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특별한 이야기

연변 최초의 한글 독서사

한자 延邊 最初의 한글 讀書舍
분야 문화·교육/교육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민족의 얼을 키우는 터전, 용정시 광주 매일 한글 독서사

1995년 8월 15일 용정(龍井)에서 가장 번화한 미식 거리[美食街], 식당과 술집, 노래방이 즐비한 이 거리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광주 매일 한글 독서사’가 문을 열었다. 이름부터 낯선 이곳의 탄생 이야기는 한 편의 드라마와도 같다.

지금은 명칭이 ‘송원 조선문 독서사’로 바뀌고 장소도 근처에 있는 용정 제1 유치원 건너편으로 이전하였으나, 용정의 한 문인이 ‘광주 매일 한글 독서사’를 '민족의 얼을 키우는 터전'이라고 평가한 것은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한글 독서사를 찾아 책을 읽고 글쓰기 훈련을 받은 용정의 한인[조선족] 청소년 중에서 대학에 진학하여 문학을 전공하고 한글[조선문]로 글을 쓰는 전문 작가가 된 사람만 2명이다. 기업 법인 용정시 ‘광주 매일 한글 독서사’는 2000년에 연길시에 세워진 ‘연변 조선문 독서사’ 등 연변 전역에 세워진 20개가 넘는 독서사의 초석이 되기도 했다.

2010년 7월 1일, 한글 독서사의 설립자인 김재권 선생을 ‘송원 조선문 독서사’에서 만났다. 이곳에는 오전 시간인데도 한글 기증도서를 한 아름 가지고 방문하는 사람들이 줄을 잇고 있었다. 한국에서 온 손님들이었다.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과 일본에서도 책을 기증한다고 한다. 1층은 서점과 독서실이, 2층에는 전집류와 단행본 등 많은 우리말 책들이 책장에 빼곡한 가운데 책을 읽고 토론 모임을 가질 수 있는 널찍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송원 조선문 독서사’는 한민족이라면 반드시 한번 방문해야 보아야 할 용정의 새로운 명소가 아닐 수 없다.

왜 ‘한글 독서사’인가?

용정은 중국 한인의 ‘이민 첫 동네’로, 연변조선족자치주(延邊朝鮮族自治州)를 구성하는 8개의 현과 시[안도현(安圖縣), 왕청현(汪清縣), 연길시(延吉市), 용정시(龍井市), 도문시(圖們市), 혼춘시(琿春市), 화룡시(和龍市), 돈화시(敦化市)] 가운데 한인[조선족]의 인구 비례가 가장 높은 곳이다. 또한 1945년 해방 이전까지 사실상 중국 한인의 역사와 문화의 중심지로 연변 역사 문화 관광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한국 관광객의 연변 관광 1번지인 대성 중학교와 「용드레 우물」, 「용정의 노래」[「선구자」의 원 제목]를 낳은 비암산일송정 등이 바로 용정에 있다. 윤동주 생가와 명동 교회, 명동학교가 있는 명동촌도 용정 시내에서 15분 거리에 있다.

그러나 중국 한인의 역사 문화 중심인 용정도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과 한중 수교 이후 일어난 거센 변화의 흐름을 비껴갈 수는 없었다. 많은 한인[조선족]이 이 흐름에 편승하여 한국으로 떠났다. 북경(北京)과 천진(天津), 청도(靑島)와 상해(上海) 등 중국의 대도시와 연해 도시로 삶의 무대를 옮긴 사람들도 많다.

한인[조선족]의 대표 도시인 용정에서도 중국에서 살아야 하니 중국어를 잘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자녀들을 한족 학교에 보내는 한인[조선족] 부모들이 많아졌다. 이런 형편에서 한글 책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서점과 도서관이 왜 필요하겠는가? 왜 ‘한글’이라는 명칭을 공식적으로 내건 독서사를 열겠는가? 서점이라면 가까운 곳에 용정신화 서점(新華書店)이 있고, 도서관이라면 역시 멀지 않은 곳에 용정시 도서관이 있지 않은가? 한글 독서사는 처음부터 이익을 내야 하는 기업 법인으로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김재권은 주변의 온갖 반대를 무릅쓰고 전 재산을 털어 용정의 번화가, 미식거리에 한글 독서사를 만들었는가? 그 답은 김재권의 뜨거운 '한글 사랑'과 '민족애'에서 찾을 수 있다.

