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특별한 이야기

고향의 아리랑을 간직한 정암촌 사람들

한자 故鄕의 아리랑을 간직한 亭岩村 사람들
분야 지리/인문 지리|생활·민속/생활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도문시 양수진 정암촌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38년
연변조선족자치주 도문시 양수진 정암촌의 형성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도문시 양수진 정암촌은 1938년에 충청북도 청주군, 보은군, 옥천군 등지의 농가 80여 호가 집단으로 이주·정착하면서 생겨난 마을이다. 북한의 최북단이라고 할 수 있는 함경북도 온성군(穩城郡)에서 두만강을 건너 약 10여 ㎞에 위치하고 있다.

이주민 대부분은 가난이 숙명이었던 사람들이다. “만주에 가면 땅에는 쌀이 많고, 물에는 물고기가 시끌시끌하고, 산에는 짐승들이 시끌시끌하다. 조 이삭은 허리띠만큼 길고, 감자는 물동이만큼 크고, 콩알은 열 콩알만큼 크고, 옥수수 이삭은 팔뚝 다리만 하고, 호박은 쪽지게에 지도록 크고, 콩대는 지팡이를 만들어 짚고 다닐 정도다. 3년 간 자기가 농사지어 먹고 3년 후부터 공출하는데, 그 3년이면 회사 빚 갚고도 땅 사고 지주가 된다. 여기는 땅이 적으니 땅 많은 만주 가서 네 농사지어 네 먹어라.”라는 유혹은 놓을 수밖에 없었던 희망이었다.

충청북도 청주군, 옥천군, 보은군으로부터 청주역에 이르는 길은 울음이 진동하고 있었다. “1938년 음력 보름날 논둑에서 쥐불놀이를 하고 정월 23일에 출발했지.” 정암촌 2세대 민홍기[78세] 노인이 또박또박 충북을 떠나던 날짜를 말했다. 정암촌 사람들의 집체[집단] 이주 역사상 범상치 않은 하루, 첫 시작이었다. “청주역은 울음바다에 잠기었어요.” 정암촌 초기 이민 서강숙[71세] 노인이 또한 말했다. 청주역은 쪽지게, 도리깨, 남포등, 절구통, 함지 따위를 지고 이고 남부여대(男負女戴)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한복에 두루마기를 입었거나 흰 저고리에 검정 치마를 입고, 고무신을 신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짚신을 신었고 베옷이나 걸친 정도였다. (리혜선, 『두만강의 충청도 아리랑』, 도서 출판 좋은 날, 2001, 40~41쪽)

희망을 좇아 180호가 청주역에 집결하여 무작정 기차에 올랐다. 드디어 함경북도온성역에 닿았고, 그곳에서 두만강을 건넜다. 청주군, 보은군, 옥천군에서 이주한 80호는 왕청현 춘방촌 서백림툰에, 나머지 100호는 왕청현 하마탕향에 정착했다. 왕청현 춘방촌 서백림툰은 1947년부터 훈춘현 량수향에 소속되었다. 1949년 충주군 출신의 서홍범씨가 마을 서북쪽에 있는 정자 바위의 이름을 따서 마을의 명칭을 ‘정암촌(亭岩村)’으로 정했다. 해방 이후에 서백림툰 및 하마탕향에 정착했던 과반수의 이주민들이 귀국했다. 귀국의 기회를 놓친 서백림툰 이주 1세대 20여 명을 포함한 2∼3세대 및 정암촌으로 재이주한 하마탕향 이주민 일부가 오늘날까지 정암촌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다.

정암촌 사람들의 이주 배경이나 정착 초기의 상황을 여전히 이주 2세대들의 증언을 통해 생생히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을 토대로 이주 1, 2세대의 면면을 일종의 구술사적 측면에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이주 1세대 : 1900년대 출생-이주 당시 30대 중·후반

유재기[남, 미상]는 청원군 북이면 가래울에서 이주했다. 당시 30대 후반이었고, 정암촌에서 처음으로 서당을 열었다. 이주 전 고향에서 자식을 낳으면 딸은 연명했지만 아들들은 모두 죽었다. 무당이 ‘자리를 바꾸고 물을 바꾸면 아들들을 살릴 수 있다’고 해서 정암촌으로 이주했다.

