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특별한 이야기

동해용왕이 사납게 맴돌이치던 전설의 회룡봉 마을

한자 東海 龍王이 사납게 맴돌이치던 傳說의 回龍峰 마을
분야 역사/근현대, 지리/인문 지리|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혼춘시 경신진 회룡봉촌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혼춘시 경신진 회룡봉촌은 어떤 곳인가?

회룡봉촌(回龍峰村)은 혼춘시(琿春市)에서 가장 동쪽에 위치한 조선족 전통 마을로 두만강이 동, 서, 남 삼면을 완곡하게 흐르면서 남긴 말발굽형을 이루고 있다. 회룡봉촌에 가려면 혼춘시 경신진(敬神鎭)에서 아스팔트 길을 벗어나 남쪽으로 차머리를 돌려야 한다. 옥천동(玉泉洞)을 지나 노전(魯田)을 거쳐 곧장 가면 회룡봉촌이 나온다. 조선 말기 함경북도(咸鏡北道) 경흥(慶興)[지금의 은덕] 사람들이 이주하면서 생긴 마을이다. 2006년 통계 자료에 따르면, 136호[벌등촌 60호, 노전 22호, 회룡봉 54호]에 550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경작지는 226㏊이다.

지도를 펼쳐 경신진에서 회룡봉을 찾아보면, 두만강의 작은 물길이 노전에 부딪쳐 회룡봉을 에워싸고 둥그러니 원을 그리면서 다시 노전으로 되돌아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목이 된 노전은 잘룩하고, 회룡봉은 반도같이 펑퍼짐한 모양이다. 어찌 보면 하나의 호리병박 같다. 경신의 옥천동이 ‘호리병의 입구’라고 하면, 노전은 ‘병목’이고, 회룡봉은 ‘병속’이다. 소설가 최국철은 ‘회룡봉촌은 혼춘에서 가장 동쪽에 위치한 마을로서 두만강이 서, 남, 동 삼면을 완곡하게 흐르면서 남긴 말발굽형 마을’이라고 묘사했다.

본래 ‘회룡봉’은 ‘도룡비’[조룡비(弔龍碑)의 함경도 사투리]라 불렸다. 도룡비가 회룡봉으로 바뀐 것은 한일 합방 이후의 일이다. 나라 잃고 망국노로 전락한 백성들한테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아줄 그러한 영웅이 절박했다. 그러한 마음은 용을 기리던 마음에서 용이 되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회룡봉, ‘되돌아온 용의 정기’를 받아 이 마을에서 조선 인민군 장군 10명, 한국군 장군 1명 등 무려 11명의 장군이 배출되었다. 또 106명의 대학생, 53명의 중등 전문 학교 학생, 항일 투쟁 열사 29명, 해방 전쟁 열사 6명, 조선 전쟁 열사 26명 등이 배출되었다. 해방 후 인가가 제일 많았을 때라 해도, 220호[900명]에 불과했던 이 마을에서 11명의 장군이 났다고 하면 가히 기적과도 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회룡봉촌을 ‘항일촌’, ‘혁명촌’, ‘인재촌’으로 기꺼이 부른다. 그리고 회룡봉연변 지역에서 유일하게 촌사(村史)를 출간한 곳이기도 하다.

용이 되돌아오기를 바랐던 사람들의 옛날이야기

회룡봉(回龍峰)은 ‘용이 감도는 형국의 봉우리’라는 뜻이다. 전설에 의하면, 유유히 흐르던 두만강을 따라 유유한 형국의 봉우리가 동해용왕이 두만강을 에돌며 맴돌이쳐서 지금과 같이 말발굽 형국이 되었다고 한다. 필자는 1990년 7월에 혼춘시 경신진에 거주하는 왕덕으로부터 ‘회룡봉 전설’을 채록한 바 있다. 전문을 『두만강 유역 전설집』에 수록했는데, 전문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두만강 하류 경신 땅에 쳇바퀴처럼 둥그런 가운데 뭇 산을 등지고 옹기종기 살림집들이 모여 앉은 살기 좋은 마을이 있으니 사람들은 ‘회룡봉’이라고 부른답니다.