“소학교에 다니면서부터 햇강아지가 눈을 뜨듯이 책을 읽고 싶었다. 그러나 집에는 책이 없었다. 그래서 할머니께서 먹으라고 주는 달걀을 한 알, 두 알 팔아 모은 돈으로 책을 샀다. 그러나 그것은 구지욕(求知慾)에 타는 갈증을 달랠 수 없었다. 그래서 일요일이 돌아오면 서점에 가서 하루 종일 책을 읽었다.”

위 인용문은 1938년 용정시 팔도진 쌍봉촌의 농민 가정에서 출생한 김재권이 1991년 10월 『청년생활』에 기고한 「나는 책을 사랑한다」라는 수필의 첫 대목이다.

이 밖에 김재권은 “한 민족이 자기 말과 글을 잊는다면 사람이 살아 있어도 영혼이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라는 말을 자주 인용했는데, 이는 그의 어린 시절 일본 군대의 군견[세퍼드]에 물려 사망한 부친이 남긴 유언이기도 했다. 김재권은 당시 어린 나이라 이 말의 참 뜻을 몰랐으나, 한글을 모른다면 조선 사람이 아니라는 것만은 머릿속에 깊게 새겼다고 한다.

김재권은 16세였던 1954년부터 유치원과 야학교를 꾸리고 낮이면 어린이들에게, 밤이면 농민들에게 한글을 가르쳤다. 그는 표준말과 조선 역사를 배우기 위해 평양 방송과 서울 방송을 들으며 역사 이야기와 노래를 2000여 수나 베꼈고 또 가는 곳마다 보급하기도 했다. 스스로 배우고 가르치면서 김재권은 우리말과 글이 ‘보배 중의 보배’임을 자각하고 1958년부터 본격적으로 『학습』, 『청년 생활』, 『구수하』, 『해란강』, 『용정 문예』, 『진달래』 등 신문과 문예지를 40년 이상 꾸려왔고 우리말과 글을 보급하고 인재를 육성해왔다.

그는 언제나 “우리의 조국은 중국이다. 우리는 새 중국의 주인이다. 때문에 주인 노릇을 잘하려면 한어를 잘 배워야 한다. 또한 우리는 중화 민족 대 가정 속의 한인[조선족]이다. 때문에 우리말과 글을 잘 배우고 사용하여 민족 자치 권리를 행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문화 대혁명’의 소용돌이 중에 평생에 걸쳐 모은 5,000여 권의 우리글로 된 책들이 불태워질 것을 염려해 땅 속에 묻어 이를 보존했다.

1994년 10월, 김재권 선생은 용정시 문학 예술계 연합 주석[회장] 자리를 끝으로 30년간의 공직 생활을 마감했다. 이미 30여 차례나 현, 주, 성, 중앙 정부의 선진 사업 일군, 학습 열성자, 노력 모범, 우수 당원으로 표창을 받고 50여 차례나 주, 성, 중앙의 창작상을 받은 그였고, 아직 임기도 남아 있던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주석직에서 물러난 것은 후임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함이었고 또, 실제로는 말년에 민족을 위하여 책을 쓰고 한글 독서사를 운영하기 위해서였다. 김재권은 한인[조선족]이 제일 많이 살고 있는 용정에서 바로 이 사업이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름을 ˂백민성(白民聲)˃으로 바꾸고

“한글 도서관을 꾸려 백의 겨레와 민중의 목소리가 백두산과 더불어 이 땅에서 영원히 메아리치게 하자.” 이것이 바로 김재권의 신념이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그는 ‘백민성(白民聲)’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하였다. 그에게는 일생을 편안히 먹고 살 수 있는 퇴직금과 5,000여 권의 책이 있었다.

