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혁명당 사건

한자 朝鮮 革命團 事件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정의

1932년 1월 조선 혁명당(朝鮮革命黨) 간부들이 요령성 신빈현(新賓縣) 하북(河北)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된 사건.

역사적 배경

조선 혁명당은 1929년 12월 길림성에 설립된 국민부의 정당 성격을 가진 단체였다. 출범 당시에는 현익철(玄益哲)·현정경(玄正卿)·이웅(李雄)·고이허(高而虛)·최동오(崔東旿)·장승언(張承彦)·김보안(金輔安)·고할신[高轄信] 등이 활약하였다. 산하에 조선 혁명군을 두었다. 조선 혁명군은 친일파 숙청, 교민 보호, 국내의 일제 주요 기관 파괴, 일제 관헌과 악덕 부호 응징 등을 주요 임무로 삼았다.

1931년 9월 만주사변 후, 일제가 만주 내 독립군 토벌 작전을 전개하면서 독립군 단체는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이에 조선 혁명당 간부들은 급변할 새로운 정세에 대응하고자 1932년 1월 17일, 신빈현(新賓縣) 하북의 서세명(徐世明)의 집에서 회의를 열고 금후 투쟁 방안을 연구, 토의하였다. 이때 원로파와 소장파 간에 동북 견지론과 동북 구국군과의 연합 문제를 두고 다퉜다. 결국 소장파들이 동북 항전을 견지하면서 이호원(李浩源)조선 혁명당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선출하고, 당 조직을 정비하는 한편 조선 혁명당국민부를 단일체로 하여 임전 태세를 갖추기로 하였다.

경과

조선 혁명당 회의 장소가 사전에 퉁화현(通化縣)의 일본 영사관에 탐지되어 1932년 1월 19일 일본 경찰 50명과 중국 보안대 100여 명이 서세명 집을 에워쌌다. 당시 조선 혁명당 간부들은 경계를 소홀히 하고 주연까지 벌였던 상황이라 제대로 응전하지 못한 채 잡히고 말았다. 체포된 인사들은 이호원(李浩源) 중앙집행위원장을 비롯, 김관웅(金寬雄)·이종건(李鍾建)·장세용(張世湧)·이규성(李奎星)·박치화(朴致化)·전운학(田雲學)·차용륙(車用陸)·김보안(金輔安)·이동산(李東山) 등이었다. 이를 신빈 사건 혹은 흥경 사건이라고도 한다.

결과

조선 혁명당 사건에 이호원(李浩源)·김보완 등 지도자를 잃은 조선 혁명당은 붕괴의 위기에 처하였다. 이에 양세봉(梁世奉)과 고이허 등은 조선 혁명당의 위기 극복을 위해 파괴된 조직을 다시 정돈하고 고이허를 조선 혁명당 중앙 집행위원장으로 선출하였다. 그 뒤 중국군과 연합군을 결성, 영릉가(永陵街)·신빈로성(新賓老城)·흥경성(興京城) 등지에서 일본·만주군과 복수전을 벌여 대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당보다는 군사 우선주의가 대두되면서 민중 기반이 없던 조선 혁명당조선 혁명군은 1933년 이후 유명무실해졌다.

참고문헌
  • 채근식, 『무장독립운동비사(武裝獨立運動祕史)』(대한민국공보처, 1949)
  • 경윤호, 「조선혁명당의 성격 연구」(『역사와 세계』19, 1995)
  • 장세윤, 「재만 조선혁명당의 조직과 민족해방운동」(『사림』18,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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