이상철[남, 미상] 청주군 북이면 화산리에서 이주했다. 당시 30대 중반이었고, 부인과 두 아들이 있었다. 이주 전 양반가에서 귀동자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글을 배웠다. 이주 후에 얼마 안 되어 부인이 병을 앓았다. 복술이와 무당들을 불러와 한 달간 굿을 했지만 차도가 없었다. 아내를 살리지 못한 충격에 이상철이 직접 경을 외워 병을 고치는 복술이가 되어 문화 대혁명 전까지 정암촌에서 굿을 했다. 또 풍물패의 선소리꾼으로 활동하였다.

2. 이주 2세대 : 1920년대 출생-이주 당시 10대 초·중반

신철[남, 1923년 출생]은 보은군 보은면 삼강리에서 이주했다. 신철의 원래 이름은 부뜰이었고, 동생 신영구의 원래이름은 또부뜰이었다. 자식들이 태어나는 족족 죽자 ‘저승사자가 붙들어가고 또 붙어들간다’는 데서 붙인 이름이었다. 모진 가난에 자식들이 계속 죽어나가자 정암촌으로 이주했다. 해방 후에 신철의 아버지가 도문에 가서 일본인이 버리고 간 이부자리며 담요며 옷을 사가지고 돌아왔다. 난생 처음 그토록 좋은 이부자리에서 잠을 잔 아버지는 다음 날 뜬금없이 배를 움켜쥐고 죽었다. 이부자리에 전염병 호열자균이 들었던 것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신철의 집에 새끼줄을 둘러치고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했다. 한 달이 지나도 죽지 않자 그제야 새끼줄을 풀어주었다. 이후 신철은 강씨 성을 가진 집에 데릴사위로 들어갔다. 사는 것이 슬퍼 혼자 노래를 불러 목청이 트였다.

민홍기[남, 1924년 출생]는 청원군 내수리에서 이주했다. 당시 청주의 4년제 중학교를 만 2년간 수학했다. 이주 초기에 정암촌에서 ‘일류 지식인’이라고 칭해졌다. 민홍기의 외삼촌이 홍산이라는 일본 사람에게 빚보증을 섰는데, 대부금을 갚지 못해 집이며 땅이며 전부를 몰수당했다. 이재성이라는 사람의 집에서 곁방살이를 하다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여동생과 함께 정암촌으로 이주했다.

이용안[남, 1927년 출생]은 청원군 강외면 동평리에서 이주했다. 부모는 지주의 땅을 소작하면서 그 옆 진펄에 3년간 쪽지게로 흙을 날라다 메워 두 짐 되는 논을 풀었다. 지주는 자기 땅 옆에 논을 풀었다며 소작료를 바치라고 했다. 아버지가 지주와 담판하러 갔다가 크게 싸우고, 이 일로 피신해 있다가 이민 소문을 접한 후 곧장 이민 청구서에 도장을 찍고 정암촌으로 이주했다. 사춘기였던 18살에 가출해 무작정 포병 학교에 입학하였고, 팔로군이 되었다. 동안 북길림, 사평, 료양, 안산, 무순 등지를 행군하며 사선을 넘던 중 한국 전쟁에 중공군으로 투입되었다. 당시 24살이었다. 휴전 후 1958년에 다시 정암촌으로 돌아왔다. 중국 정부로부터 무공 훈장을 받았으나, 고향 땅에 총부리를 겨눈 대가의 포상이었기에 평생 동안 버거운 짐이 될 수밖에 없었다.

최경백[남, 1928년 출생]은 보은군 보은면에서 이주했다. 정월 대보름날 망월놀이를 하기 전에 누이가 얼음판에 나가 불을 피우며 놀다가 명주바지에 불이 붙어 타 죽었다. 딸아이의 죽음에 한이 맺힌 어머니가 만주로 떠나자고 제안해서 정암촌으로 이주했다.

3. 이주 2세대 : 1930년대 출생-이주 당시 유아 및 아동

나기천[남, 1931년 출생]은 청원군 북일면에서 이주했다. 나씨 집안에서 비교적 부유하게 살았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들어와 집이며 창고에 불을 질렀다. 12살에 아버지를 따라 정암촌으로 이주했다. 이주한 지 며칠이 지나 만척 주식 회사에서 장정들을 동원해 온성으로 소를 끌러 갔다. 나기천의 아버지도 대열에 동참했다. 그러나 워낙 건강했지만 한복만 입은 채 추위에 떨어 20여 일 앓다가 죽었다.