그러나 도서관을 꾸리자면 책을 진열하고 책을 볼 수 있는 장소와 책상, 걸상이 있어야만 했다. 그는 용정의 문화계 인사들과 함께 지난 몇 해 동안 한국 유지 인사들의 경제적 후원을 받아 비암산일송정 정자와 명동촌윤동주 생가를 복원한 경험이 있었다. 그래서 한 핏줄인 한국의 국민들에게 후원해 줄 수 없겠는지 손을 내밀기로 했다. 그는 며칠을 고심한 끝에 자신의 약력과 구상을 편지에 적었다.

한국의 국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 백의 겨레들이 제일 많이 살고 있는 용정시에다 우리글로 된 신문, 잡지와 서적을 볼 수 있는 ˂독서사˃(도서관)를 꾸려 겨레들을 위해 남은 일생이나마 보람 있게 살려고 다짐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금과 신문, 잡지, 책이 필요합니다. 한국의 국민 여러분, 제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3대를 내려오면서 지켜온 민족의 얼을 배달 민족의 자랑인 용정에서나마 지켜가려 합니다. 한국이 더욱 번영 창성하여 중국에 살고 있는 우리 겨레들의 뒷심이 되어주기를 기원합니다. 1994년 12월 10일. 용정에서 白民聲 올림

‘광주 매일 한글 독서사’라는 이름으로

편지를 써놓았으나 누구에게 보내야 이 편지글을 책임지고 신문에 발표해줄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 문제였다. 그는 이전부터 편지 왕래를 해온 한국의 교수, 박사, 기업가 등 저명 인사의 명함을 놓고 이틀이나 고심하던 끝에 변시연 옹을 선택했다.

1994년 8월 14일 일요일 한국 문학비 건립 동호회 일행 20여 명에게 버스 안에서 윤동주 생가 복원 과정과 용정에 대해 소개한 바 있었다. 당시 시간이 없어 용정시의 민족, 역사, 변경(邊境), 문화, 자원 등 다섯 가지를 소개하기에 앞서, 그는 “우리는 민족 자치를 실시하여 민족 문화와 풍속 습관을 보존하고 우리말과 글을 사용하면서 떳떳하게 살고 있는 중화인민공화국의 공민입니다. (…) 그런데 한국에서 오신 어떤 분들은 우리를 우습게 보고 있습니다. 우리말 사전에 쓰여 있기를 ‘서울 깍쟁이’라더니 대접을 받을 때는 4층 기와집이라도 지어줄듯이 살갑게 굴다가도 돌아간 다음에는 편지 한 장 없습니다. 사람 속이기를 밥 먹듯 하고 서푼짜리 라이터, 손수건을 던져주면서 큰 선심이나 베푼 듯하고 여자라면 오금을 못 쓰고 개도 안 먹는 달러를 던져주며 아니꼽게 노는 사람이 이따금 있어서 한국의 위신에 손상을 주고 있습디다.”라고 버스 안에서 쓴 소리를 한 바 있었다.

윤동주 생가 방문 일정을 마치고 용정에 돌아와 버스에서 내렸는데 흰 두루마기를 입고 갓을 쓴 백발의 노인이 김재권에게 다가와 명함을 주었다. “변시연 이올시다. 칠십 평생을 살아오다가 오늘 처음으로 귀뺨을 얼얼하게 맞고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이에 명함을 보니 ‘한국 고문서 연구회 회장, 국사 편찬 위원회 위원, 한국 장서가 협회 부회장, 전라남도 문화재 위원’ 등의 직함이 적혀 있었다. 김재권이 혹 자신이 결례했다면 용서해달라고 하자, 변시연 옹은 “아니요! 진짜 좋은 말씀을 해주었어요. 그런 민족 의식과 줏대로 중국 사람들 속에서 꿋꿋하게 살아가는 동포들을 보니 정말 자랑스럽고 저절로 머리가 숙여집니다.”라고 말했다. 변시연 옹의 말은 진심이었다.

