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朝鮮族의 코리안 드림 白靑剛 신드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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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 지역 |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시 |
| 시대 | 현대/현대 |
연변 조선족들에게 있어 ‘코리안 드림’은 이제 더 이상 낯선 단어가 아니다. 수많은 한국인들이 ‘아메리칸 드림’을 간직하고 있듯, 연변은 아직도 친근하면서도 낯선 고국인 한국을 동경하고 있다. 가난한 농민들은 부자의 꿈을 안고, 배움에 목마른 학생들은 한 줄기의 희망을 안고 떠난 한국, 그리고 최근의 이러한 ‘코리안 드림’의 중심에 ‘백청강 신드롬’이 자리하고 있다. 사람들은 백청강(白靑剛)의 성공을 지켜보면서 자신의 성공을 꿈꾸고 전반 조선족 사회의 희망찬 미래를 되짚어 본다. 한 명의 조선족 청년이 가져다준 성공의 희열은 전반 조선족 사회를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조선족 청년 백청강은 조선족들이 많이 모여 사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출신이다. 자치주의 수부(首府)인 연길은 중국 조선족의 정치, 경제, 문화의 집거 구역이며 민족적 특색과 전통이 살아 있는 고장이다. 19세기 말 조선족 조상들은 가난과 전쟁을 피해 한반도에서 중국 동북으로 이주했다. 그리고 고난의 개척사와 수난사를 통하여 이 땅에 뿌리 내리게 된 이주민의 후손들이 오늘날 중국의 소수 민족 중 하나인 조선족이다.
중국의 조선족은 아직도 추석이나 설날 같은 명절 때면 한민족의 전통 복장인 한복을 차려입고 조상을 모시고 제사를 지낸다. 단오 명절에는 그네를 뛰고 널뛰기를 하며 씨름 대회를 벌이고 이긴 자는 황소를 상으로 받기도 한다. 이들은 중국의 소수 민족 중에서 가장 예의바르고 깨끗하고 교육에 앞장서는 민족으로 손꼽히기도 한다.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한국과 중국 사이의 왕래가 자유로워지면서 조선족 사회에서는 일명 ‘한국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가깝고도 먼 고국인 한국은 오늘날까지 자신의 언어와 문화를 잃지 않고, 민족의 뿌리를 지키며 살아왔던 조선족들에게 정체성을 확인하는 또 다른 기회의 장을 제공해 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최근 십여 년간 이러한 ‘한국 바람’으로 말미암아 조선족 최다 집거 구역인 연길에는 눈에 띄게 큰 변화가 일어났다. 일찍 ‘한국 나들이’를 경험한 사람들에 의해 연길 곳곳에는 한국 상품을 위주로 하는 가게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고, 여가 생활과 패션은 물론 생활 패턴까지도 점차 ‘한국화’되어가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선진국인 한국의 영향을 받은 조선족들이 늘어남에 따라 조선족들의 자질을 비롯한 문화 수준도 일정한 변화를 보였고, 조선족 사회 전반은 급속도로 변화·발전하는 지역 공동체로 거듭나게 되었다. 이 밖에 최근에는 인터넷 등의 현대화된 통신 수단을 통해 고국에 관한 정보와 소식들을 빠른 시간 안에 가장 정확하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
경제적·문화적인 면에서 중국 조선족 사회보다 많이 앞선 한국은 적어도 중국에 사는 조선족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조선족들은 그들의 뿌리는 고국인 한국이라 생각하며 잘 살아보려는 꿈을 안고 한국으로 떠났다. 여기에는 가장 전통적인 민족 문화가 살아 숨 쉬는 곳에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답을 찾으려는 일념도 없지 않았다. 조선족은 한 세기 전 가난과 전쟁을 피해 중국의 간도로 이주해왔고 한 세기도 훨씬 지난 지금에 와서 더 잘 살기 위해, 그리고 정체성을 찾기 위해 다시금 한반도로 이주한 것이다.
그들은 한국을 천국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천국은 부재했다. 비록 언어의 장벽은 극복하였지만 수많은 공사 현장에서, 식당에서 말투가 다르다고 무시당하는 일이 비일 비재했고 거주국과 고국의 문화적인 차이에서 오는 혼란 또한 감내해야만 했다. 정체성에 대한 의혹은 오히려 점점 더 커져만 갔고 풀 수 없는 오해들만 늘어갔다. 최고를 꿈꿀 사이도 없이 하루하루를 힘겹게 버티고 일하면서도 소외감과 이질감을 느껴야 했던 수많은 조선족들에게 백청강의 성공은 하나의 커다란 감동으로 다가왔다.
