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 한인의 의식주 생활 문화를 전시하고 있는 조선족 민속 박물관

분야 생활·민속/민속|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민성가 432호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박물관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용정시 민성가432호
이주 한인 의식주 생활 문화의 중심지, 용정시

한인(韓人)이라면 누구나 한 소절씩 부를 수 있는, “일송정 푸른솔은 늙어늙어 갔어도 /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두고 흐른다 / 지난날 강가에서 말달리던 선구자 / 지금은 어느곳에 거친꿈이 깊었나.”라는 노래가 있다. 용정(龍井)의 자연 경관과 이주 한인의 애환을 담고 있는 가곡 「선구자」이다. 간도(間島)의 변천사가 비장한 선율로 녹아 흐르는 사설, 이 노래의 무대가 바로 용정이다. 그래서 노래의 명칭도 원래 「용정의 노래」였다고 한다. 연변조선족자치주(延邊朝鮮族自治州)의 수부인 연길시(延吉市)에서 완만한 산세를 따라 버스로 약 20여 분 달리면 ‘세전벌’이 펼쳐진다. ‘연변 지역의 3대밭’으로 지칭되는 그 벌을 가로 질러 해란강(海蘭江)이 흐르고 있고, 그 해란강을 둘러 백년의 고도 용정시가 위치하고 있다.

발해 멸망 이후, 용정에 처음으로 벼꽃을 피운 것은 1877년이었다. 당시 이주민들은 배고픔을 떨치고자 남부여대(男負女戴)하고 험준한 오랑캐령을 넘었다. 함경북도 회령(會寧)의 이재민(李才旼)·장인석(張仁碩)·박윤언(朴允彥) 등과 평안북도김언삼(金彥三) 등은 열 네 가구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삼합(三合)에 이른 다음 오랑캐령을 넘어 육도하(六道河)해란강의 합수목[현 용정시 시교]에 이르렀다.

잡초 무성한 황량한 땅이었지만, 이들은 토지가 비옥해 농사짓기에 안성맞춤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이에 이곳에 정착해 움막을 짓고 불을 질러 밭을 일구었다. 다행히 볕이 좋아 첫 해 농사가 풍년이었다.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다. 백리 길을 마다하지 않고, 한 집 두 집 모여들어 마을을 이루었다. 사람들은 이곳을 ‘육도하 봇도랑 기슭’이라고 해서 ‘육도구(六道溝)’라고 불렀다.

그렇게 10년 후, 1886년에 정준이라는 한 젊은이가 밭을 갈다가 돌각담 밑에 파묻혀 방치되어 있는 옛 우물을 발견했다. 식수 대기가 용이하지 않았던 터라 사람들은 합심하여 돌각담을 밀어내고 우물을 청소했다. 우물은 깊었고 물빛은 맑았다. 맛도 좋았다. 우물가에 수양버들을 심고 나무틀을 짜 용두레를 만들었다. 용정에서 연길·도문(圖們)·혼춘(琿春)·왕청(汪清) 등을 오가는 길손들은 이곳에 들러 잠시 목을 축였다. 이에 육도구를 ‘용두레촌’이라고도 달리 불렀다.

이후 장인석과 박윤언이 용두레의 용(龍) 자와 우물 정(井) 자를 따서 마을 명칭을 ‘용정촌’이라고 정했다. 청나라 정부도 ‘용정촌’을 공식적인 지명으로 삼았다. 이러한 경위를 알리고자, 1934년에 ‘용정 지명 기원지(龍井地名起源地)’라는 비문을 새긴 돌비석을 용정 우물가에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을이 형성된 이후 잡화점, 여관, 음식점들이 우후죽순 들어섰다. 거리가 번창함에 골목길도 늘어났다. 큰 골목에 작은 골목을 만들고, 작은 골목이 또 골목을 낳다보니, 가로 세로로 뻗은 길이 마치 거미줄 같았다. 그래서 용정의 골목을 ‘아흔 아홉 골목’이라고 불렀다.