박찬용[남, 1931년 출생]은 옥천군 안남면 연주리에서 이주했다. 할아버지가 셋째 아들 박희철을 일본으로 유학 보내느라 서당골 지주에게 큰 빚을 졌다. 아버지 박시만이 대신 갚고자 양창질[알곡만 남기고 쭉정이를 바람에 날아가도록 까부는 일]까지 했으나 갚을 길이 없었다. 만주에 가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정암촌으로 이주했다.

서강숙[여, 1931년 출생]은 충주군 엄정면 농강리에서 이주했다. 이주 전에 일본인들 사이에서 이질이 번졌다. 일본인들은 이질을 고칠 수 있다고 여겨 비단개구리를 구했다. 할아버지가 비단개구리를 잡아 돈 벌자고 했다. 그러나 아버지 서홍범은 ‘나라 잃은 것도 분통한데 일본놈들에게 왜 약을 구해주냐?’며 반대했다. 할아버지는 내 아들이 똑똑하다고 널리 자랑했다. 그 말이 일본 순사의 귀에 들어가 아버지가 흠씬 두들겨 맞았다. 그 후 아버지는 애국 청년 17명과 함께 한 집에서 태극기를 만들었다. 그런데 그 집 아이가 철부지여서 태극기를 들고 나가 ‘우리 집에 태극기가 이만큼 있다’며 자랑했다. 또 일본 순사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감시 대상이 되었다. 이에 자유 많은 만주에 가서 살자고 해서 정암촌으로 이주했다.

한옥임[여, 1932년 출생]은 옥천군 안남면 오대리에서 이주했다. 당시 공출 색시로 꼽혀 눈물만 흘리고 있던 차에 아버지가 상가집에서 우연히 서백림으로 이주한 고모부 신봉림을 만났다. 아버지는 신봉림에게 딸아이를 부탁했다. 그렇게 느닷없이 정암촌으로 이주하여 박찬용과 1946년 3월에 결혼했다.

신명옥[여, 1938년 출생]은 옥천군 동이면에서 이주했다. 삼촌이 머슴살이를 하다가 이민 모집을 보고 이주했다. 해방 후에 신명옥의 부모가 죽자 혈혈단신으로 삼촌을 수소문해 정암촌으로 이주했다. 이용안과 결혼해 4남매를 두었다.

이국땅에서 고향의 풍습을 지킨 정암촌 사람들

정암촌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원주지의 문화적 정체성이나 동질성을 삶의 근간에서 유지하고 있다. 이국의 낯선 풍토 속에서도 한족 및 함경도 문화에 동화되지 않았기 때문인데, 그러한 사회·문화적 배경을 다음과 같이 분류하여 설명할 수 있다.

1. 생활 습속의 집단 이주

정암촌 사람들의 이주와 정착은 원주지의 생활 습속을 동반한 집단 이주와 집단 정착이었다. 광복 이후 정암촌에 한족이나 함경도 사람들이 입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암촌은 언제나 충북인 마을로 알려졌고, 또 그렇게 인식되었다. 정암촌 1세대들은 정암촌에서 삶이 일시적인 정착이겠거니, 생각했다. 언젠가는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기에 관혼상제의 예법을 고수했고, 절기에 따른 세시 풍속을 고수했다. 문화 대혁명 이전까지 마을 사람들 모두가 산신이나 서낭을 기렸고, 발병할 때마다 무당을 불러 액막이나 푸닥거리를 했다. 또 대보름마다 풍물패가 지신을 밟았다.

이렇게 정암촌 사람들이 이국의 낯선 풍토 속에서도 한족이나 함경도 문화에 동화되지 않았던 것은, 한편 원주지와 이주지의 문화적 차이를 절감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중국 동북 지역이라는 특정한 공간은 정암촌 사람들에게 조선인이라는 정체성을 깨닫게 하는 공간이었다. 그래서 민족내혼(民族內婚)을 철저히 지켰다. 중국 동북 지역으로 집단 이주가 집안 전체의 집단 이주가 아니라 부분적인 구성원의 이주였기 때문에 원주지와 같은 집성촌을 형성하지는 못했지만, 부계 혈통을 넘어선 범주의 인척 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다. 낯선 땅의 소수 민족으로서 정치·경제적 자원 확보에 불리한 조건에서 생존을 위한 전략으로 혈통간 결속을 강화했다고 볼 수 있다.

