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교회

한자 孔教會
분야 역사/근현대|종교/유교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13년 11월
정의

1913년 간도 유림들이 간민회의 설립에 반발하여 설립한 보수 단체.

설립 목적

공교회는 공교를 창명(昌明)하고 인도(人道)를 부식(扶植)하는 것을 종지(宗旨)로 하여, 공교를 성심 성의로 봉경하는 인물을 입회시켰으며 조선 이주민들의 권익을 보호하고자 하였다.

변천

공교회는 1912년 10월 7일, 공자 탄생 기념일을 계기로 비롯되었다. 당시 원세개는 대통령에서 황제가 되기 위해 민주 공화 체제를 포기하고 공맹지도를 국교로 정하고 전국적으로 공봉하도록 지령을 내리면서 공교 총회가 북경에서 설립되었다.

1913년 9월 27일, 산동성 곡부(曲阜)에서 제1차 전국 공교(孔敎) 대회가 열리고 대규모적인 제공(祭孔) 활동이 시작되었고, 1913년 10월 간도 지역의 유림 최지은·심상돈 등은 조선인 사회에 「공교 지회 통지서」를 발표하면서 1913년 11월 공교 연길 지회가 성립되었다. 1920년대 초에 공교회가 내부적으로 구파·신파로 나뉘어 분열하기 시작하였으나, 1930년에 공교회가 다시 회복되었다. 1921년 7월 11일 대성 중학교, 1925년 3월 대동 학원, 1926년 6월 1일 집성 학교 등이 설립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공교회는 친일 행위를 증오하고 중국에서 조선 이주민들의 권익을 보호하려는 신념으로, 간민회의 개화 교육을 반대하여 전통적인 유교 사상을 고수하고, 주로 간도 지역 조선인 사회를 상대로 많은 교구를 설립하였으며, 사공을 통하여 포교 활동을 진행하였다.

공교 연길 지회의 조직은 회장·부회장·총주임 아래에 문패 겸 회계·편집·선교원 겸 분임 간사·사사서기 등을 두었다.

공교 지회는 단체를 운영하고 유지하기 위해 회원들에게 많은 헌금을 강조하고 하면서 헌금한 액수에 따라 회원을 여러 등급으로 나누었다.

1910년대 초, 간도 지역 조선인 사회에서 간민회·농무계·공교회 등 정치 단체들이 조직되면서 모두 반일 운동을 지향하였지만, 서로 다른 이념에 따라 초기부터 갈등이 나타났으며 분쟁을 하였다. 공교회가 운영한 학교는 수구파의 유교 이념과 서당 교육을 독단적인 운영 방식으로 진행하였다.

현황

공교회는 1930년 회복되긴 하였지만 이후 아무런 자주성도 갖지 못하였고, 간도 지역 조선인 사회에도 도움을 주지 못하였다.

의의와 평가

1910년대 이후 중국에 이주한 조선인들은 조선 국내에서 일제 식민지 통치를 경험하였기 때문에 이주한 후에도 가슴에는 일제에 대한 적개심이 있었다. 그들은 반일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중국의 정법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조선인 사회를 보호하기 위한 여러 단체들이 조직되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공교회였다.

참고문헌
  • 손춘일, 「간도 조선인사회와 공교회」(『간도와 한인 종교』, 한국학중앙연구원,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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