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農樂 놀이에서 中國 朝鮮族의 農樂舞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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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생활·민속/민속 |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 지역 |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2011년 8월 9일 연변조선족자치주왕청현 상모춤 예술단은 조용했다. 단원들 대부분이 2011 여름 두만강 문화 축제에 출연하기 위해 도문시로 떠났기 때문이다. 왕청현 문화관 부관장이자 왕청현 상모춤 예술단김명춘 단장은 유네스코 세계 무형 문화유산 「농악무」(「상모춤」)의 전승인(인간 문화재)임에도 수수한 청바지 차림으로 우리 일행을 따뜻하게 환대했다. 그는 연습장 겸 전시장을 둘러보는 30여 분 내내 중국「상모춤」의 역사와 변화 내용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한인[조선족]의 「농악무」, 「상모춤」이 2009년 9월 ‘2009 인류 무형 문화유산 대표 목록’에 등재된 이후, 왕청현은 중국뿐 아니라 세계 한민족의 발길이 잦아진 곳이다. 문화관·예술단·박물관이 함께 들어선 복합 문화 공간의 길 건너에는 왕청현 합마당 들판에서 농악 놀이를 즐기는 사람들의 사진과 상모를 돌리는 김명춘 전승인의 모습이 양 옆에 그려진 왕청 극장이 자리 잡고 있었다.
동북의 한인[조선족] 사회가 등록한 국가급 무형 문화유산 가운데 처음으로 유네스코 세계 무형 문화유산에 선정된 「조선족 농악무」는 으레 상모 돌리기가 나오는 한민족의 농악 놀이에서 변모된 것이다. 검은색 바탕에 흰색을 두른 한국의 상모와 달리, 중국 한인[조선족]의 상모는 중국 사회에서 경사와 축복의 색깔인 붉은색 바탕에 테두리는 노란색이다. 상모를 돌리는 물채 또한 갈고리를 만들어 필요에 따라 길이를 조절할 수 있게 했다. 물채에 꽂는 구슬도 단조로운 색상에서 칠색 구슬로, 머리에 둘러매는 수건은 흰색에서 진달래 분홍색으로 바뀌었다. 상모를 돌리는 길이도 12m에서 28m로 늘어난 것이 중국 한인[조선족]의 상모이다.
김명춘 전승인은 이러한 중국 한인[조선족] 상모를 직접 만들고, 평행 돌리기·좌우 돌리기 등 단조롭던 돌림법에서 뛰면서 돌리기·돌면서 돌리기 등 새로운 돌림법을 창작했으며, 「농악무」를 공연하면서 장고를 메고 상모를 돌리는 사이를 꿰뚫고 지나가는 방법도 창작했다. 그는 32m나 되는 상모를 돌려 ‘상모 대왕’이 되었다.
전통적인 농악 놀이는 형식이 다양하고 내용이 풍부하며 집단적인 정서와 개인 기예가 결합된 즉흥성이 강한 대중적인 놀이 방식이다. 이는 한민족의 정서와 지혜가 스며든 귀중한 민족 문화 유산이다. 때문에 언제나 한민족이 있는 곳에는 농악이 울렸고, 농악이 울리는 곳에는 놀이판이 펼쳐졌으며, 놀이를 통해 함께 마음을 나누곤 했다.
한반도에서 중국 땅으로 이주한 이주민들(중국 조선족의 전신)은 험난한 개척 생활과 고된 삶을 영위해왔다. 그 과정에서 한반도에서 익혀온 전통적인 민속 문화유산을 중국이라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시켰을 뿐만 아니라 새롭게 발전시켜 오늘날 중국 한인[조선족]의 독특한 문화적 특색을 구축하였다. 대표적인 형태로 중국「조선족 농악무」가 있다.
중국 한인[조선족]의 「농악무」는 전통적인 농악 놀이에 토대하여 시대 환경의 문화적인 지향에 따라 표현성을 기하면서 새롭게 발전시킨 중국 한인[조선족]만의 민속 무용의 한 장르이자 예술 표현 형식으로써 일찍이 1940년대부터 특색을 보이기 시작했다.