2. 농경 중심의 생업 활동

모든 농경이 그렇지만, 논농사는 반드시 계절의 순화에 따른 기일에 맞춰 일을 진행해야 한다. 계절의 순환에 따라 곡물이 성장하고 결실을 맺기 때문이다. 계절의 순환에 따른 논농사의 진행을 ‘농경 세시’라고 하는데, 1년을 24절기로 나누고 그 절기에 맞춰 관습적으로 행한 농업 활동으로부터 형성·발전했다. 오늘날에도 농업 활동의 순차, 즉 개시-제초-수확-저장 등은 농경 세시를 기준으로 결정된다. 모판 만들기나 논갈이는 3~4월에, 모심기는 4~5월에, 논매기 등 제초는 5~6월에, 수확과 저장은 9~10월에 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렇게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노동의 과정과 그 중간에 해당하는 휴식 과정에서 다양한 세시 풍속이 조성되었다.

정암촌 사람들은 이주와 동시에 새로이 집을 지어야 했다. 그렇기에 공동 노동과 작업이 필수적이었다. 마을을 건설한 이후에는 화전을 일구어 밭농사를 하면서 산나물 채취를 생업으로 삼았다. 뒤에는 논을 개간하여 벼 농사를 영위했다. 정암촌 사람들은 고향에서 농사짓던 방식 그대로 황무지를 개간하여 수전을 만들었다. 농경 세시는 물론이거니와 각종 농기구와 일상 생활용품까지 고향의 전통을 계승했다.

농경이 유일한 생활 수단이었기 때문에 농악대를 구성하여 두레 농사를 지었다. 이러한 기반 위에서 다양한 형태의 노동요(勞動謠)가 전승될 수 있었다. 또 봄철에 ‘풍년 기원제’라든지, 여름철에 ‘호미씻이’ 같은 세시 풍속이 문화 대혁명 이전까지 전승될 수 있었다.

3. 폐쇄적 호적 관리 제도

중화인민공화국을 창립하면서 실시한 폐쇄적 호적 관리 제도로 정암촌 사람들은 중등 전문 학교 및 종합 대학에 입학하거나 또는 국가 간부가 되지 않는 한 임의대로 도시 호적에 등재될 수 없었다. 또 도시 여성이 정암촌 남성과 결혼하면 도시 여성은 남성의 정암촌 호적에 등재될 수 있었지만, 정암촌 남성은 여성의 도시 호적에 등재될 수 없었다. 행정구역을 넘어 이주를 할 때에도 호적 심사를 거쳐야 했는데, 수속 절차가 워낙 까다로워 몇몇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이주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정암촌 사람들의 도시 유입이 철저히 차단되었다. 1946년부터 1948년까지 실시한 토지 개혁으로 비로소 본인 명의의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고, 1949년에 실시한 폐쇄적 호적 관리 제도로 본인 명의의 토지를 중심으로 정암촌의 집거 형태를 공고히 유지하게 되었다. 한족이나 함경도 사람들의 정암촌으로 이주가 정암촌 사람들의 한민족으로서 결집과 정체성에 의한 마을 단위의 차단이었다면, 정암촌 사람들의 도시로 이주는 중국 정부의 폐쇄적 호적 관리 제도에 의한 국가 단위의 차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4. 중국 정부의 소수 민족 정책

중국 공산당은 창립 당시부터 소수 민족에 대한 포용 정책을 펼쳤다. 포용 정책은 민족 평등의 견지, 민족 단결의 강화, 민족 구역 자치의 실현, 소수 민족 간부의 양성, 소수 민족 경제 발전과 문화 건설의 지원, 소수 민족 언어와 문자의 중시, 소수 민족 풍속과 관습의 존중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 중 언어와 문자의 중시, 풍속과 관습의 존중은 소수 민족 포용 정책 중 가장 핵심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언어와 문자, 풍속과 관습은 소수 민족의 역사 전통, 경제 문화, 문화 예술, 심리 감정, 민속 종교 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효과로 아직까지 몇몇 사례에 불과하지만, 중국 내 소수 민족 단위별로 고유의 전통 문화가 문화 관광 자원으로 승화되고 있다.

특히 중국 조선족은 소수 민족 포용 정책의 일환인 민족 구역 자치의 실현에 의해 자치주, 자치현, 자치향 등을 건설하고 민족 자치를 구현해 나갔다. 정암촌의 경우에는 2003년에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길림성 재정 지원 시범촌’으로 지정되었다. 또한 한국의 민속촌과 다른 개념이지만 ‘길림성 재정 지원 민속촌’으로 지정되었다. 질펀하던 마을길이 포장되었으며, 107세대의 초가가 문화 주택으로 개량되었다. 조선족 이외 다른 소수 민족의 이주도 법적으로 금지되었다. 한민족의 전통 문화를 계승하고 있는 정암촌을 정책적으로 보존·계승하겠다는 주 정부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그토록 질긴 생명력을 잇고 있는 ‘청주 아리랑’

정암촌 사람들에게 고국의 고향은 동경의 대상이었으며, 고향의 노래는 위안이었다. 그래서 서로를 위로하며 고향의 기억을 더듬어 「청주 아리랑」을 불렀다. 「청주 아리랑」을 통해 고향의 정경을 마음속에 담았으며, 또 살아생전에 반드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소망을 노래 속에 담았다.

