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호랑이, 연변 오동팀

한자 白頭山 虎狼이, 延邊 敖東팀
분야 문화·교육/체육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시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96년
유럽의 맨체스터-유나이티드가 부럽지 않다, 연변 오동팀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는 스포츠를 말하는 데 있어서 축구가 빠질 수 있을까? 한국 역시 축구 이야기라면 전 국민이 귀를 세우고 관심을 보인다. 2002년 한일 월드컵 이전까지 대한민국의 존재를 잘 모르던 세계인들에게 한국을 알리고, 한국인의 위상을 드높인 스포츠 역시 축구였다. 2002년 월드컵이야 말로 한류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연변조선족자치주에도 축구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즐기는 스포츠다. 여기에는 1990년대 후반에 연변에서 일대 돌풍을 일으키고 전국적으로 신화를 창조했던 ‘연변 오동팀’이라는 한인[조선족]을 대표한 유명한 축구팀이 있었기 때문이다.

1994년 중국 축구계에 위풍을 떨친 이호은 감독으로부터 시작하여 1996년 중국 축구계를 놀라게 하는 한국인 최은택 감독이 절정으로 이끈 ‘연변 오동팀’은 백두산 호랑이의 기세를 떨쳤고, 고훈 감독 지휘 아래 눈부신 성과들을 거두었다.

연변 오동팀은 2017년 현재 코칭 스태프 6명, 그리고 선수단 약 25명의 규모로 구성되어 있는데, 특히 지난 갑급 리그에 있던 7년 동안은 중국 축구가 프로 스포츠를 시작하여 발전하던 시기였다. 한인[조선족]의 자랑이었던 ‘연변 오동팀’은 선진적인 축구로 프로축구에서 한인[조선족]의 위상을 과시하며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다. 그리고 오늘날 한인[조선족]의 영원한 자랑과 민족적 자존심으로 남아 있다.

백두산 호랑이: ‘연변 오동팀’을 말한다

연변 오동팀의 전신은 연변 축구 클럽(연변 FC)이었다. 1955년에 창설된 중국연변조선족자치주의 축구 클럽으로, 중국의 프로 축구팀 가운데 유일하게 한인[조선족] 출신 선수들로만 구성된 팀이다. 클럽 명칭의 변천사를 보면 연변 한인[조선족]의 현대사만큼이나 복잡하다.

초기 길림 FC(1955∼1994)로 시작하여 길림 삼성팀(1994), 길림 현대팀(1995), 연변 현대팀(1996)을 거쳐, 연변 오동팀(1997∼1998), 길림 오동팀(1998∼2000)으로 개칭했다. 그러다가 2001년 연변 FC(2001∼2003)가 되었고,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연변 세기팀(2004) 그리고 연변 FC(2005년 이후)로 불리게 되었다.

중국의 축구계에서 연변 축구는 신문 1면에 장식될 만큼 빛나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1급 리그와 2급 리그 사이를 오가던 연변 축구는 1992년 드디어 1급 리그에 진출했다. 당시 중국 축구는 프로 스포츠가 아니었기에 갑A 리그와 갑B 리그의 구분이 없었다. 1994년 중국 축구가 드디어 프로 경기를 개막한 후, 이호은 감독이 이끌며 중국 축구 무대에서 위풍을 떨친 연변 축구는 한국으로부터 50만 달러를 협찬 받아 1급 리그에서 장장 7년 간의 대장정을 시작했다.

1996년 12월 중국 동북 변방의 자그마한 도시 연길에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나타났다. ‘연변 오동팀’의 운명을 바꿔놓은 한국인 최은택 감독이었다. 그는 연변 축구의 역사에서 기적을 창조한 축구 감독 중의 한사람이었다.

당시 연변 축구 클럽에서 그를 초빙할 때 누구도 이 백발 노인이 연변 축구 역사에 휘황찬란한 한 페이지를 남겨 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 해 연변 현대팀은 정식으로 연변 오동팀으로 이름을 바꾸고 위풍당당한 백두 호랑이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났다.

1997년은 연변 오동팀이 백두산 호랑이의 기세로 중국 축구계에 돌풍을 몰고 온 한 해였다. 최은택 감독은 수비 위주의 축구가 주를 이루던 중국 축구계에 한인[조선족] 청년들을 이끌고 화끈한 공격 축구를 선보여 중국 축구계를 뒤흔들었다. 이를 계기로 연변 오동팀의 고종훈, 김광주, 이홍광 등은 갑A 시즌 초기에 국가 대표팀 선수로 뽑혔고, 고종훈 선수는 1998년에 중국 내 최우수 미드필더로 뽑히기도 했다.

