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開山屯鎭 |
|---|---|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 지역 |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개산둔진 |
| 시대 | 현대/현대 |
| 개설 시기/일시 | 1956년 |
|---|---|
| 변천 시기/일시 | 1934년 |
| 변천 시기/일시 | 1958년 |
| 변천 시기/일시 | 1964년 |
| 변천 시기/일시 | 1988년 |
| 성격 | 행정 지명 |
| 면적 | 201㎢ |
| 가구수 | 8,408가구 |
| 인구[남/여] | 21,321명 |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에 속하는 향진급 지방 행정 구역.
개산둔진에는 9개의 행정 마을과 68개의 자연둔이 있으며 4개의 지역사회 주민위원회가 있다. 이 중 조선족 마을로는 자동촌(子洞村), 광소촌(光昭村), 선구촌(船口村), 애민촌(愛民村), 회경촌(懷慶村) 등이 있다. 자동촌은 함경북도 부령에서 온 이주민들이 마을을 세우고 부령촌이라고 불렀다가, 1982년 자동둔으로 고쳤다. 조선족은 2,174명으로 그 중 농업 인구가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광소촌에는 조선족 인구가 2,199명인데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한다. 선구촌은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함경북도 종성과 마주하고 있다. 조선으로부터 이주민들이 늘어남에 따라 도강할 때 배를 타고 건넜던 나루터가 있었다고 하여 ‘선구(船口)’라고 불렀다. 마을에는 조선족 인구가 1,248명이고 그 중 절반 이상이 농업에 종사한다. 애민촌은 이름 그대로 애민의 뜻을 담은 지명이다. 마을에는 조선족이 685명인데 대부분이 농업이다. 회경촌은 1934년 조양천과 개산둔을 연결하는 철도가 개통되면서 철로의 개통을 경축한다는 뜻으로 ‘회경촌’이라고 하였다. 마을에는 조선족 인구가 769명이며 그 중에서 농민이 561명이다.
청나라는 1890년에서 1894년 사이에 이 지역에 영원보(寧遠堡)를 설치하고 개태(開太), 개발(開發), 개화(開華), 개문(開文), 개운(開運) 등의 조직체[社]를 두었다. 1922년 조직체의 이름에서 첫 글자인 ‘개(開)’자를 취하고, 여기에 지리적인 실체인 산을 더하여 ‘개산둔’이라고 하였다. 1923년 천보산(天寶山)에서 개산둔에 이르는 경편철도가 개통되면서 차츰 덩치를 불리다가, 1934년 광궤철도가 개통된 후 정식으로 개산둔으로 명명하였다. 현재 개산둔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동네 노인들로부터 “산이 열린 동네”라는 말을 자장가처럼 들었다고 한다.
개산둔진의 총면적은 201㎢이며 2009년 말 세대수는 8,408호이고 주민은 21,321명이다. 이 가운데 비농업 인구는 15,558명에 달한다. 중국의 1급 국경 출입구의 하나로서 연검참(聯檢站)과 북한으로 통하는 국경 다리가 있다. 연검참은 길림성과 연변조선족자치주, 그리고 용정시의 통상무역에 있어서 중요한 통로의 역할을 하고 있다. 개산둔진에는 60년의 역사를 가진 개산둔 화학 섬유 펄프 공장이 있다. 청동기 시대의 삼개유적[三開遺址]이 있고, 한나라 시대의 제동유적, 발해 시대의 선구산성[船口 山城], 탄전유적[灘前遺址], 탄전묘군(灘前墓群), 선구 봉화대[船口 烽火臺], 요금 시대의 회경묘군(懷慶墓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