정암촌의 「청주 아리랑」은 1978년에 김봉관을 위시한 중국의 민요 연구가들이 신철로부터 처음 채록했다. 당시 채록한 사설과 악보가 『조선족 민요곡집』에 수록되어 있다. 김봉관은 「청주 아리랑」의 채록 상황을 『중국 조선족의 문화와 청주 아리랑』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 중국 조선족 민요의 채록 과정

1950년대에 중국 조선족의 집거구인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주장 주덕해는 전통 예능인들의 별세와 더불어 고귀한 민족 유산이 소실되는 상황을 무척 안타까워하면서, “불끄러 가는 소방차의 속도로 민요, 민담의 수집 사업을 다그치라”고 지시했다. 주덕해의 지시에 따라 1952년부터 조선족 민간 예술을 발굴하여 수집·정리하는 사업이 시작되었다. 이후 1962년에 임시 수집 기구가 편성되면서 한 단계 대폭적인 수집 사업을 단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화 대혁명이 일어나면서 이 사업은 큰 난관에 봉착했다. 이 사업에 참가하였던 음악가 및 작가들 그리고 전통 예능인들이 ‘잡귀신’으로 몰려 감금되거나 투쟁을 맞는 등 참혹한 박해를 받았고, 허다한 자료들이 소각되거나 분실되었다.

문화 혁명이 끝난 후, 다시 일체의 가능한 역량을 동원하여 민족의 유산을 시급히 발굴해야만 했다. 1978년 10월에 체계적인 수집 및 정리를 위하여 임시로 집성 판공실을 편성하여 정길운[문학 담당], 리황훈[음악 담당], 김태감[문학 담당], 김봉관[음악 담당], 리동구[촬영 담당], 림성진[음악 담당]으로 결성된 수집조가 당시 길림성 훈춘현 소속이었던 량수진 정암촌으로부터 조선족의 민요를 수집·정리하였다.

…… (중략) ……

우리의 문화유산 발굴 사업은 1952년부터 1986년까지 진행되었다. 그동안 60개 현·시의 200여 마을을 조사하며 5,000여 차례 민간 연예인들을 방문하였고, 4,000여 수의 민요 및 판소리를 채록하였으며, 1,000여 수의 민요와 판소리를 정리하였다.

◉ 중국정암촌 민요의 채록 과정

1978년 10월 12일, 우리는 훈춘에서 버스를 타고 50여 ㎞를 달려 훈춘현 량수진 정암촌에 도착했다. 아름다운 정암봉이 앞에 우뚝 서 있고, 정암촌을 오붓하게 지켜주듯 그 옆으로 낮은 산들이 병풍처럼 삥 둘러 있었다. 정암촌 사람들은 우리가 타고 온 ‘버스’를 처음 접하는 지라, 할아버지, 할머니, 장년, 아낙네, 빨가벗은 아이들 등 온 마을 사람들이 버스를 에워싸고 호기심 어린 눈길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 (중략) ……

우리는 민족의 얼을 되살려야 한다는 내용을 30분 동안 역설했다. 그리고 우리는 술을 권하며 정암촌 노인들에게 소리 또는 타령을 부탁했다. 그러자 어수선하던 분위기가 삽시간 조용해졌다.

“이게 도대체 어찌된 영문인가? 문화 혁명 때에 ‘잡귀신이요, 썩어빠진 타령이요, 봉건주의요’ 하며 불러서는 안 된다던 노래를 부르게 하다니 …… 반우파 투쟁 때에는 ‘솔직히 말하라, 당에 대한 의견을 말하라’ 하면서 두들겨 패더니, 이제는 부르라, 마음대로 타령을 부르라, 그렇게 해놓고는 또 두들려 패려는 모양인가?” 이렇게 우리의 첫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 「청주 아리랑」 채록 과정

몇 차례 동석하다 보니, 그나마 몇몇 노인과 친분이 쌓여 오가는 말이 많아졌으며, 서로가 술도 한 잔씩 건네게 되었다. 이때 술기운이 올라 얼굴이 벌개진 리상철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래 이제부터는 소리를 해도 괜찮단 말이요? 아무 노래건?” 하며 조심스레 물어왔다. 리상철의 물음에 리황훈은 일어나 큰 소리로, “그래 우리가 우리 노래를 부르는데 누가 상관한단 말입니까? 하며 「청춘가」를 구성지게 불렀다. 리황훈의 노래가 거의 끝날 무렵, 리상철은 술 두 잔을 연거푸 안주도 없이 들이키더니 씩씩하면서도 구성진 목소리로 리황훈의 노래를 받아 불렀다.