창단 이래 줄곧 공격적인 경기 운영 방식으로 ‘백두산 호랑이’란 별칭을 얻었던 연변 오동팀은 최은택 감독의 지도 아래 중국 축구 갑A 리그에서 4위라는 놀라운 성적을 거뒀고 맹활약을 펼치면서 승전보를 전했다.

그러나 연변의 한인[조선족]들에게 큰 기쁨과 자부심을 안겨주던 연변 오동팀은 지속적인 관심을 이어가기에 재정적 뒷받침이 부족했다. 운영 자금의 부족은 우수한 선수 확보 경쟁에서 뒤처지는 결과를 가져왔고, 이에 따라 연변 오동팀은 점차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다.

1998년 최은택 감독이 연변을 떠나자 연변 오동팀은 연이어 쓴잔을 마셔야 했다. 연변 축구는 실력을 잃지 않았지만 중국 축구 협회와의 빈번한 마찰과 갈등으로 점점 그 힘을 잃어갔다. 그러다 결국 1999년 시즌을 끝으로 연변 오동팀은 끝내 갑A 리그에서 갑B 리그로 강등되었고 팀은 절강 녹성팀에 매각된 후 결국 해체되고 말았다.

축구를 목숨처럼 사랑했던 조선민족의 연변 오동팀이 연변 축구 역사에 빛나는 한 페이지를 남기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이다. 비록 팀은 사라졌지만 그들이 중국 축구계에 남긴 공로는 한마디로 평가하기에는 이미 많은 업적을 남겼다.

연변 하늘을 뒤덮었던 함성 소리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세계를 함성으로 뒤덮었던 ‘붉은 악마’를 우리는 기억한다. 붉은 물결은 한국에서 급속도로 전 세계로 퍼져 나갔으며 그 힘찬 응원아래 축구 전사들은 축구장에서 한 번 또 한 번의 승전고를 울렸다.

연변의 한인[조선족] 역시 비슷한 경험이 있다. 연변 오동팀이 승리의 기발을 휘날리며 전국을 순회할 때 민족의 전통 의상을 차려입고 북을 치면서 연변 오동팀을 뒤따랐던 한인[조선족] 응원단의 모습을….

연변 오동팀의 화려한 역사의 배후에는 언제 어디서나 응원의 함성을 멈추지 않았던 단합된 한인[조선족]이 있었다. 선수들의 땀과 노력, 그리고 축구팬의 변함없는 지지와 우렁찬 함성 소리는 경기에서의 승부만이 아니라, 바로 한인[조선족]의 자존심이었다.

연변 오동팀이 홈 경기를 할 때면 작은 연길시는 경기를 관전하러 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의 9개 현, 시에서 연길로 삼삼오오 모여 들었기 때문이다. 연변 오동팀이 경기를 펼친 경기장은 3만명 정도의 관객밖에 수용할 수 없는 작은 구장이었다.

입장권 한 장이 30위안 밖에 안 되었지만, 호주머니 사정상 이마저도 살 수 없는 사람들은 경기장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담장 밖에 있는 나무 위에 올라가 경기를 관람하기도 하였다. 연변 오동팀에 대한 사랑은 민족의 구분도 없었다. 한인[조선족], 한족을 떠나 연변 오동팀은 자랑스런 ‘우리’ 축구팀이었다.

연변 사람들은 열렬한 팬이었는데 매 경기마다 2만 5천명에서 3만 명이 응원에 나섰다. 한인[조선족]에게 선수들은 단순한 축구 선수를 넘어 내 이웃의 아들로 여겨졌다. 팬과 선수 사이에는 끈끈한 정이 자리하고 있었다.

연변에서 축구 경기가 열리는 날은 단순한 여가 활동의 날이 아닌 명절이었다. 경기가 있는 날 연길시의 풍경은 월드컵 한국전이 있던 서울의 모습과 같았다. 사람들은 앞을 다투어 경기장을 찾거나 TV와 라디오 앞에서 눈과 귀를 모았다. 시끌벅적한 도시의 일상이 정지해버린 듯 했다.

연변 오동팀이 승리를 하는 날에는 시내 곳곳의 음식점마다 기쁨의 함성이 넘쳐났고, 패배한 날은 거리마다 울적한 기색이 어렸다. 연변 축구는 연변 한인[조선족] 삶의 일부였다. 그 시절 연변 오동팀은 연변 사람들과 항상 호흡을 같이 했다. 연변 축구의 배후에는 200만 명이라는 깊고 굵은 한인[조선족]의 뿌리가 자리하고 있었다.