귀국 후 그는 한국 신문에 “용정은 우리 민족의 혼이 살아있는 곳입니다. (…) 특히 용정은 북간도 지방의 ‘만세 운동’이 일어난 곳으로 독립운동의 응결지였습니다. 지금 용정 중학교 교정에 서있는 윤동주 시인의 시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부끄럽지 않는 일이라면 용정의 한글 도서관 건립을 물심 양면으로 지원해주는 일입니다.”라고 썼다.

12월 10일 변시연 옹에게 보낸 편지가 한국광주에 도착한 것이 12월 20일인데, 이 내용은 12월 22일 『광주 매일 신문』 사회면의 톱 기사로 실렸다. 즉각 후원회가 결성되었고 광주 광역시 시장, 전라 남도 지사, 아태 재단 이사장 김대중[전 대통령]을 비롯한 시민들의 성금이 줄을 이었다. 김재권이 생각하기에 그것은 '기적'과도 같았다. 한글 독서사의 이름이 ˂광주 매일 한글 독서사˃가 된 것은 당연했다.

한글 독서사가 문을 열기까지

돈과 책이 있다고 하여 모든 일이 순풍에 돛단 듯 순조롭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김재권은 ‘문화 경영 허가증’, ‘기업 법인 영업 허가증’, ‘사단 법인 증명서’ 등 10여 가지를 수속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뛰어다니며 입이 닳도록 설명에 설명을 거듭해야만 했다. 결국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지만, '한글'이라는 두 글자가 끝까지 문제가 되었다. 아래는 김재권과 젊은 공직자 간의 입씨름 내용이다.

― 한글이란 뭐고 독서사란 무슨 뜻입니까?

― 정말 몰라서 묻는 것입니까?

― 그렇지 않고요. 알면서 물을 턱이 있습니까?

― 한글이란 ‘훈민정음’을 말합니다.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조선 문자를 말하는 고유의 이름입니다. 백성들의 글이라고 해서 한글이라 했습니다. 50년대 초까지만 해도 남, 북조선은 물론 중국에서도 조선어문 교과서 이름을 '한글‘이라 했습니다.

― 그럼 독서사란 또 무슨 뜻입니까?

― 개혁개방의 산물인데, 제가 이런 이름을 달게 된 건 서점, 도서관, 인쇄소, 출판사 등 계열의 봉사성 기업을 꾸려볼까 해서 독서사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 내가 묻는 건 수많은 이름가운데 왜 하필이면 ˂한글 독서사˃란 이름을 달았는가 그 말입니다.

― 말속에 말이 있는 것 같은데 간단히 말하면 우리글로 된 신문, 잡지와 서적을 위주로 경영한다는 말입니다.

― 그럼 한어문 신문, 잡지와 서적은 안합니까?

― 지금 국가 도서관이나 서점엔 대부분 한어문 서적이고 조선문 서적이 적은 것 만큼 우리 독서사에서는 필요한 한어 신문, 잡지와 도서 만을 취급하겠습니다. 중국의 공민으로서 한어를 모르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가 꾸리는 것은 이름 그대로 ˂한글 애독자 협회˃와 ˂한글 독서사˃인 만큼 조선문이 위주입니다.

― 아바이, 그러지 마시고 좀 툭 털어놓고 솔직히 이야기하십시오. 한국을 위해서 꾸리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 안 그렇소! 틀렸소. 여기 규약이 있으니 한번 읽어보시오. 난 우리 민족의 후대들을 위하여, 용정시의 문명 건설을 위하여 한거요.

― ˂한글독서사˃라 … 아바인 조선 반도가 통일되면 조선에 나가 살겠지요?

― 또 틀렸소. 남을 속이는 건 결국 자기를 속이는 것이요. 똑똑하게 말해주지. 나는 중국 공산당원이요.