…… (중략) ……

정암촌에 들어온 지 사흘, 문뜩 중년의 사나이가 “나도 좀 한 곡 부릅시다” 하며 청하는 것이었다. 57세의 건장한 신철이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신철에게로 쏠렸다. 수려한 외모에 쩡쩡한 목소리, 물 흐르듯 터지는 그의 노래는 우리의 넋을 순식간에 앗아갔다.

시어머니 죽으면 좋다더니 / 왕골자리 떨어지니 또 생각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게

신철의 노래가 끝나자 온 방안이 떠나갈 듯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로 가득 찼다. 그도 그럴 것이 문화 혁명 이래 신철의 구성진 노랫가락을 들을 수 없었던 터였다. 우리는 다급히 그 노래의 제목을 물어 보았다. 「청주 아리랑」이었다. 전국 각처를 돌아다녔지만 「청주 아리랑」이라는 노래는 처음이었다. 우리는 기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렇게 「청주 아리랑」은 1978년 12월 14일 세상에 다시 나타났다.

중국 민요 연구가 김봉관은 “우리 민족의 얼이 숨 배인, 충북의 얼이 숨 배인 「청주 아리랑」을 채록하여 청주 인민들에게 다시 돌려주게 되어 참으로 감개무량하다. 「청주 아리랑」은 민족의 얼인 동시에 청주 인민들의 살아 숨 쉬는 영혼의 일부분이라고 말하고 싶다.”며 「청주 아리랑」에 대한 감회를 토로했다.

전렴 :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게

전렴 // 울너머 담너머 님 숨겨두고 / 난들난들 호박잎이 날 속였네

전렴 // 팔라당 팔라당 갑사나댕기 / 곤때도 안묻어서 사주가왔네

전렴 // 사주는 받아서 무릎에 놓고 / 한숨만 쉬어도 동남풍된다

전렴 // 시아버지 골난데는 술 받아오고 / 시어머니 골난데는 이 잡아주자

전렴 // 시동생 골난데는 엿 사다주고 / 시누이 골난데는 사탕 사주지

전렴 // 며늘애기 골난데는 업어나주고 / 막내동서 골난데는 홍두깨 찜질

전렴 // 시아버지 죽어서 조탰더니 / 왕골자리 떨어지니 또 생각난다

전렴 // 시어머니 죽어서 조탰더니 / 보리방아 물저노니 또 생각난다

전렴 // 시동생 살림나서 조탰더니 / 나무가리 쳐다보니 또 생각난다

전렴 // 시누이 시집보내 조탰더니 / 빨래줄 떨어지니 또 생각난다

전렴 // 아리랑 타령이 얼마나 좋은지 / 밥푸다 말고서 엉덩춤춘다

위의 「청주 아리랑」은 1978년에 김봉관을 위시한 중국의 민요 연구가들이 신철로부터 채록한 자료를 바탕으로, 2001년도에 충북 대학교 학술 연구팀이 정암촌 이주 1세대 리용안[남, 1929년 충청북도 청원군 동평리 출생]으로부터 채록한 것이다.

사설에서는, 수줍은 처녀의 여리고 앳된 모습으로부터 결혼 후 현실에 적극 순응하며 고난의 삶을 이겨나가는 모습에 이르기까지 한국 여성이 겪는 생활상의 애환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무엇이 빌미가 되었는지 모르지만 시부모의 골이 잔뜩 나 있다. ‘갈등’이 촉발된 것이다. 그러나 갈등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며느리는 능청스럽게 시아버지에게 술을 받아주고, 시어머니의 이를 잡아준다. ‘화해’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다. 그런데 언제인가 시부모가 스러졌나 보다. 며느리는 문득 그 자리에서 부대꼈던 그들이 몹시 그립다. 이미 가족으로 ‘동화’되었기 때문이다. 노래 속의 화자는 시집살이에서 오는 설움의 덩이를 잘 이겨내고 있다. 그러나 가슴 한 켠은 늘 공허하다. 오늘을 살면서 느닷없이 ‘어제’가 그리워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했던 사람들의 부재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미련이 앞선다.

