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특별한 이야기

항일 운동의 성지, 치외 법권 지역인 용정의 영국더기

한자 抗日 運動의 聖地, 治外 法權 地域인 龍井의 英國더기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영국더기’란 무엇인가?

8월의 무더운 열기가 영국더기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세월의 무상함일까? 이미 많은 것이 퇴색되어 가고 있었다. 영국더기를 오르는 길에는 전에 없던 비탈길이 가로질러 나 있다. 비탈길 한 켠에 용정시 제4 중학이 자리잡고 있는데, 그 학교의 왼편으로 과거에 은진중학이 있었고, 뒤편으로는 기독교 선교부가 자리 잡고 있었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다만 옛 영광을 아쉬워 하듯 ‘은진중학 구지(恩眞中學旧址)’라고 새겨진 기념비석만이 쓸쓸하게 방문객을 맞아주고 있었다. 이 기념비는 10여 년 전에 용정은진중학 동문회에서 세운 것이다. 많은 세월이 지났지만 이곳 영국더기에 남겨진 근현대 용정 조선인들의 애환의 노래는 여전히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어지고 있다.

국어 사전에서 ‘더기’를 찾아보면 ‘고원의 평평한 땅’을 이르고 있다. 아울러 같은 갈래의 단어들로 ‘자리’, ‘덕판’[평야보다 높은 곳에 있는 평평하고 밋밋한 땅], ‘동산’, ‘나라’가 연결되어 있다. 영국더기는 ‘영국’과 ‘더기’가 합쳐진 합성어이다. 용정 수원지가 자리잡고 있는 동쪽 근교 산비탈 위에 ‘영국더기’라는 작은 언덕배기가 있다. 영국더기는 용정 변두리 지역의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던 용정 안의 ‘작은 영국 땅’, 즉 당시 중국에서 활동하던 어떠한 외부 국가들의 영향이 미치지 못했던 용정의 ‘영국 조계지(英國租界地)’를 의미하고 있다. 조계지는 19세기 후반 영국·미국·일본 등의 외세가 중국을 침략하는 근거지로 삼았던 개항 도시의 외국인 거주지를 말한다. 이곳은 해발 260m 되는 언덕으로 되어 있으며, 면적은 약 26에이커[1에이커-4.469㎡]이다. 조계지 내에서는 그 지역을 차지하고 있는 해당국이 직접 행정권과 경찰권을 행사했다. 한때는 28개소에 이르렀었는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폐지되었다. 당시 이곳은 영국인 외에는 현지인은 물론 타국 외국인들조차 출입이 자유롭지 못했던 그야말로 ‘나라 안의 나라’였다.

영국더기의 역사는 중국 근현대 역사 속의 슬픈 자화상이자 지우고 싶어하는 뼈아픈 역사의 흔적이다. 영국더기는 영국의 힘의 상징이자 제국주의의 상징체이기도 했다. 그런 영국더기가 우리에게 특별하게 다가오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제국주의의 상징 영국더기가 조선인들의 은신처가 되어 또 다른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용정에 ‘영국더기’가 생기게 되었을까?

20세기 초 연변은 원래 러시아의 세력권에 속해 있었다. 즉, 1900년 7월에 8개국 연합군에 속한 러시아는 독일과 프랑스의 지지하에 의화단 사건을 평정한다는 구실로 중국 동북 지역에 출병을 했다. 19∼20세기 초 제국주의 국가들이 전형적으로 썼던 방법이다. 러시아 세력은 출병하여 동북 지역을 강점하고 극동 총독[그로데코프(N.I.Gridekov)[1898~1902]로 하여금 행정·군사·외교 업무를 주관하게 했다.

하지만 러시아의 남진에 불안을 느낀 영국과 만주의 이권을 얻어내려는 일본은 양자 간에 영일 동맹[1902]을 체결했다. 이는 영일 양국이 러시아를 공동의 적으로 간주하고 동아시아의 이권을 분할하려는 목적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후 일제가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였고, 1905년 9월 5일 러·일 간에 포츠머스 강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일제는 미국의 중재 하에 체결된 포츠머스 조약을 배경으로 그 해 조선으로 하여금 을사 늑약을 체결케 하고, 이어 요동 반도를 포함한 장춘 이남 지역을 수중에 넣는 데 성공했다.