아득히 멀고 먼 옛날 두만강변 북쪽 산기슭에는 마음씨 착하고 무던하며 부지런한 소년이 양친 부모를 여의고 홀로 살아갔습니다. 소년에게는 조상 때부터 물려내려 온 진귀한 옥피리가 하나 있었는데 그는 먼지가 묻을세라 아끼며 고된 하루의 일을 마친 뒤에 옥피리를 꺼내어 불곤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하루였습니다. 물결이 출렁이는 두만강으로 순찰을 나왔던 동해용왕의 사자가 두만강변 산기슭에서 울려오는 옥피리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용궁에 들어간 어느 날 차사는 여러 대신과 함께 용왕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남해용왕이 과인을 보러 온다고 기별이 왔으니 일찌감치 연회 준비도 충족히 해놓고 풍악도 굉장히 울릴 수 있도록 하라. 남해용왕은 무엇보다 풍악을 즐기니 차사는 정신을 번쩍 차리라. 그래야 이내 동해용왕이 으뜸으로 빛이 날 것이다.”

“예, 상감마마 명대로 조처하겠나이다.”

어느 날 남해용왕이 입궁한 뒤 성대한 연회가 베풀어졌는데 환영식과 더불어 악사들이 풍악을 울렸습니다. 풍악 소리 중에서도 피리 소리는 듣기 좋지 않았습니다.

“차사, 보물고에 더 좋은 피리가 없는가? 다른 피리를 가져다 불도록 하라.”

차사는 보물고마다 샅샅이 뒤져봤지만 그보다 더 좋은 피리는 없었습니다.

“상감마마께 아룁니다. 저 두만강 북쪽 산기슭에 사는 한 시골 아이한테 옥피리가 있는데 보아하니 여간 진귀한 보물이 아니옵니다. 그 소리 한 번 들으면 구곡 간장도 녹아버리는 세상 고운 소리인 줄로 생각하옵니다.”

“음, 짐은 들었노라. 용궁에 없는 옥피리라니 하늘이 나를 도와준 게다. 당장 그 옥피리를 가져오너라. 그 애가 주지 않으면 빼앗아 오너라.”

귀가 솔깃해진 용왕은 이렇게 명을 내렸습니다.

“예, 소인은 즉시 명을 좇겠나이다.”

보물 보자기를 가진 차사는 소년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듣자니 너는 적적한 몸이라지. 우리 용왕님께서 너를 아주 가엾게 여기시면서 용궁에 와 살아볼 의향이 없는가 하고 여쭈시더라. 입고 먹는 데는 아무런 근심 걱정 없겠다, 어디 그뿐인가? 세상 고운 미인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거늘 나와 같이 떠나지 않으련?”

차사가 입에 꿀 발린 소리를 해가면서 소년을 구슬렸지만 소년은 절대로 용궁에 가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이때 허리에 두른 보자기를 소년의 앞에 내려놓더니 그것을 풀어헤쳤습니다.

“자 보아라. 이 귀중한 보물을 몽땅 줄 테니 너의 그 옥피리를 나한테 주지 않겠느냐? 이 보물이라면 너 혼자 한평생 놀고먹으며 써도 된다. 너는 아직 어리고 이 보물을 잘 알지도 못할 것이다.”

보물 보자기에서는 보석 반지가 번쩍거렸고 진주 목걸이와 파란색 옥구슬이 빛을 발했습니다. 게다가 구리로 갈아 만든 거울과 수두룩한 은전, 동전은 소년을 유혹했습니다.

“와! 굉장한 보물이군요. 하지만 옥피리는 먼 옛적부터 대를 물려온 보배이자 또 우리 여러 친구들이 모두 즐기는 보물이에요. 제가 아무리 큰 부자가 된다고 해도 싫어요. 이 옥피리는 별을 따준다 해도 못 내놓겠어요. 참 미안해요.”

보물이라면 큰 부자가 됐다고 소년이 확하고 돌아설 줄 여겼는데 차사의 예견과 달리 소년은 보물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뭐 그래도 안 내놓겠다고? 너 어린놈이 담도 꽤 크구나. 이놈아, 용왕님의 명을 함부로 거역하고 언제까지 견디는가 보자. 흥! 참말로 고약한 놈이로구나.”