「청주 아리랑」의 정서는 정암촌 사람들을 대변하는 절망과 미련의 정서이기도 하다. 「청주 아리랑」의 화자가 그리워하는 ‘어제’와 정암촌 사람들이 그리워하는 ‘어제’는 결국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청주 아리랑」의 화자가 그리워하는 ‘어제’는 시집 식구들이고, 정암촌 사람들이 그리워하는 ‘어제’는 고향이다. 시집 식구들을 등진 이후에야 시집 식구들이 그리워지는 것이나, 고향을 등진 이후에야 고향이 그리워지는 것은 모두 ‘어제’를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정암촌 사람들이 품고 있는 절망과 미련의 정서는 「청주 아리랑」의 화자가 품고 있는 절망과 미련의 정서와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고향 떠난 어느 민족이 그렇지 않겠는가만, 일제 강점기에 식민 정책의 희생양으로서 자신들의 처지를 감내해야 했던 정암촌 사람들의 ‘망향 의식’은 더욱 컸다. 그리고 그것은 ‘한’으로 응어리져 버렸다. 정암촌 1세대들도 정암촌에서의 삶이 일시적인 정착이겠거니 위안하면서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바람을 간직하며 살았다. 그러나 바람은 헛된 바람이 되어 ‘한’을 품은 채 하나 둘씩 세상을 등져갔다. 그럴수록 견주어 후예들에게는 ‘귀소 의식’이 형성되었다. 갈 수 없는 부모 나라의 갈 수 없는 고향이지만 자꾸 그 곳으로 치닫는 그리움, 원형처럼 대물림되어 버린 절망과 미련 사이에서 발발한 그리움에서 후예들의 ‘귀소 의식’이 비롯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청주 아리랑」의 대물림으로 이어졌다.

한민족이 머무는 곳에는 반드시 ‘아리랑’이 함께 머물고 있다지만, 중국정암촌의 「청주 아리랑」만큼 망향의 설움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잘 배어 있는 노래는 흔하지 않다. 중국정암촌에서는 명절에 성묘를 해야 할 때나, 가을 나절에 수확을 할 때나, 차디찬 겨울에 웅크리고 있을 때나, 혹여 자식들이 잘 못 되었을 때, 고향을 그리며 「청주 아리랑」을 70여 년 동안 불렀다. 그리고 고향의 노래 「청주 아리랑」이 이주 2~3세대로 대물림되어, 비록 전승력은 약화되었을지언정, 아직도 그 질긴 생명력을 발휘하고 있다.

정암촌의 발견, 정암회의 결성, 정암촌의 발전

연변 지역에서 정암촌을 발견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일제 강점기 집단 이주·정착에 기인한 전통 민요의 전승에 대한 집약적인 조사 필요성의 천착으로부터 비롯되었다. 1993년에 처음으로 정암촌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던 경위를 충북 대학교임동철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당시 필자는 한국 학술 진흥 재단의 연구 용역으로 충북 지역의 민요를 채록하여 정리하는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우리 민요가 급속하게 단절되고 있음을 확인했다. 도시화 및 기계화, 소리꾼들의 사망 등이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필자는 충북 지역에서 집단으로 이주한 조선족 마을이 혹여 존재한다면, 보다 풍부한 충북 지역의 민요를 채록하여 정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마침 연변대학에서 개최하는 국제 학술 회의에 참석하게 되었다. 이때 연변대학 관계자들로부터 ‘조선 문학부 학생들의 언어 실습장’으로서 충북 사람들의 집거지인 정암촌의 존재를 처음 확인했다.”(임동철 외, 「연변조선족자치주 정암촌, 청주 아리랑, 문화 관광 콘텐츠 개발」, 『한민족 공동체』 제16집, 해외 한민족 연구소, 2008,135쪽).

정암촌, 정암촌 사람들, 정암촌 사람들의 「청주 아리랑」이 알려지면서, 충청북도를 중심으로 정암촌 사람들의 국적을 회복시켜야 한다는 사회적 여론이 확산됐다. 충청북도는 실질적인 차원에서 2000년 10월에 정암촌 1세대 서른 두 명의 고향 방문을 성사시켰다. 그리고 2001년부터 정암촌 2~3세대들 중에서 3~4명씩 선발하여 충북 권역 각 군청의 초청으로 농장 및 식품 가공 업체 등에서 선진 영농 기술을 익히게 했다.