백청강은 2010년 11월, 한국MBC방송국에서 주최한 「위대한 탄생」 프로그램을 통하여 데뷔하였다. 처음 오디션을 통해 방송에 출연했을 때 그는 작은 체구의 평범한 조선족 청년이었다. 깡마른 얼굴에 배고픈 작은 야수 같은 모습을 한 백청강이 「위대한 탄생」 시즌 1의 TOP 1이 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백청강이 빛을 발하지 못하던 ‘원석’에서 정상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보석으로 되기까지는 결코 쉽지 않은 과정이 있었다.
백청강에게는 소박한 꿈이 있었다. 바로 9살 때부터 돈을 벌기 위해 한국으로 떠난 아버지를 비롯한 부모와 한집에서 함께 사는 것이었다. 외로움을 달래줄 백청강의 친구는 노래였고 그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 백청강은 점차 가수를 꿈꾸기 시작하였다. 연변의 허름한 밤무대를 전전하며 노래를 부르기도 했고 수도 없이 많은 콩쿠르에서 노래를 부르며 수상을 하기도 했다.
그러던 백청강은 우연히 한국 MBC의 한 프로그램이 중국청도(靑島)에서 공개 오디션을 연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백청강은 같은 날 치러지는 예술 학교 입학 면접도 포기하고 장장 30여 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달려 청도로 향했고, 그곳에서 극적으로 오디션에 합격했다.
나이 어린 청년 백청강이 보여준 것은 노래 실력만이 아니었다. 12강에서 8강으로, 다시 8강에서 1위로 자리를 굳히기 까지 수많은 조선족들이 뜨거운 마음으로 백청강을 응원했고, 백청강과 하나 되어 울고 웃었다. 재한 조선족을 포함한 중국의 조선족들은 실시간 생중계로 그의 성공 과정을 지켜보았고 가슴 깊숙이 깔려있던 정체성에 관한 의문을 꺼내어 똑바로 마주볼 용기를 얻었다. 이제 그는 세계적인 무대에 올라 진정한 가수 지망생의 패기를 선보이고 있다. 22살의 중국 조선족 동포 출신 백청강은 이렇게 한국 사회로의 진출에서 위대한 성공을 거두었다.
백청강은 중국 조선족 이주민 제3 세대이다. 중국연변에서 태어났고 중국 국적을 가지고 중국에서 교육을 받았지만 그의 부모는 모두 조선족이다. 백청강은 많은 조선족과 마찬가지로 고국인 한국을 동경해왔고 성공을 늘 꿈꿔왔으며 가수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백청강은 한국 사회에서 소외된 조선족이 대중 문화계에서 집중 조명을 받은 첫 사례로 꼽히는데 오로지 자신의 실력과 끊임없는 노력만으로 평범한 자리에서 최고의 무대에 서게 되었다.
백청강은 우승을 해서 받은 상금을 한국 사회에 기부하는 선행도 마다하지 않았고 또한 2011년 10월 5일 제5회 세계 한인의 날에는 재외 동포 사회에서 ‘코리안 드림’의 성공 사례를 부각시켰다는 이유로 한국외교부에 의해 홍보 대사로 위촉되는 영광을 지니기도 했다. 한국에서의 백청강의 활약은 중국 조선족들에게 큰 힘이 되고 있으며 심지어 ‘중국 조선족의 자존심’이라고 표현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아직도 불분명한 정체성의 갈등을 겪고 있는 조선족들에게 백청강 신드롬은 이러한 정서를 극복하고 희망을 꿈꾸게 하는 대안이 되었다. 부모 처자와 이별하고 한국에서 삶의 터전을 가꿔가는 조선족 부모들은 그의 성공에서 고향에 두고 온 2세들의 희망찬 미래를 찾아내려고 애쓴다. 학업을 위해 한국 땅을 밟은 피 끓는 젊은이들도 이를 통해 멀지 않은 앞날의 자신의 성공을 미리 기약한다. 그리고 백청강의 꿈을 닮은, 중국 조선족 사회의 코리안 드림에 목마른 수많은 차세대 젊은이들이 자신의 꿈에 날개를 달고 바야흐로 새로운 비상을 준비하고 있다.
「위대한 탄생」 시즌 1이라는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이름을 날린 백청강이 한국에서 성공 신화를 이룬 연변 조선족이라는 점은 주목받을 만한 케이스이다. 그의 우승을 두고 조선족의 ‘코리안 드림’이 실현됐다고 일컫는 이가 많다. ‘백청강 신드롬’에는 불우한 환경을 극복하고 꿈을 이뤄내는 드라마를 보고 싶어 하는 대중의 욕망이 깔려 있는데 그것은 곧 인생 역전 스토리에 대한 열망이다.