영원한 오동팀, 그리고 다시 연변 축구

1990년대 연변의 한인[조선족]에게 수많은 감동과 추억을 만들어 준 연변 오동팀을 사람들은 결코 잊지 못한다. 이호은 감독은 한국을 방문했을 때 “연변 축구팀은 마오쩌뚱 시절부터 50년을 이어왔는데, 그냥 축구팀이 아니라 한인[조선족] 자존심의 상징이다. ‘연변 축구’라는 로고를 붙이고 중국 방방곡곡을 돌며 경기를 벌인 덕에 중국 내륙이나 남방의 오지에 가도 한족들이 연변은 몰라도 ‘연변 축구’는 안다.”고 했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사회에서 소수 민족으로 그 존재를 알리고 있던 한인[조선족]에게 연변 오동팀은 연변과 한인[조선족]을 알리는 홍보 대사였을 뿐 아니라 연변의 한인[조선족]을 포함한 한인[조선족] 사회의 자랑이고 긍지였다.

오늘날 한인[조선족]은 연변 축구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보면서 과거 연변 오동팀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온 힘을 다하고 있다. 한마음 한뜻으로 연변 축구의 부활을 기대했고 몸과 마음을 다해 연변 축구를 응원했다. 연변 축구는 지난 반세기 동안 재정 문제를 겪은 적이 많았지만 그때마다 축구를 사랑하는 이들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아 극복했다.

특히 1990년대 중반 한중 수교와 더불어 한국 기업들이 하나 둘씩 중국에 진출하면서 연변 축구를 적극 협찬하였으며 삼성, 현대 등 대기업의 후원을 받아 중국 프로 축구의 무대를 누볐다. 2007년에는 한국 국가 대표팀 응원단 붉은 악마가 6억 7천여 만 원을 지원했으며, SK 그룹도 재정 지원에 힘을 보탰다.

그리하여 연변 FC로 대활약하고 있는 연변 축구는 2004년 3부 리그에서 우승해 이듬해 2부 리그로 승격하였다. 현재 연변 축구는 과거의 정체에서 벗어나 강렬한 개성으로 새로운 도약을 꿈꾸고 있다. 그 곁에는 레드 싸이클론 서포터스[붉은 폭풍 응원대]라는 서포터스가 늘 함께 하고 있다. 2008년 자발적으로 조직된 이 응원단은 매 경기마다 열띤 응원을 펼쳐 선수들에게 큰 힘이 되고 있다. 이들은 마음으로 연변 FC와 함께 뛰며 한인[조선족] 전체가 서포터스가 되도록 자신들이 앞장서겠다는 포부를 밝히고 있다.

중국에서 한인[조선족]만큼 축구를 사랑하는 민족은 없을 것이다. 그만큼 연변 축구는 연변 사람들의 자랑이며 자존심이기도 하다. ‘연변 오동팀’은 이미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았지만 연변 한인[조선족]은 여전히 이 땅에 남아서 자신의 정체성을 굳게 지키고 있으며, 연변 축구는 새로운 기상으로 ‘연변 오동팀’의 뒤를 잇고 있다. 한때 중국 축구 무대에서 용맹을 떨쳤던 백두 호랑이, 그리고 그 백두 호랑이는 오늘까지도 연변 한인[조선족]들의 기대를 한 몸에 안고 그 기상을 떨칠 날을 기대하고 있다.

내일을 향해 뛴다, 백두산 호랑이의 부활을 꿈꾸며

누군가에게 축구는 단순한 여가 문화에 불과하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매개체이고 민족적 자존심이다. ‘연변 오동팀’은 이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그들이 남기고 간 여운은 한인[조선족]의 마음에 영원히 자리 잡고 있다.

사람들은 그들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며, 그때 그 시절 한인[조선족]의 존재를 중국에 알렸던 자랑스러운 ‘백두산 호랑이’를 잊지 않고 있다. 한민족의 아픔과 상처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연변, 그곳에는 오늘도 ‘백두산 호랑이’라 불리는 연변 FC가 그라운드를 누비며 땀을 흘리고 있다. 200만 한인[조선족]의 사랑을 품고 달리는 그들은 축구를 통해 오늘도 희망찬 미래를 꿈꾼다.

참고문헌
  • 「연변 축구팀 그 사람 그 일들」(중국 한민족 공동체 뉴스, 2009. 3. 17)
  • 「延边敖东队——悲情“豪门”」(体育天地, 2010. 1. 7)
  • 모이자 뉴스(http://www.moyiza.com/bbs/view.php?bbid=main_news&no=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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