민간 차원에서는 정암촌정암촌 사람들의 후원을 목적으로 ‘정암회[회장;임동철충북대 교수]’가 결성되었다. 충청북도의 관계, 학계, 언론계, 경제계 등 인사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2001년부터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고 회비를 마련하여, 1년에 한 차례씩 정암촌 노인회 및 정암촌 출신의 초·중등학생 10여 명에게 발전 기금 및 장학금을 전달하고 있다.

정암회의 후원은 뜻밖에도 연변조선족자치주 주 정부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연변조선족자치주는 관련한 연구 성과물을 토대로 정암촌의 내력을 조사하고, 2003년에 정암촌을 ‘길림성 재정 지원 시범촌’ 및 ‘민속촌’으로 지정했다. 이를 계기로 정암촌의 면모가 달라졌다. 질펀하던 마을길이 포장되었으며, 107세대의 초가가 문화 주택으로 개량되었다. 조선족 이외 다른 소수 민족의 이주도 법적으로 금지되었다. 연변조선족자치주정암촌[한민족 전통 문화]을 매개로 중국과 한국이 공조할 때, 문화적·경제적으로 어떤 파급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근간에는 충북 대학교의 해외 자원 봉사대 활동이 정암촌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충북 대학교는 아시아 저개발 국가들과 문화 교류 차원에서 2006년부터 해외 자원 봉사대를 운영하고 있다. 필리핀의 한 마을에 이어 해외 자원 봉사대 20여 명을 선발하여 여름 방학을 이용하여 15일간 정암촌에서 봉사 활동을 벌이고 있다. 약초밭과 옥수수밭 잡초 제거, 마을 대청소, 하수도 정비 등 마을 환경 개선은 물론 양수진 소학교와 중학교 학생들에게 컴퓨터, 수학, 영어, 태권도, 레크레이션 등을 지도한다. 해외 자원 봉사 원년에는 노인 독보조(讀報組)를 위해 게이트볼 구장을 건설하기도 했다.

정암회의 결성과 후원, 충청북도의 관심과 지원 등이 잇따르면서 자연스럽게 연변대학와 충북 대학교의 공조가 이루어졌다. 두 대학은 대학, 대학원 복수 학위 과정을 교류하는 한편 정암촌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약속했다. 민간 차원에서 이루어진 정암회와 정암촌의 공조가 관계 주도의 공조로 확대·변모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정암촌에 대한 지역학 연구자들의 연구와 민간 차원의 후원 등이 연변조선족자치주의 관심을 확보하여 정암촌의 발전이라는 실질적인 결실을 이끌어냈다.

참고문헌
  • 『조선족 민요 곡집』(연변 문학 예술 연구소, 1982)
  • 리혜선, 『두만강의 충청도 아리랑』(도서 출판 좋은날, 2001)
  • 임동철 편저, 『중국 조선족 문화와 청주 아리랑』(집문당, 2004)
  • 임동철, 「만주 지방의 충청북도 민요 연구」(『인문학지』제15집, 충북 대학교 인문학 연구소, 1997)
  • 이창식, 「아리랑의 정체성과 현장성」(『민요론집』제6집, 민요학회, 2001)
  • 임동철, 「중국 연변의 ‘청주 아리랑’」(『민요론집』제7집, 민요학회, 2003)
  • 김연준, 「정암촌에 흩날리는 꽃잎」(『삼족오의 비상』, 일광 출판, 2006)
  • 이창식, 「청주 아리랑 보존과 문제점」(『아리랑 종합 전승 실태 조사 보고서』(문화재청, 2006)
  • 안상경, 「‘청주 아리랑’의 전승과 스토리텔링 가능성」(『어문 연구』제51집, 어문 연구 학회, 2006)
  • 임동철 외, 「연변조선족자치주 정암촌, 청주 아리랑, 문화 관광 콘텐츠 개발」( 『한민족 공동체』제16집, 해외 한민족 연구소, 2008)
  • 안상경, 「청주 아리랑의 다큐멘터리 제작 사례를 통한 아카이브 구축의 방향성 연구」(『지방사와 지방 문화』제11집, 역사 문화 학회, 2008)
  • 안상경, 「청주 아리랑의 역사성과 문화 콘텐츠 활용 연구」(『인문 콘텐츠』제 11집, 인문 콘텐츠 학회,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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