서전 서숙(瑞甸書塾)을 필두로 민족 교육을 지향하는 학교들이 들어섰다. 민성보(民聲報)를 비롯한 각종 언론 기관들도 들어섰다. 그야말로 ‘간도의 서울’을 방불케 했다. 이러한 사실을 두고 『북간도』의 저자 안수길(安壽吉)은, “만주(滿洲)의 조선인(朝鮮人)을 논(論)할 때 간도(間島)가 대상(對象)이 되고 간도(間島)를 논(論)할 때 용정(龍井)을 머리에 두게 되는 것은 상식화(常識化) 되어 있는 일이거니와 용정(龍井)이 걸어 나온 길이라는 것은 곧 간도 조선인(間島朝鮮人)의 걸어 나온 길이요 간도 조선인이 지내온 길은 만주 조선인(滿洲朝鮮人)의 역사(歷史)가 아닐 수 없다. … 용정은 간도의 향토요, 백의(白衣)가 건설한 향촌 도시(鄕村都市)요, 월경 이민(越境移民)의 건설지(建設地)요, 인(仁)이 변하여 반목(反目)이 없는 도시(都市)라고 할 수 있다. …”라고 했다.

개혁개방 및 한·중 국교 정상화 이후 연변 지역 한인[조선족] 사회가 변화하고 있다. 특히 2000년대 이후부터 ‘제2의 민족 이동’이라고 할 만큼 중국 전역으로 연변 지역 한인[조선족]들의 대대적인 인구 이동이 일어나고 있다. 대련(大連)·천진(天津)·연대(煙臺)·위해(威海)·청도(靑島)·상해(上海)·심천(深圳)·광주(廣州) 등의 대도시에 한국 기업이 진출하면서 적게는 몇 만에서 많게는 수십만에 이르는 인구의 한인[조선족] 집거지가 형성되었다. 이들이 떠난 연변 지역의 경작지는 한족이 소작농 혹은 계약농의 직분으로 채우고 있다.

연변 지역 한인[조선족] 사회가 변화하면서 한인들의 정체성도 흔들리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용정시는 중국에서 가장 큰 한인[조선족] 집거구로서 여전히 건재하다. 전체 인구에서 한인[조선족]이 차지하는 비율이 66%에 달한다. 그렇기에 다른 집거구에 비해 한민족의 의식주 생활 문화가 잘 남아 있으며, 아직도 한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문화적 배경에서 용정시에 ‘조선족 민속 박물관’을 설립하게 되었다.

용정 조선족 민속 박물관의 위치와 전시 규모

용정 조선족 민속 박물관은 ‘대성 중학교’에서 동남쪽 방향으로 약 100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건물은 170평 규모의 2층 구조로서 애초 1925년도에 성결 교회로 건립되었다. 이때부터 1982년까지 용정 지역 기독교인들의 예배당으로 사용하다가, 교회가 해란강변으로 옮긴 후에 ‘용정 조기 역사박물관[용정 옛날 역사박물관]’으로 활용하였다. 그래서 용정 사람들은 이 건물을 여전히 ‘용정 기독 교회’로 인식하고 있다. 이후 2006년에 용정 조기 역사박물관[용정 옛날 역사박물관]을 ‘용정 조선족 민속 박물관’으로 개명하여 동북 3성의 한인[조선족] 민속 문물을 전시하고 있다. 용정 조선족 민속 박물관은 중국 55개 소수 민족 단위로는 제일 처음으로 개관한 민속 박물관이라는 데 의미가 있다.

용정 조선족 민속 박물관 2층에는 약 200여 점의 민속 문물을 생업·일생의례·민속 공예·식생활·주거 생활·교육·복식·민간 신앙과 오락 등으로 분류하여 전시하고 있다. 전시물들은 모두 1980년대에 차상춘 관장을 중심으로 결집한 수집조가 동북 3성의 한인[조선족] 집거구들 답사하여 수집한 것들이다. 당시만 해도 민속 문물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가 부족하여 대부분 기증을 받았다고 한다. 이때 수집한 민속 문물이 근 1,000여 점에 달하지만, 현재 규모에서는 모든 전시가 불가능해 그 일부를 연길 박물관에 재기증 하기도 했다.