갑자기 거무락 푸르락 낯빛이 흐려진 차사는 옥피리를 보지도 못한 채 되돌아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진귀한 보물까지 지니고 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온 차사는 용왕 앞에 꿇어앉아 사실의 자초지종을 아뢰었습니다.

“너 이 놈, 뭐라고? 이 큰 동해를 쥐락펴락하는 내가 그까짓 시골 아이 손에서 옥피리 하나 못 가져온다? 얘들아, 그 놈을 찾아갈 만반의 준비를 할지어다.”

“상감마마, 분부를 즉시 좇겠나이다.”

급한 소식을 접한 까치가 급작스레 소년을 찾아와 바삐 문을 열고 말했습니다.

“용왕님이 많은 하졸들을 거느리고 옥피리를 빼앗으러 곧 들이닥친대요. 그 기세가 대단하니 시급히 이곳을 피하여 떠나세요.”

소년은 코앞에 닥친 위험한 소식을 접하자 어쩔 줄 몰랐습니다.

“자, 옥피리를 잘 간직하고 내 등에 살짝 업혀요. 빨리!”

이때 말처럼 키 큰 꽃사슴 한 마리가 소년 앞에 척 나타났습니다. 긴요한 순간이라 소년은 주저함이 없이 꽃사슴의 등에 올라앉았습니다. 소년을 태운 꽃사슴은 질풍 같이 깊숙한 산속으로 사라졌습니다.

“너 이 고약한 놈아, 게 당장 섰거라. 이게 뉘 앞이라고 함부로 도망질이냐! 헛된 생각을 작작하고 살고 싶으면 어서 그 옥피리를 순순히 바쳐라! 이놈아, 이 어른의 명을 똑똑히 들었느냐?”

어느새 뒤따라온 용왕은 사나운 기세로 소리쳤습니다.

“저 놈들한테 절대로 겁을 먹지 말고 저의 몸을 꼭 잡으세요. 저와 같이 가노라면 알 바가 있습니다.”

말을 마친 꽃사슴은 울창한 수림을 헤치며 용왕과 숨바꼭질하면서 달리더니 갑자기 어둑어둑한 골짜기로 사라졌습니다. 본래 꽃사슴은 여러 친구들과 함께 차사가 옥피리를 도둑질하러 왔다 갔다는 말을 듣고 십중팔구 용왕이 손수 올 것이라고 짐작하고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몸을 숨길 동굴을 봐두었던 것입니다.

이윽고 산속에서 맑은 옥피리 소리가 구성지게 들려왔습니다. 낮다가도 높아지고 빠르다가도 느려지는 구성진 옥피리 소리에 용왕과 하졸들은 두 귀가 벌쭉 일어섰습니다. 그야말로 세상에서 처음 들어보는 아름다운 소리였습니다.

“이 놈아, 빨리 나와 옥피리를 공손히 바쳐라! 우리 용왕님께서 너그럽게 대할 때 고분 고분 말을 듣지 않았다가는 천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차사가 산속에 대고 소리쳤지만 옥피리 소리는 그냥 울려왔습니다. 진작 속이 뒤집혀진 용왕은 온 산을 샅샅이 뒤졌지만 잔디밭에서 바늘 찾기요, 검불 속에서 수은 찾기라, 대노하여 광풍을 휘몰아다가 창살 같은 비를 마구 내리 퍼부으며 기승을 부렸습니다.

그렇게 되어 유유히 흐르던 두만강도 용왕이 산을 에돌며 맴돌이치던 그 모양으로 물곬을 옮겨 큰 원을 지으며 흐르게 되었고, 용왕이 사납게 맴돌이치던 그 산봉우리를 ‘회룡봉’이라고 불렀으며, 이 산기슭에 자리 잡은 마을도 차츰 그 산 이름을 본 따서 ‘회룡봉촌’이라고 부르게 되었답니다.

이 이야기는 일종의 지명 전설인데, 휘돌아 감도는 회룡봉의 형국을 잘 설명하고 있다. 두만강의 유유한 물결과 조화를 이루던 어느 한 소년의 옥피리 소리, 그 옥피리를 빼앗으려 몹시도 몸부림치던 동해용왕, 그런 동해용왕의 몸부림만큼 회룡봉은 격동의 근·현대사를 온몸으로 경험했다.