애초에 수많은 중국 조선족들은 잘 살아보려는 꿈을 안고 한국으로 진출했다. 그 중에는 처자식을 떼어두고 온 한 가정의 가장도 있었고, 남편과 가짜 이혼을 하고 위장 결혼으로 한국에 온 젊은 여성도 있었다. 사랑하는 딸을 먼저 시집 보내고 부모 초청으로 한국 땅을 밟은 이들도 있었고, 심지어는 생명을 무릅쓰고 밀항을 시도하는 이들도 있었다. 한국이라는 곳에는 중국 조선족들의 꿈이 있었다. 경제적으로 조선족 사회보다 많이 앞서간 한국으로 진출하여 열심히 일하여 돈을 많이 벌어와 부모처자와 함께 남부럽지 않게 잘 살아보려는 꿈, 그리고 너도나도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한국으로 갔다.
하지만 천국의 꿈에는 색조가 없었다. 고된 노동에 육체는 서서히 허물어져 갔고 때아니게 들이닥친 금융 위기에 잘 살아보려는 희망까지 여지없이 스러져갔다. 더욱이 참기 어려운 건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냉대와 멸시였다. 게다가 소수의 조선족들이 한국 사회에서 흐려버린 좋지 않은 이미지 때문에 따가운 오해의 눈총도 수없이 받아야 했다.
한국인과 중국 조선족 사이에 누적된 복합적인 감정과 오해들로 말미암아 한국 사회에서의 중국 조선족의 지위는 점점 추락했고 민족 사회에서 조선족의 정체성은 오리무중에 빠져버렸다. 이러한 정체성의 모호함에 뒤이어 조선족에 대한 한국사회의 부정적인 시선과 편견은 어느새 거주국과 고국 사이에서 조선족이 평생 극복해나가야 할 숙제로 남게 되었다. 하지만 백청강의 성공 스토리를 지켜보면서 한국인과 중국 조선족 사이에는 많은 연대감이 생겼다.
한국인들은 중국 조선족들에 대해 좀 더 이해하려는 마음을 갖게 되었고 중국 조선족은 역시 한마음 한뜻으로 다가서는 한국인들을 거부하지 않고 새롭게 알아가기 시작했다. 백청강의 활약으로 한국과 중국 조선족 사이의 보이지 않는 장벽도 많이 극복되었으며 한국인의 조선족에 대한 편견과 오해도 많이 사라졌다.
서울에 거주하고 있는 k씨는 한국에 온지 2년차이다. 중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계 회사에 취직했다가 더 많은 기회를 찾아 한국에 온 그녀는 ‘힘든 한국 생활 중 백청강의 성공을 보고 자신감을 되찾았다’고 말한다. 대학을 나왔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한국에 왔지만 오히려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소극적으로 변해가던 중 한국인들이 조선족들과 같이 한마음 한뜻으로 백청강을 응원하는 것을 보고 한국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다고 한다.
한국인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지방 모 대학의 대학원생인 s씨의 경우, 전에는 한국에 거주하는 조선족에 대해 편견이 없지 않았는데 서로 다른 문화 차이 때문에 이해를 못하는 부분이 많았다. 하지만 티비 프로그램을 통하여 본 백청강의 모습과 조선족들의 단합된 모습에 감화되어 ‘그동안의 맹목적인 편견을 버리고 조선족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백청강의 성공 스토리는 단지 노래 잘하는 한 조선족 출신 청년의 성공담에 그치지 않는다. 이 사건은 한국인과 중국 조선족은 여전히 하나의 뿌리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일깨워 주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인과 조선족 사이에 쌓인 편견과 오해를 뛰어넘는 다리로 작용했다. 아직도 고국과 거주국 사이에서 정체성에 관한 답을 찾기 위해 우왕좌왕했던 조선족들에게 ‘백청강 신드롬’은 결국 그 답을 찾아준 셈이 된다.
백청강의 성공은 중국 조선족이 거주국인 중국과 고국인 한국에서 이루고자 했던 정체성의 성공이다. ‘백청강 신드롬’으로 인하여 많은 한국인들이 조선족에 대해 가지고 있던 편견과 오해의 벽을 깨부수었다. 그리고 정체성의 모호함으로 열등감에 빠져있던 중국 조선족들이 한국 사회에서 자존심을 돌려받았다. 오늘도 백청강을 주목하는 모든 이들은 뜨거운 열정으로 한결같이 백청강을 응원하고 있다.
그리고 중국 조선족의 ‘코리안 드림’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며 ‘백청강’과 같은 수많은 훌륭한 인재들이 조선족 사회에서 더욱 많이 용솟음쳐 나올 것이다. 이는 아마 모든 중국 조선족들이 애타게 기다리고 또 기대하고 소망하는 바이다. 이제 조선족 사회가 고국인 한국과의 끈끈한 연대를 바탕으로 민족의 전통을 잃지 않으면서도 자신만의 특색을 살린 문화 공동체로 거듭날 것을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