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특별한 이야기

연변의 로마, 팔도구 천주교회와 성당

한자 延邊의 로마, 八道溝 天主敎會와 聖堂
분야 종교/기독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중국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10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47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92년 7월 19일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1년 5월 4일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조양천진 팔도향
정의

1910년 중국길림성 연길현 팔도구에 설립되어 1947년에 폐쇄되었다가 2001년에 중국길림 교구 소속 천주교회로 다시 설치된 천주교 조직.

팔도구 천주교회의 시작

연길시에서 북서쪽으로 약 3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팔도구가 있다. 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길림성 용정시 조양천진 팔도향이다. 이곳은 연변 지역 천주교의 중심이었다. 그래서 ‘연변의 로마’라는 말이 생길 정도였다고 한다. 한때 간도 신자 가운데 80%는 팔도구 출신이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였다. 현재 중국 내 조선족천주교 신부 8명 가운데 4명이 팔도구 출신이라고 한다.

팔도구 지역에서 천주교가 시작된 것은 1903년 무렵이다. 용정(龍井)에 살던 천주교 신자 10여 가구가 조양하(朝陽河)[후에 팔도구로 개칭함]에 옮겨와 정착하면서 팔도구 지역에 신자들이 생겨난 것이다. 당시 김계일(金桂一) 등이 조양하의 수남촌(水南村)에 공소를 마련하자, 함경도 원산 천주교회의 프랑스 선교사 브레(Bret) 신부가 방문하여 성사를 집전하였다. 그 뒤 1910년에 간도 지역의 천주교 신자들을 돌아본 서울의 뮈텔(Mutel) 주교가 팔도구를 방문하고 공소를 정식 천주교회로 승격시켰다. 이로써 팔도구 천주교회는 1909년에 설립된 삼원봉 천주교회(1931년에 대랍자 천주교회로 개칭함), 용정 천주교회에 이어서 간도에 설립된 세 번째 천주교회가 되었다.

팔도구에 도착한 천주교 신부

팔도구 천주교회의 초대 주임 사제로 부임한 인물은 서울 대목구의 최문식(崔文植) 신부였다. 그는 기존의 공소 자리에 성당을 세우는 계획을 세우고 일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1916년 9월 8일에 새로운 성당을 완성하였고, 삼원봉 천주교회에 있던 퀴를리에(Curlier) 신부가 와서 성당을 축성하였다. 최문식 신부는 교육 활동에도 관심을 가져 1918년 1월에 조양학교(朝陽學校)를 설립하였다. 이 학교는 간도 지역에서 천주교회가 세운 세 번째 교육기관이었는데, 후에 팔도구 해성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당시 간도 지방에는 일제의 억압과 차별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이주해온 한국인들이 많았다. 충청도, 전라도, 경기도, 평안도, 강원도 등지에서 온 천주교 신자들은 주로 팔도구에 정착하였다. 팔도구에 들어온 천주교 신자들은 2,000명에 육박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팔도구가 지리적으로 외부의 간섭을 덜 받았으며, 토질이 좋아서 농사짓기도 수월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최문식 신부가 사목하는 동안에 성당 건물도 세워져서 한국인 신자들이 여유로운 신앙생활을 누리고 있었던 것도 큰 요인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뜻밖의 사건이 벌어졌다. 1919년 7월 최문식 신부와 신자 10여 명이 마적들에게 납치당한 것이다. 마적들이 성당에 총이 있다는 헛소문을 듣고 침입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총을 발견하지 못하자 대신에 신부와 신자들을 인질로 잡아갔다. 최문식 신부는 마적단 소굴에서 온갖 고생을 하다가 205일 만에 풀려났다. 1920년 2월에 최문식 신부가 팔도구로 돌아올 때까지 황해도 사리원 천주교회의 백남희(白南熙) 신부가 머물면서 천주교 신자들을 돌보았다.

독일 선교사가 팔도구에 들어오다

1920년 8월 5일 원산 대목구가 설정되고 독일의 성 베네딕도회 오틸리엔 연합회에 소속된 선교사들이 선교활동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에 연길 지역도 1921년 3월 19일 원산 대목구에 편입되었다. 그러자 독일 선교사 퀴겔겐(Kügelgen) 신부가 1921년 5월에 간도를 떠나 강원도 양양 천주교회로 간 최문식 신부의 뒤를 2대 주임으로 팔도구 천주교회에 부임하였다. 퀴겔겐 신부는 교육 사업에 뜻을 두어 매화동, 신흥동, 남양, 의봉 등 4개 마을에 조양학교의 분교를 설립하였다. 1923년 4월에 4대 주임으로 부임한 독일 선교사 에카르트(Eckhardt) 신부는 팔도구에 사는 중국인들을 위하여 별도의 중국인 학교를 세웠으며, 교사를 양성하기 위하여 조양학교에 사범과를 만들기도 하였다. 1936년 11월 조양학교의 건물을 새로 지어서 낙성식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1937년에는 올리베타노 베네딕도 수녀회가 팔도구 천주교회에 파견되어 교육 및 의료 사업을 전개하였다.