이에 용정시 정부에서 해란강·일송정·대성 중학교·용두레 우물 등에 한정하고 있는 한국인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보다 넓은 전시 공간에서 보다 많은 민속 문물을 전시할 수 있도록 확장 이전 계획을 수립 중이다.

용정 조선족 민속 박물관 입구에 적힌 '머리말'에 "민속 문물을 체계적으로 수장·보전·전시하여 후세에 보여주어 전통적 요소를 계승"하려는 설립 목적을 밝히고 있다. 즉 개혁개방 이후 한인[조선족] 사회의 해체와 더불어 급격히 사장되고 있는 한인들의 민속 문화를 후세에 계승하기 위한 것이다.

실제로도 용정 조선족 민속 박물관 덕분에 이주 한인들의 민속 문물이 보존·계승되고 있다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다.

용정 조선족 민속 박물관의 민속 문물 전시 내용

분류별 민속 문물의 전시 내용을 살펴보면, 우선 생업 분야의 민속 문물에 대해서는, “생업이란 사람이 생활에 필요한 여러 가지 물질을 얻기 위해 행하는 일을 말한다. 한인[조선족]들은 예로부터 농업을 천하지대본으로 삼았으며 또 생활 지역에 따라 어업 사냥업 등도 곁들여 형성되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다른 분야에 비해 비교적 다양한 민속 문물을 전시하고 있는데, 대부분 농업과 관련한 것들이다. 예컨대 도리깨·도끼·호미·낫·훑개[벼이삭을 훑을 때 사용하던 농기구]·지개·워낭·살포[논두렁에서 사용하던 일종의 삽] 등이다. 이외 큰 물고기를 잡을 때 사용하던 작살, 포수들이 사냥감을 담았던 망태, 토기 제작시 사용하던 물레 등이 전시되어 있다.

일생 의례 분야의 민속 문물에 대해서는, “인간은 일생을 살면서 자신의 지위를 바꾸게 된다. 신체의 성장과 함께 성인이 되고 혼인하여 가족을 이루고 노인이 되면 부양을 받다가 죽음에 이르게 된다. 그때마다 일정한 의례를 거쳐 새로운 지위를 맞이하는데 돌잔치 결혼 환갑 제례 등의 의례를 거치게 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주로 사진을 통해 인생 의례의 절차를 전시하고 있는데 돌잡이·결혼·환갑·상례 등과 관련한 것들이다. 결혼과 관련해서는 중화민국 10년에 발행한 ‘결혼증’을 전시하고 있어 인상적이다. 그리고한인[ 조선족]들이 예전에 토장(土葬)할 때 사용했던 꽃상여가 통째로 전시되어 있다.

민속 공예 분야의 민속 문물에 대해서는, “민속 공예는 일상생활에서 쓰는 생활 기구에 나타나는 만듦새와 꾸밈새로서 고유의 전통 기술과 예술성의 복합체이다. 장신구는 몸치장뿐만 아니라 벽사적 주술적 의미를 담고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으며, 식생활 분야의 민속 문물에 대해서는, “식생활이란 식량 식품의 조리 가공 식사와 조리 용구 식습관 식사 규범 기호 등을 주요 요소로 하는 인류의 기본 생활 중 하나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민속 공예와 관련해서 한인 여성들이 시집올 때 가져왔던 경대 및 노리개·반지·귀걸이·안경 등이 전시되어 있고, 식생활과 관련해서 국수틀이 전시되어 있다.