두만강 따라 조·중·러로 통한 독립운동의 요지

회룡봉은 천혜의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항일 독립운동의 요지가 되었다. 그 중에서도 박지영(朴枝榮) 등 항일 운동가들이 탈옥한 옥천동(玉泉洞) 파옥 사건(破獄事件)은 아직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그 사건을 기리듯 마을 앞을 지나가는 국방 도로에서 백 여 미터 산비탈에 ‘옥천동 파옥지(玉泉洞破獄址)’라는 글을 새긴 비석이 놓여 있다.

옥천동 파옥 사건은 1932년 2월에 일어났다. 1932년 3월 9일자 『조선 일보』에는 「유치된 중공당원 14명 총기 탈취 후 탈주」라는 제목 아래 ‘혼춘 흑정자 영사분서에서 경계 경관 3명 중상’이라는 부제를 단 기사가 있다. 전문은 다음과 같다.

“삼일 혼춘현의 흑정자 영사관 경찰 분서에 유치 중이었던 공산당 혐의자 14명이 폭동을 일으켜 간수 경관 3명에게 중상을 가한 후 다시 경관의 총기를 빼앗아 가지고 11명이 도망하던 중 1명은 경관의 총에 맞아 죽었다.”

1984년에 출간된 『혼춘현 문물지』에는 「옥천동 월옥지(玉泉洞越獄址)」라는 제목으로 보다 구체적인 내용이 담겨 있다. 전문은 다음과 같다.

“1932년 2월 옥천동 분주소에서는 박지영(朴枝榮) 등 12명의 항일 군중들을 체포하였다. 일본 침략자들은 안홍춘(安弘春)을 주범으로 여기고 수쇄를 채웠다. 기타 사람들은 그들에게서 풀어낸 저고리띠와 허리띠로 결박을 지워 감방에 가두었다. 그들은 모두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다. 10일 후 금당정기선(鄭基善)이 혐의가 풀려 석방되었다. 체포되어 15일 되는 날 밤 박지영과 김양업(金陽業) 두 사람은 탈옥할 결의를 다지면서 여러 사람과 탈옥할 방법을 상의하였다. 이튿날 아침 성이 허가라는 순사가 그들을 끌고 순경실로 들어와서 벽에 기대 세워놓고 순사들이 밥을 먹는 것을 보게 하였다. 다른 한 순사 고도유(高道有)는 바깥에서 세수를 하고 있었다. 박지영은 때를 놓칠세라 한 발로 난로를 차서 넘어뜨리고 방안에 연기가 찬 틈을 타서 밥그릇으로 허 순사의 대갈통을 내리치면서 벽에 걸어놓은 군도를 벗겨내어 사정없이 내리 찍었다. 박창헌(朴昌憲)은 문밖으로 달려나가 고도유와 치고 받으며 싸웠다. 고도유가 권총을 빼어 쏘았다. 박창헌은 불행하게 희생되었다. 박지영은 여러 사람들을 이끌고 뒷산으로 달아났다. 강재명(姜在明)은 가시철사망에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다시 체포되었다. 적들이 수많은 군경들을 모아 쫓아왔을 때는 그들이 이미 10여 리나 도망을 간 후였다. 그 번 탈옥에서 1명이 장렬히 희생되고 7명이 탈옥에 성공하고 1명이 체포되었다. 다른 두 사람은 족쇄를 채웠기에 탈옥에 참가할 수 없었다. 탈옥에 성공한 7명은 나중에 항일 빨치산에 참가하였다.”

이 기록은 당시 일제의 「흑정자 분서에 구류되었던 범인들의 도주에 관한 보고」와 당시 목격자들의 제보를 받아 정리한 것이다. 그런데 연변 언어 역사 연구소에 보존되어 있었던 「적위문서(敵僞文書)」의 기록은 위의 내용보다 더욱 구체적이다. 전문은 다음과 같다.