한편 러시아는 일본에 밀려 북만주 지역만을 관할하게 되었고, 일본의 동맹국이었던 영국은 앞서 확보한 천진 조계지에 이어 용정 지구에서도 조계지[영국더기]를 확보하며 중국 동북 지역에서의 영향력을 키워나갔다. 참고로 1860년 12월, 영국 주중 공사 브루스(Fredrick Wright Bruce)는 북경 조약 상의 “영국 교민이 통상 항구의 토지와 가옥을 임차할 수 있다.”는 규정에 근거하여 직예 총독 항복(恒福)에게 요청하여 강제적으로 천진에 조계지를 확보한 바 있다. 영국더기는 연변에서 유일한 외국 조계지였는데, 동맹국이었던 일본조차도 마음대로 발을 들여놓지 못하던 영국만의 치외 법권 지역이었다.

영국더기는 간도에서 활동하던 항일 운동가 및 항일 운동의 보호처 역할을 했던 곳이라고 할 수 있다. 그곳은 때로는 항일 인사들의 아지트로, 때로는 그들의 피신처이자 정보를 주고받는 연락처가 되어 주었다. 영국더기 내에서는 여러 조직과 단체들이 종교적 선교·교육·의료 등의 분야에서 활동을 했다. 그러나 이들 조직이나 단체들은 대부분 당시 악명 높은 일제에 대항한 항일 활동에 근본적인 활동의 목표를 두고 있었다. 영국더기 내에는 영국 예속지인 캐나다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 선교부, 기독교 장로교파 교회 소속 동산 교회와 교회당, 캐나다인이 운영했던 제창 병원(濟昌炳院), 윤동주(尹東柱)가 수학했던 은진중학, 성경 학원, 명신 여자 학교와 명신 여자 중학교가 있었다. 또한 그곳에 성경 서원이나 영국 세무사 사택, 동산 유치원 등이 활동을 했다.

영국더기에서 저 멀리 해란강이 내려다 보인다. 도대체 저 영국더기 안에서 100년 전에 무슨 일들이 있었던 것일까?

연변 기독교 선교의 중심, 기독교 선교부

영국 예속지인 캐나다 장로교파 교회[후에 ‘연합 교회’로 불림] 산하 해외 선교부는 1898년에 연변에 선교구를 정하고, 이어 1912년에 용정에 기독교 선교부를 세웠다. 이 선교부는 외국인들의 연변 지구 기독교 선교의 중심 역할을 했다. 기독교 선교부는 처음에 용정가성경 학원 뒷 마당의 한 초가집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1913년에 영국더기에 땅을 매입한 후 북쪽 지점에 주택 두 채와 남향 2층 건물 한 채를 지었다. 2층 건물 선교부는 캐나다풍으로 지어졌는데, 밑에는 지하실이 있었고, 십자가가 걸린 꼭대기는 괴테식으로 만들어 졌다. 1층과 지하실에는 각기 큰 창고, 주방 및 식당, 세수칸과 욕실이 있었고, 2층의 북쪽에는 복도가, 그리고 남쪽에는 거실들이 들어서 있었으며, 그 중간의 한 칸은 선교부 사무실이 있었다. 그곳에서 거처했던 선교사들은 중국인 요리사를 고용하여 음식을 준비했는데, 가루 음식을 즐겨 먹었고, 끼니마다 달걀이나 감자, 콩류 반찬을 먹었으며, 조선인 음식인 장국과 김치도 즐겨 먹었다.