1995년 8월 15일 맑고 푸른 하늘 아래 “용정시 광주 매일 한글 독서사 성립을 축하한다!”라는 현수막이 바람에 나부끼고 도서관은 꽃 바구니, 축하 족자들로 가득 찼다. 대회장은 꽃밭 속에 아름답게 장식되었다. ˂한글 애독자 협회˃ 명예 회장직을 수락한 연변대학정판룡 교수, 연변 문련의 김경련 상무 부주석, 연변일보사의 장정일 부주필, 연변인민방송국, 연변인민출판사, 연변 민간 문예가 협회, 연변 음악가 협회, 연변 무용가 협회,『천지』,『청년 생활』,『예술 세계』,『문학과 예술(현 화시대)』잡지사 등의 관계자들과 한국광주 광역시송원 그룹 회장이며 『광주 매일 신문』고제철 회장을 단장으로 하는 20여 명의 축하단들이 속속 도착했다.

그런데 갑자기 상급 관계 부문에서 “속히 들어왔다 가라.”라는 진급 호출령이 내려졌다. 개관식을 하려면 “한국 도서”를 내려놓고 하라는 것이었다. 김재권은 평소 형님, 아우하고 지냈던 공무원 앞에서 책상을 내리치면서 “모든 것은 내가 책임질 것이니 동무는 걱정하지 말라.”고 호통을 쳤다. 그는 이런 일을 예상하고 사전에 시 당위, 정부, 안전국, 공안국, 외사 부문, 심지어 정치 협상 회의까지 찾아다니면서 의견을 청취했고, 용정시이준일 부시장이 직접 내빈들을 접견하고 있으니 시 당위와 정부에서 반대할리는 만무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또한 한국에서 오는 책들은 아직 대련 항구에 도착도 하지 않았던 터였다.

한글 독서사와 함께 이어지는 우리말 우리글 사랑

산고(産苦)의 아픔 끝에 광활한 중국 대지 위에 우리글로 된 첫 사립 도서관이 성립되었다는 희소식을 들은 연변을 비롯한 동북의 한인[조선족] 각계 인사들이 축하인사와 많은 저서와 신문, 잡지를 보내왔다.

중국 주재 한국 대사 또한 “용정시한글 독서사가 한중 두 나라의 문화 교류를 위하여 더욱 큰 성취를 이룸과 동시에 더욱 큰 발전이 있기를 기대합니다.”라는 축전과 두 개의 꽃바구니를 보내왔다.

광주 매일 신문사의 고제철 회장은 “한글 독서사 명예 회장직을 참답게 이행하여 앞으로 훌륭한 도서관으로 꾸리도록 힘껏 도와드리겠다.”고 하면서 1만권의 도서를 보냈다. 그 외에도 중국 국내와 남, 북한 기관(조선 출판물 교류협회, 한국 사회 교육 방송국)에서 신문, 잡지와 도서를 계속 보내왔다.

5,000권으로 시작한 한글 독서사는 만 2년도 되기 전에 중국 조선족 작가 작품관, 열람실, 대출실, 자료실과 2만 여 권의 장서를 갖춘 도서관으로 발전했다. 광주 매일 한글 독서사는 2005년 8월 송원 조선문 독서사로 개칭했다. 장소도 미식거리에서 이웃 광화거리 143호로 이사했다.

그러나 독서사는 처음 시작했던 사업들인 무료 글짓기 지도, 글짓기 콩쿠르, 감상문 쓰기, 이야기 모임 등의 행사를 계속하고 있다. 또한 생활이 어려운 가정의 학생과 노동자에게 무료로 도서 열람증, 대출증을 발급해주고 매년 우수 애독자를 선발하여 표창하고 있다. 또한 2000년 연길시에 세워진 연변 조선문 독서사 등 자매기관들과 함께 우리말 우리글 사랑을 계속 이어나가고 있다.

참고문헌
  • 김재권,「나는 책을 사랑한다」(『청년 생활』, 1991. 10)
  • 김재권,「신념」(『천지』, 1997. 4)
  • 「사명감으로 민족의 뿌리 찾아: 민간 문학자 김재권」(『연변 일보』, 1991. 11. 25)
  • 「민족의 얼을 키우는 터전 ― 용정시 광주 매일 한글 독서사」(『흑룡강 신문』, 1997. 6)
  • 인터뷰(용정시 송원 조선문 독서사 김재권, 2010. 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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