중국 한인 집거구에서의 농악 놀이는 1928년 길림성 왕청현 연들라자에서 처음으로 시작되었다. 그 후 1940년을 전후로 연변 지구의 연길현 팔도 대포촌, 안도현 장흥향 신촌, 화룡현 투도구 북산촌, 왕청현 서위자촌 및 길림 지구의 반석현·서란현, 심양 지구의 금가만촌, 흑룡강 지구의 계린현 등 동북 지구의 한인 집거구에서는 단오·추석·음력설이면 늘 농악대를 조직하여 자발적으로 농악 놀이를 즐겼다. 그 중에서도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길림성 안도현 장흥향 신촌 농악이다.
신촌 농악은 전라도 남사당패에서 농악 놀이를 하던 민간 예인 이원보의 지도하에 비교적 계통적으로 전수되었다. 특히 1942년 만주국 창건 10주년 행사를 계기로 신경(장춘)에서 개최된 만주국 소수 민족 광대 대회에 참가하여 처음으로 무대에서 농악 놀이를 공연하여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사면으로 빙 둘러싼 관중 앞에서, 그것도 팔을 뻗치면 금방이라도 닿을 수 있는 근거리에서 행해지던 마당 놀이 형식의 농악 놀이가 처음으로 제한된 무대 공간에서 표현된 것이며, 기존의 자아 오락성과 놀이 형식을 토대로 새로운 표현성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당시 이 광경을 목격한 일본의 한 예술 평론가는 만주 예문 출판사에서 출판하는 잡지에서 조선 농악이라는 표제 하에 “집단 연기에 치중하면서도 개인 기예를 중요한 자리에 놓아 즉흥적인 자유 오락, 즉 춤추는 사람들이 스스로 즐기기 위한 춤이면서도 감상자들에게 일정한 심미 공간을 마련해주었다. 특히 풍년춤의 고조 부분에서는 조선 본토에서 볼 수 없는 상모잡이들의 높은 기교를 보여주었다”고 극찬하였다.
1945년 8·15 해방과 더불어 동북 지구의 토지 개혁 및 중국 공산당 정권의 건립은 중국 한인 농악 놀이의 특징을 보다 구체화하는 촉매제가 되었다. 당시 해방과 더불어 토지를 분배받고 땅의 주인이 된 한인 집거구의 농민들은 그 기쁨을 농악을 통해 만끽하면서 노동 열기를 불러일으켰다. 한 해의 수확의 기쁨을 농악에 담아 집단적인 축제 분위기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농악 놀이는 땀 흘려 가꿔낸 한 해의 성과를 과시하고 삶의 멋과 흥을 추구한 것이다. 이때부터 중국 한인 농악 놀이에는 전통적인 농악 놀이의 염원(풍쟁)이나 의뢰(매구)적인 의식이 아니라 현실적인 성과를 경축하면서 낭만적인 정서를 표출해내는 축제적인 문화 의식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1950년대에 진입하면서 연변 가무단조득현 선생은 생활 속에서 앙양되는 농악 놀이의 표현력과 내재된 축제 분위기를 예술적으로 끌어낸 후, 민간 예인 하태익 노인을 모시고 1951년 농악사상 처음으로 중국 한인[조선족] 민속 예술 무용인 「농악무」를 창작했다.
「농악무」의 창작 과정에서 조득현 선생은 전통적인 농악 놀이에서 표현된 집단성과 장기를 계승하고 군무 형식과 상모의 장기 표현을 기본 수단으로 하면서 창조적으로 여성 무용수들을 등장시켜 「농악무」의 표현 영역을 극대화시켰다. 전통적인 농악 놀이는 남성들만의 놀이 형식이었기 때문에 여성은 남성 복식 차림을 하고 등장했다.
작품 구성에서는 자아 오락적인 놀이 형식(‘잡색’과 ‘잡이’들의 각이한 표현 형식)에서 벗어나 남성 군무와 여성 군무, 남녀 혼합무 및 독무의 형식들을 적절하게 도입하여 무대 표현 예술로써의 작품 형식을 창출하였다.
또한 표현 수단에서는 집단적인 상모 장기와 회오리 바람처럼 돌아가는 기교적인 춤 동작 및 다양한 무대 구도와 조형 수단을 이용하여 민속 무용으로서의 정서적인 표현력을 강화하였다. 내용에서는 전통적인 풍물 놀이 형식에서 벗어나 축제 분위기를 핵심으로 하는 역동적이고 활달한 춤 장면들로 발전하면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인민들의 낭만적인 정서를 생동감 있게 표현하였다.
