 행진을 하였다. 시위 학생들은 손에 붉은기를 들고 삐라를 살포하였으며 일본 총영사관 문 앞에 이르러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자!’는 등의 구호를 소리 높여 외쳤다.
일본 경찰들은 지방 군경들과 결탁하여 동만국을 습격하여 조선 공산당 만주 총국 책임 비서 대리이며 조직부장인 최원택과 동만국 책임 비서 안기성 등 100여 명을 체포하였다.
제2차 간도 공산당 사건은 1928년 9월 2일 동만도 청년 간부 이정만(李正萬)·이기석 등의 사회로 열린 국제 청년절 기념 활동을 이용해서 각지 혁명 청년들을 동원하여 삐라를 뿌리고 표어를 붙이고 강연회와 군중 대회를 개최하였다. 또한 이들은 시위 행진을 통해 연변을 침략한 일본 제국주의의 죄행을 적발하였으며 일본 경찰이 지방 군경과 결탁하여 혁명 군중을 체포하는 데 적극 항의하였다.
이번 투쟁에서 조직이 폭로되었는데 일본 총영사관은 많은 일본 군경들을 동원하여 고려 공산당 청년회 만주 총국 동만도의 간부이며 책임 비서인 이정만과 선전부장 김철산 등 72명 간부와 시위 군중을 체포하였다.
제3차 간도 공산당 사건은 1930년 1월 23일 용정 각 학교의 학생들이 한국에서 광주 학생들이 일본 침략군에 체포되었다는 소식에 분노하여 삐라를 뿌리면서 투쟁에 뛰어들면서 비롯되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대성·동흥 두 중학교 학생들도 광주 학생들의 반일 투쟁을 성원하는 시위를 단행하였다.
그 뒤 1930년 1월말 만주 총국 동만국 책임자인 장시우·윤복송·강석준·한성·이동선 등은 연길현 수신향 내풍동에서 동만도 간부 회의를 소집하고 3·1 운동 11주년을 계기로 전 연변에서 반일 투쟁의 고조를 일으키기로 결정하였다.
1930년 2월 28일부터 3월 5일까지 용정·소오도구·내퐁동·대동구·4도구·2도구·3도구·약수동·장인강와 노두구 등지의 수 천 명 청년·학생과 농민 군중들은 붉은기를 들고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자!”는 구호를 높이 외치면서 연일 시위를 전개하였다. 3월 5일 만주 총국 동만도 간부들은 회의를 열고 ‘3·1 폭동 11주년 기념 준비위원회’를 ‘전동만 폭동 위원회’로 고치고 5월 1일 좌우 전 동만에서 폭동을 벌일 것을 결의하였다.
하지만 5월 중순에 이르러서는 조선 공산당 만주 총국 선전부장 장시우, 만주 총국 동만도 책임 비서 윤복송, 선전부장 강석준 등 130여 명 간부와 혁명 군중들이 체포, 투옥되어 투쟁은 실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