“2월 18일 이래 분서에 구류된 중공 당원 14명 중 12명이 3월 3일 아침 시간에 폭력 행위로 도주한 상황은 아래와 같다. 그날 구류소가 비좁아 7명을 간수들의 방으로 옮겨왔다. 그들은 난로 주위에 반원형으로 세워놓고 취사원을 시켜서 밥을 퍼주었다. 그날 근무 순사는 고도유(高道有), 합원중천(合原仲天), 이기삼랑(伊碕三郞), 허길룡(許吉龍) 등 넷이었다. 왼쪽으로부터 합원·이기·고·허씨가 의자에 앉아 감시했다. 합원 순사의 맞은쪽에 섰던 박지영이 취사원이 음식을 나누어줄 때 주먹으로 순사의 얼굴을 공격했다. 합원 순사가 당장에 땅에 쓰러졌다. 때를 같이하여 나머지 피구류자들이 각자 앞의 순사와 박투를 벌렸다. 구류소에 있던 7명 중 5명이 뛰어 나와 합류하였다. 순간 합원 순사가 허리춤에서 권총[7발의 총알이 장탄되어 있었다]을 뽑아들었다. 그러나 빼앗겼다. 허 순사가 자기의 권총[2발이 장탄되어 있었다]을 한방 쏘아 1명을 쓰러뜨렸다. 그도 권총을 빼앗겼다. 고 순사는 어깨에 칼을 맞았고 허 순사는 머리와 왼손에 상처를 입었다. 이기 순사도 머리를 상했다. 1분이 되나마나한 사이에 11명의 피구류자들이 모두 도망했다.”

도망가다가 잡힌 김재명의 진술에 의하면, 2월 29일 혼춘에서 체포되어 온 박지영, 김양업 두 사람이 3월 2일 저녁에 “우리는 이번에 사형을 면할 수가 없소. 내일 아침밥을 먹을 때 간수들 때려눕히고 탈옥합시다.”라고 선동했다고 한다.

회룡봉두만강을 동, 서, 남으로 싸고도는 반도형(半島形)이다. 회룡봉에서 두만강을 건너 서남으로 불과 몇 리를 사이에 두고 지금은 은덕군(恩德郡)이 된 예전의 경흥이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옥천동을 지나 이도포를 건너 불과 십리를 못 가 러시아 땅이다. 조선과 러시아를 양 옆구리에 끼고 앉은 회룡봉은 예로부터 삼국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던 곳이다. 또 일제의 침략 마수가 조선에 뻗치면서 의병 항쟁, 독립운동, 항일 전쟁 내내 조선 국내와 중국과 러시아로 오가는 주요한 항일 운동의 통로로, 민족 해방과 나라 독립에 대한 영향이 컸고 그만큼 일제의 감시와 탄압도 비일비재했다.

『회룡봉 촌사』를 살펴보면, 1908년에 두만강이 범람해 벌등 방천에 50~60㏊나 되는 섬이 생겼다. 1910년에 회룡봉 사람들은 이 땅을 개간해 팔아 그 돈으로 학교를 세웠다. 학생 수가 많아서 한 학년에 갑, 을로 두 반씩 나뉘기도 했다. 그때부터 회룡봉은 나라의 광복과 민족의 해방을 위한 인재 배양의 요람으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했다.

1919년 3월 20일 조선경흥 주둔 일본군 토벌대는 사전에 회룡봉을 돌연 습격했다. 그들은 김홍석, 김세길, 한규량, 박인권, 박현규, 강승세, 김용연 등을 체포해 금당 서당방에 가두어넣고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다. 이 사건을 중국 조선민족 항일 투쟁사에서는 ‘회룡봉 7인 참안’이라고 한다. 서울에서 일어난 3·1 운동의 영향을 받아 연변 각지에서 벌어진 ‘3·13 운동’ 이후에 벌어진 사건이다. 그때 사망한 사람들은 모두가 회룡봉 학교의 교원들이었고, ‘3·13 운동’ 참가자들임이 틀림없다.

일제의 입장에서 보면, 회룡봉은 판도라의 상자였다. 마치 호리병의 목처럼 잘록한 지형에 위치한 흑정자는 회룡봉을 통해 조선과 중국, 러시아로 통하는 좁은 통로이다. 이곳을 타고 앉으면 국내와 국외의 항일 세력들의 왕래를 단절하는 데 더없이 유리한 위치이다. 일제는 ‘3·13 반일 시위 운동’을 구실로 1919년에 혼춘 일본 영사분관 흑정자 분주소를 세웠다. 분주소가 서던 날 조선 일본군 나남 19사단 소속 경흥 헌병대 대대장은 군사를 몰고 와서 회룡봉의 15세 이상 남녀노소를 분주소 앞에 모아 놓고 공포의 일장 훈시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판도라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 상자를 열었고, 그 바람에 그 속에 갇혔던 인류의 죄고(罪苦)가 빠져 나오면서 인간 세상이 불행해졌다고 전한다. 일제에게 혼춘 일본 영사분관 흑정자 분주소는 항일의 불씨를 가두어둔 호리병의 병마개와 같았다. 그러나 종이로는 불을 쌀 수가 없었다. 만주에는 독립운동이 실패한 후 중국 공산당이 영도하는 동북 항일 연군의 투쟁이 활화산처럼 타올랐다.