주거 생활 분야의 민속 문물에 대해서는, “집의 형태는 기후 조건과 자연 환경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뿐만 아니라 사회 문화적 조건에 따라 그 형태가 바뀌었다. 온돌을 사용하면서 방안과 부엌이 나눠지고 남녀의 활동 공간도 안채와 바깥채로 나눠지고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한인들의 주거 생활을 입체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전시실 정면 전체를 할애하여 주거 공간을 꾸며놓았다. 열기를 보존하기 위해 부엌과 실내 공간을 공존시켜 놓은 연변 지역 한인들의 북방식 주거 공간 형태인데, 이를 통해 원주지의 주거 공간이 자연 환경에 따라 어떻게 바뀌었는지 쉽사리 이해할 수 있다.

교육 분야의 민속 문물에 대해서는, “예로부터 우리 조선민족은 교육을 중시하였고 교육을 받고 학문을 닦는 뜻을 안으로는 인격을 다듬고 밖으로는 세상을 다스리는 데 두어 왔다. 종이 필 묵 연을 중심으로 문방구들이 발전하였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복식 분야의 민속 문물에 대해서는, “한인[조선족] 옷의 기본형은 남자는 바지저고리, 여자는 치마저고리이다. 남자의 겉옷으로는 두루마기가 있고 여자의 겉옷으로는 마고자와 쓰개가 있다. 옷감으로는 삼이나 목화와 같은 식물성 재료로 길쌈한 베나 무명을 많이 썼다. 옷의 색상도 결백한 흰색을 즐겼기에 백의민족이라고 불려왔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교육과 관련해서 벼루·먹과 『천자문(千字文)』·『맹자(孟子)』·『동몽선습(童蒙先習)』[『유몽선습(幼蒙先習)』]·『상례비요(喪禮備要)』[상례 절차를 기록해 놓은 자료]·『태씨 족보』 및 옛 서전 서숙(瑞甸書塾)의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고, 복식과 관련해서는 배틀·물레·신발[따투 : 겨울용 두터운 신발] 등이 전시되어 있다.

민간 신앙과 오락 분야의 민속 문물에 대해서는, “민간 신앙이란 생활의 필요에 의해 생겨난 종교 현상이다. 대중 속에서 전승된 것인데 무속 제사 점복 등이 포함된다. 민속놀이는 생활 가운데서 대중들이 스스로 만들어 즐겨온 것으로 이들 통해 집단의 단결과 화목을 도모하였다. 장기 윷놀이널뛰기 씨름 그네 등 민속놀이와 가야금 장구 징 등 오락기구가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한인 여인들이 주로 놀았던 휴천을 비롯하여 골패·장구·퉁소·거문고·꽹과리 등이 전시되어 있으며, 특히 1980년대 용정 지역에서 활동했던 마지막 무당이 사용했던 무신도·부채·방울·작두 등 무구(巫具)들이 전시되어 있다. 오늘날에는 흔적조차 찾을 길 없는 한인들의 무속 문물까지 전시되어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더욱 크다고 하겠다.

용정 조선족 민속 박물관에서 근무하고 있는 15년 경력의 모 연구원에 따르면, 이곳에는 연간 1만 5,000여 명의 관람객이 찾아온다고 한다. 하루 평균 40여 명의 관람객이 찾아오는 셈인데, 관람객은 대부분 한족이며, 전시물을 둘러보고 한결 같이 한인[조선족]의 의생활과 식생활에 관심을 기울인다고 한다. 반면 한국인 관람객은 소수 전문가 이외에는 거의 없다고 한다. 예외적으로 들렀다가도 전시물을 탐탁지 않게 여긴다고 한다. 모 연구원은 이에 대해, ‘한국에서 늘 보던 것들이고, 국립 민속 박물관이나 관련 홈페이지에서도 늘 볼 수 있는 것들이라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것 같지만, 그래도 간도를 개척하며 살았던 이주 한인들의 민속 문물이라는 것을 되새긴다면 그렇게 치부할 수 없을 것이다’며 한국인 관람객에게 서운함을 토로한다.