중국「조선족 농악무」는 조득현 선생의 독창적인 예술성을 토대로 전통성과 시대성이 겸비된 새로운 무대 예술 작품으로 다시 태어났으며, 민속 예술 무용의 하나의 새로운 장르로 떠올랐다.
그 작품은 1951년 3월 연변 과외 예술 콩쿠르에 처음으로 등장하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 해 9월 연변주 문련 주비처에서는 표창 대회를 열고 「농악무」의 창조적 성과를 높이 평가하였다. 뒤이어 「농악무」는 1952년 길림성 문예 콩쿠르에서 창작 1등상, 1953년 동북 3성 문예 콩쿠르에서 우수 창작상을 받았고, 1959년에는 영화로 제작되어 전국에 상영되면서 중국 한인[조선족] 예술의 상징물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하였다.
중국에서의 「조선족 농악무」는 전통적인 민속 문화유산을 현 시대 문화 현상으로 승화, 발전시켜 문화적 가치를 새롭게 개발하는 선두 역할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중국 한인[조선족]의 민속 문화 및 무용 예술 발전의 상징이 되었는데, 이러한 중국 한인[조선족]의 「농악무」는 「광장 농악무」·상모 놀이·풍물 놀이 등의 다양한 표현 예술의 형태로도 발전하였다. 동시에 축제 문화의 새로운 장르를 구축함으로써 오늘날 중국 한인[조선족]의 문화적 상징으로 자리매김하였다.
「농악무」의 다양한 예술적 혁신과 개발 및 창조는 1980년대에 이르러 개혁개방으로 인한 사회 문화 의식의 분위기에 영향을 받아 「광장 농악무」의 출범을 촉진했으며, 점차 광장 예술 무용의 형식으로 승화, 발전하였다.
「광장 농악무」는 무대 표현 형식인 「농악무」의 예술적 표현 방식을 기본 수단으로 삼았다. 표현 환경에 따른 다각적인 감상 측면을 기하면서 끊임없이 표현 공간을 확보하고 시선을 무대 중심에 집중시켰다. 그리하여 대칭과 조화, 입체적인 구도 변화와 다양하고 약동적인 농악 정서를 생동감 있게 구현하였다.
또한 표현 공간의 확장으로 인한 감상 거리의 변화로 섬세한 표현과 집단성을 뚜렷하게 보여줌과 아울러 한민족의 전통적인 두레 의식을 선명하게 구현시켰다. 기교에서는 개인 장기 보다 단체적인 장기 표현이 주를 이루었다. 예를 들면 여성 장고춤꾼들이 방대한 중상모 돌림 대열 속을 자유로이 꿰뚫고 지나가거나 세 겹으로 돌아가는 장상모의 장기 표현과 함께 그 속에서 소상모를 돌리는 장기 표현 등이 있다.
「광장 농악무」는 독특한 민속성과 높은 기예력, 그리고 풍부한 예술성으로 1988년 제1차 전국 일부 성, 자치구 광장 민간 무용 콩쿠르에서 우수 표현상을 수여 받았으며, 1989년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40돌 기념 천안문 광장 문예 야회, 1990년 광주 관광절에 참가하여 관객들로부터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었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광장 농악무」는 지속적인 발전을 이룩했다. 2002년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50돌과 2008년 중국 북방 관광 교역회 경축 행사에서는 천 여 명이 연출한 상모 놀이로 장관을 이루었으며 중국 한인[조선족]의 위상을 한층 높였다.
「농악무」(「상모춤」)가 처음으로 중국의 국가급 무형 문화재에 등록된 것이 2006년이다. 「농악무」에 대한 사회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2007년 왕청현 상모춤 예술단이 왕청현 문화관에 간판을 걸고 「농악무」 초청 공연을 진행하고 있다.
예전에는 대부분 퇴직한 노인들이 노년 생활을 즐기고자 상모를 돌리며 「농악무」를 추던 것에서 오늘날에는 유치원·소학교·중학교의 정규 교과 과정으로, 나아가 기업 단체에도 양성 센터가 세워져 「농악무」가 널리 보급되고 있다.
상모의 고장의 명예를 얻은 왕청현 배초구진에 가면 어린 학생들이 진달래가 만개한 동산에서 집단으로 상모를 돌리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는 한 폭의 그림 이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