전성기 팔도구의 풍경과 종소리

1923년 11월에 팔도구 천주교회 주임으로 부임한 안드레아 에카르트 신부는 보고서를 쓰면서 팔도구의 목가적인 풍경을 여러 차례 묘사하였다. 그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팔도구는 30분도 채 안 걸릴 만큼 가깝게 위치한 7개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그 중에는 광장이 자리하고 있다. 용정에서는 대략 7시간, 연길에서는 6시간이 걸린다. 800여 호에 이르는 팔도구의 7개 마을에 4,000명에 달하는 주민이 살고 있다. 주민의 절반 이상이 천주교 신자였다. 해성학교에는 남녀 학생 200명이 다니고 있다. 해성학교 옆에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학교도 있었다. 간혹 학교 간에 불쾌한 충돌이 빚어지기도 했다. 광장에는 중국 공안소 둘, 일본 경찰서 하나, 그리고 제일 큰 중국 군부대가 있었다. 중국 전화국과 우체국도 있었다.

밭에는 기장과 콩이 자라고 있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거대한 바위산들이 하늘을 향해 기괴한 모습으로 우뚝 솟아 있었다. 골짜기 아래 논들은 초록으로 넘실거렸다. 나무가 많지 않은 아담한 동산들이 비옥한 골짜기로 이어진다. 검은 부식토가 두터운 층을 이루고 있어서 독일 농부들이 보면 부러워할 것이다. 이곳은 한국인 이주 지역이다.

마을 위쪽에 자리한 성당은 작고 비좁았다. 성당 앞 외양간에는 말과 러시아산 젖소, 송아지가 있었다. 외양간과 사제관 사이에 부엌이 있는데, 거기에는 한국인 식복사가 상주한다. 세례명이 토마스인데 부지런했지만 건망증이 좀 있었다. 어느 사순절 금요일 오후에 신부가 환자 방문 채비를 하면서 말먹이를 주었는지 물었다. 토마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오늘은 금식하는 날이잖아요. 토마스가 말에게도 온종일 금식을 시킨 것이었다.

아침 6시, 미사 시간을 알리는 기상나팔이 울렸다. 당시 가정집에는 시계가 없었다. 털옷에 모자를 뒤집어쓰고 사람들이 하나둘씩 언덕 위로 올라왔다. 거의 매일같이 창미사가 봉헌되었다. 당시 독일 성당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9시에 다시 나팔 소리가 울린다. 이제 학교에서 아이들을 부르는 소리였다. 남학교와 여학교를 합해서 학생 수가 200명을 넘는다.”

에카르트 신부가 팔도구에 머물고 있던 당시에는 성당에 종이 없어서 나팔을 불어 미사 시간과 학교 수업 시간을 알렸다. 그러다가 1925년에 에카르트 신부의 후임으로 온 차일라이스(Zeileis) 신부가 독일의 오틸리엔 수도원에 주문한 종이 1934년 무렵 도착하였다. 종 두 개가 조양천 기차역에서 실려 왔는데, 소가 끄는 수레로 가져왔다고 한다. 지금도 종 하나는 팔도구 천주교회에 남아 있다. 다른 하나는 연길 천주교회에 기증되었다. 이 종은 미사나 기타 행사를 알리는 데 사용되어 팔도구의 명물로 이름이 높았다. 사방 십리 안에 있는 모든 마을이 팔도구의 종소리를 들으며 하루를 시작하고 또 하루를 끝냈던 것이다.

오늘날의 팔도구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에 중국 지역의 정치적 상황이 급변함에 따라서 1947년 팔도구 천주교회는 폐쇄되었다. 그리고 연길 지역에서 활동하던 독일 선교사들은 연금된 상태로 생활하다가 1952년 본국으로 돌아갔다. 중국 정부는 1970년대 후반 개혁개방 정책을 시행하면서 천주교 신자들의 종교 활동을 허용하였다. 이에 1979년에 중국 천주교 애국회가 활성화되었고, 각지의 성당들도 활동을 재개하였다. 그 결과로 팔도구에는 공소가 설립되었다. 1992년 7월 19일 독일의 성 베네딕도회 오틸리엔 수도원의 지원을 받아서 옛 성당 부지 위쪽 언덕에 성당을 재건축하였다. 이때 신자 윤영복이 문화대혁명 당시 옛 성당이 파괴될 때 숨겨 두었던 제대 성석과 성광, 라틴어 미사경본을 찾아내어 신축 성당에 봉안하였다. 2001년 5월 4일 팔도구 공소는 길림 교구 소속의 팔도구 천주교회로 승격되었다. 2003년 8월 5일에는 ‘팔도구 교우촌 건설 100주년 기념축제’를 거행하였다.

참고문헌
  • 고병철 외, 『간도와 한인 종교』(한국학중앙연구원 문화와 종교 연구소, 2010)
  • 요한네스 마르, 『芬道通史』(분도출판사, 2009)
  •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원산교구 연대기』(함경도 천주교회사 간행사업회, 1991)
  • 한흥렬, 「연길교구 천주교약사」(『가톨릭 청년』 41, 1936)
  • 「팔도구 본당」(『한국 가톨릭 대사전 11』, 한국교회사연구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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