용정시 정부의 한인조선족 민속 문물에 대한 비전

구한말에 지주의 횡포를 견디지 못한 소작인들이 두만강 건너 농토를 찾아 이주하여 정착한 곳,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가가 국권 회복의 꿈을 펼치던 곳, 민족 교육의 터전으로서 서전 서숙 등이 자리한 곳, 박경리의 대하 소설 『토지』에서 ‘평사리’ 사람들이 새로운 꿈을 꾸었던 곳, 바로 20세기 초반에 한민족의 파란을 고스란히 겪은 용정시이다. 이곳에는 아직도 해란강이 둘러 흐르고 있고, 일송정이 푸른 자태로 우뚝 솟아 있다. 용두레 우물, 대성 중학교, 윤동주의 묘와 시비 등도 있다. 연변 지역 문화 관광에서는 어떤 관광 상품이든 이러한 유산들이 관광 대상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용정 조선족 민속 박물관은 그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용정시 정부가 한인[조선족]들의 민속 문물을 놓고 고민하고 있다. 더불어 한인[조선족] 학자들도 민속 문물의 선양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실례로 연변 일보가 주최한 좌담회에서 허명철은 “현재까지 연변에서의 관광 산업은 주로 백두산, 중조 변경 관광, 민속 관광을 브랜드로 삼고 있는데, 여기에서 우리는 관광 코스를 좀 더 확장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연변의 관광 지명도와 영향력을 높이려면 자체의 독특한 자원우세를 확보해야 한다. 말 그대로 연변은 조선족 자치주인 만큼 조선족 역사와 문화를 중심으로, 우리는 새로운 관광 자원을 창출해야 한다. 민속 관광에서 민속의 민족 문화적 가치 발굴에 좀 더 심혈을 기울인다면 한국은 물론 국내외 방문객들에게 연변에 살고 있는 현지 한인들만의 특색적인 민속을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한다.”라고 했다.

용정 조선족 민속 박물관의 민속 문물은 연변 지역 한인들의 민족 정체성 찾기라든지, 연변 지역 여행자의 한민족 정체성 읽기라든지, 그 어떤 측면에서든 선양할 가치가 있다. 용정 조선족 민속 박물관의 결속어는 “한인[조선족]의 생활 문화를 집약한 이 민속 전람은 지혜롭고 근로 용감하며 예절 바르고 깨끗한 우리 조선민족의 민속 문화를 요해하는 문화의 학습장이 되고 연구와 전시 토론장으로 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유익하고 보람 있는 사회 교육의 마당으로 될 수 있다면 더욱 만족하겠다.”이다.

이러한 바람대로, ‘연변 조선족 민속 학회’를 창립하여 한인[조선족] 민속 문물을 지속적으로 수집하는 것은 물론 정기적으로 토론회를 통해 민속 문물의 보존 방안, 발전 방안 등을 모색하고 있다. 또한 용정시 정부와 뜻을 같이 하여 보다 넓은 전시 공간을 확보하여 보다 많은 한인[조선족] 민속 문물을 전시하는 것은 물론 나아가 연변 지역 청소년들의 전통 문화 체험장이나 학습장으로서 승화를 추진하고 있다.

참고문헌
  • 안상경, 「연변조선족자치주 정암촌 청주 아리랑의 문화 관광 콘텐츠 개발 연구」(한국 외국어 대학교 박사 학위 논문, 2009)
  • 임영상, 「연변의 관광 문화와 용정, 용정 문화 콘텐츠」(『한민족 공동체』, 제16호, 2008)
  • 김혁, 「조선족 문화의 발상지 용정」(『민족21』117호, 2010)
  • 「조선족 력사와 문화를 중심으로 새 관광 자원 창출 필요」(『연변 일보』,2008)
  • 인터뷰(용정 조선족 민속 박물관 직원, 15년 근무, 이름 및 출생년도 공개 거부)
  •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개황(http://blog.daum.net/nagneigir/15894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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