일제는 1932년에 벌등에 두 개소의 세관 분소를 세웠고 회룡봉 본 마을에는 경찰 분주소를 설치했다. 판도라의 상자 속에는 희망이 그냥 남아 있었듯이 광복이 되던 그날까지 회룡봉 사람들의 마음속에서는 한시도 광복의 불길이 지워진 적이 없었다.

천계의 불을 훔친 죄로 프로메테우스(Prometheus)는 제우스에 의해 코카서스의 바위에 묶인 채 수천 년간 독수리에게 간장을 쪼이는 벌을 받는다. 민족의 해방과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로 항일 투사들과 그들의 가족과 자손들은 회룡봉에서 피비린내 나는 투쟁을 계속했다. 프로메테우스는 나중에 헤라클레스의 구원을 받는다. 세계 반파쇼투쟁[anti-fascism struggle]의 승리로 조선과 중국은 일제의 식민지 속박에서 자유를 얻는다.

회룡봉 출신의 장군 11명은 신화 속의 프로메테우스와 비겨도 손색이 없는 역사 속 위대한 투사들과 그들의 높은 뜻을 고스란히 이어 받은 자손들이었다.

10명의 인민군 장군과 1명의 한국군 장군을 배출

‘회룡봉 혁명 열사 기념비’는 이 마을의 지명 유래가 된 용두산 위에 세워져 있다. “산마다 진달래 마을마다 기념비”라는 하경지(賀敬之)의 시구가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연변의 마을마다에는 기념비가 즐비하다. 기념비의 모양들도 창끝 형국으로 비슷비슷하다. 회룡봉 기념비 역시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 한문과 나란히 세워서 새긴 비문에 남다른 것이 있다.

한문으로는 ‘革命烈士永垂不休’, 조선문으로는 ‘혁명렬사영수불휴’라고 되어 있다. ‘영수불휴’는 ‘영생불멸’이란 뜻이다. 이 기념비는 1957년 7월에 세워졌다. 기념비를 정면으로 마주하면 오른켠에 혁명 열사들의 이름이 적힌 비석 하나가 있다. 2007년 7월 1일에 세운 것으로 항일 투쟁, 해방 전쟁, 조선 전쟁 등 세 개의 역사적 단계로 나누어 각 시기에 사망한 사람들과 항일 투사들의 명단도 따로 추가해 적었다.

항일 투쟁 29명, 해방 전쟁 6명, 조선 전쟁 26명으로 회룡봉 열사는 무려 61명이다. 그리고 광복 이후까지 생존했던 항일 투사는 16명이다. 『회룡봉 촌사』의 기록에 따르면, 광복 후 소련으로부터 21명의 열사 명단과 한 사람당 40원 무휼금(撫恤金)과 공훈 메달이 전해진 바 있다. 그 후 마을 사람들이 타지로 이사를 가면서 열사 명부를 가지고 간 사람도 적지 않다고 한다. 이 비석에 새겨진 이름은 현재 혼춘시 민정국에 기재되어 있는 사람들로 회룡봉의 열사는 어림잡아도 100명이라고 추측된다. 열사비에 적힌 것은 고작 성과 이름이다. 그러나 그들 각각의 삶은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한 편의 소설이다. 개개인의 생을 하나로 엮는다면 회룡봉 열사 이야기는 대하 소설이 되고도 남을 것이다.

그리고 열사와 투사들의 약력을 살펴보면 그들의 신분 변화를 알 수 있다. 항일 열사들과 투사들은 모두가 중국 공산당이 이끄는 항일 연군 소속이지만, 광복 후 중국 인민해방군과 조선 인민군으로 소속이 바뀐다. 그리고 항일 투사 중 안길[본명은 안상길(安相吉)], 이봉수(李奉秀) 외에 박장춘(朴長春)[조선 인민군 중장] 장군이 있다.

회룡봉 출신의 10명 조선 인민군 장군들을 보면, 안길 대장의 장남 안영호(安永浩) 상장, 차남 안영환(安永換) 중장이 있고, 박장춘의 장남 박상규(朴相奎) 소장이 있다. 그 외 박남룡(朴楠龍)[박춘영의 아들] 소장, 김원삼(金元參)[김권영의 아들] 중장, 최영호(崔永浩)[최영삼의 사촌] 중장, 박명규(朴明奎)[박영규 동생] 소장 등 모두 항일 열사, 투사들과 혈연 관계를 가진 이들이다. 회룡봉 출신들이 조선 인민군에서 유난히 장군이 많은 것은 항일 열사 유가족에 대한 특별 우대와 직접 관련되어 있다. 특히 북한 김일성과 함께 항일 활동을 해온 안길, 이봉우, 박정춘과 같은 이들과 인맥이 뒷받침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한국에서 인맥 하나 없이 장군의 반열에 오른 사람이 있는데, 박남표 장군이다. 박남표의 장군별에는 6·25 전쟁에서의 공로가 분명히 기입되어 있다. 역설적이게도 6·25 전쟁은 박남표에게는 회룡봉 고향 사람들과 죽고 죽이는 싸움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나는 신상청(申尙鐵) 사단장이 지휘하는 7 사단 참모로서 포항 전투에 참전하였는데 그때의 격전은 이루 말할 수 없다. 1950년 8월 포항, 안강, 영천 전투에 투입된 인민군 4군단 정치 수석 참모 박남선 대좌는 나의 6촌 동생이었고, 그 휘하 인민군 5사단 보병 대대장 한강열 소좌는 나의 둘째 고모부였다는 사실, 그밖에도 6촌 동생 6명이나 그 전투에서 전사하였다는 것을 1988년 중국에 갔을 때 확인했다.”

박남표는 평생에 아홉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는데 그 중 세 번은 6·25 전쟁에서였다. 그처럼 사선을 넘나들면서 싸운 용사로 장군의 반열에까지 올랐다. 박남표의 부친 박지영이 옥천동에서 탈옥하던 그날 당번 중에 허길룡(許吉龍)이란 순사가 있었다. 허길룡의 권총 사격에 맞아 한 명이 희생되었다. 허 순사도 중상을 당했다. 허길룡의 공로를 기리어 일본 헌병대에서 동생 허정일(許正一)을 특별 배양했고, 허정일은 일본 관동군 헌병 보좌관이 되었다. 1944년에 허정일은 자기의 형에 대한 보복으로 박지영의 부친 박창일을 붙잡아서 고문, 치사했다.

광복이 되고 월남한 허정일은 한국군 특무대에 들어가 반공 투사로 맹활약 했다. 허정일은 갖은 모략으로 박남표를 제거하려고 했다. 만약 허정일이 자동차 사고로 일찍 죽지 않았다고 하면 박남표는 어떤 시련을 겪어야 했을지 모를 일이었다.

회룡봉 혁명 열사 기념비에는 열사들의 이름만 새겨져 있다. 하나같이 공산당의 혁명 활동과 관련된 사람들이다. 민족 계열 독립운동은 중국 공산당 항일 투쟁사에서 배제되었기 때문이다. 민족주의나 공산당 계열이나 모두 민족적 토양에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해방 이후 체제에 따라 평가가 달리된 측면이 있다.

참고문헌
  • 촌사 편집 위원회, 『회룡봉 촌사』(혼춘시 문화국, 2006)
  • 한정춘, 『두만강 류역 전설집』(연변인민출판사, 2010)
  • 신주백, 「항일 무장 투쟁사 인식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정치성(사실, 이렇게 본다 4)」(『내일을 여는 역사』18, 내일을 여는 역사, 2004)
  • 류연산, 「회룡봉촌 이야기」(『민족 21』104, 2009)
  • 특별 보도 11명의 장군을 배출한 회룡봉촌을 찾아서(중국 공산당 뉴스, 2007. 5. 18.)
이전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