당시 용정에서 활동하던 10여 명의 선교사들은 모두 영국에 예속된 캐나다인들이었다. 캐나다 선교사들은 일찍부터 조선의 원산(元山), 경신(敬信) 등지를 다니며 선교 활동을 해 온 경험상 연변 지구 조선인들의 형편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선교사들은 대부분 종교인이기 이전에 저마다 학위까지 지닌 고등 교육을 받은 지식인들이었다. 그들은 연변에 들어와 교회에서는 목사로, 병원에서는 의사나 병원장으로, 그리고 학교에서는 교원이나 교장으로 1인 다역을 했다. 캐나다토론토(Toronto) 대학 졸업 후 미국뉴욕콜롬비아 대학(Columbia University) 사범 학부의 문학 석사 학위 소지자였던 여자 선교사 프랑시스 반위크가 그 중의 한 명이다. 그녀는 조선과 연변에 파견되어 교육 사업에 종사했다. 의학 박사 출신의 선교사 푸트(W.R. Foote)[부두일(富斗一) ‘부트’, ‘포드’로도 부름] 또한 주목받는 인물 중의 한 명이다. 푸트는 연변에 온 후 ‘부두일(富斗一)’로 개명하고, 산간 오지 마을들을 돌며 의료 선교 활동을 했고, 한때 제창 병원에서 원장직을, 은진중학에서는 교장직을 수행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바커(A.H. Barker)[박걸(朴傑); ‘박걸부’, ‘바클’, ‘베이커’, ‘빠카’로도 부름]과 마딩[마틴(Dr.Stanly Martin), 민산해(民山海)] 선교사를 들 수 있다. 이들은 용정에 오기 전 충분한 훈련과 조선인의 언어와 풍습까지 공부했는데, 바커 선교사는 ‘박걸부’로, 마딩은 민산해(民山海)로 이름을 고치고 조선인 사회에서 선교 활동을 하기도 했다.

조선인들은 이방인 선교사들을 반겨주었을까?

선교사들은 조선인 촌을 방문할 때 언제나 검은 목사복에 모자를 쓰고 다녔다. 그들은 조선어로 번역된 성경과 의약품이 든 가방을 들고 험한 산골이나 산간 벽지의 마을들을 찾아다녔다. 선교사들의 의료 활동은 점차 소문으로 퍼져나가고, 이에 선교사들이 방문하는 날이면 앞다투어 달려나와 서양 사람을 구경하고 의약품들을 얻어가곤 했다. 선교사들은 늘 친절하고 겸손하게 ‘안녕하십니까? 만나서 기쁩니다’라고 인사하며 조선인 마을 사람들의 요구를 들어주었고, 예절을 중시 여기던 조선인들은 선교사들의 그런 태도에 더 호감을 갖고 따랐다고 한다. 심지어 선교사들은 강을 건너거나 밥을 먹은 후에는 반드시 댓가를 지불했고, 술·담배는 입에도 대지 않았다. 그로 인해 마을민 전체가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는 곳도 있었고, 성교촌(聖敎村)이나 구제동(救濟洞) 등의 이름이 붙은 마을들까지 생겨나게 되었다.

캐나다 선교사들은 자신들 또한 영국에 예속되어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조선인들의 반일 감정과 독립 염원을 동정하고 지지해 주었다. 게다가 당시 천주교나 기타 종파들이 단순히 선교 활동에만 열중할뿐, 항일적인 민족 운동에는 중립적인 태도와 방관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던 것에 비해, 캐나다 기독교 선교사들은 일제의 조선인 탄압에 대해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고 조선인들의 민족 운동을 지지했다. 그 결과 이동휘와 같은 저명인사들을 포함, 천주교 교인들조차도 장로교파로 옮겨오기도 했고, 한때 연변 지구 조선인 장로교파 신도수는 5%까지 이르렀다. 본래 연변 지구의 기독교 선교 활동은 1903년에 페레스와 바커 등의 선교사들에 의해 혼춘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 후 1906년에 용정 교회가 세워지면서 각지에 교회가 세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1921년 경 연변에는 교회 63개소에 신도가 6,442명[세례자-1,915명, 30%], 1925년에는 교회 85개소에 신도가 10,277명에 이르렀고, 가장 부흥기였던 1932년 경에는 교회 105개소에 신도는 21,142명에 이르렀다.

캐나다 기독교 선교부의 크리슨(R.Grierson), 바커, 푸트, 스코트(W.A.Scott), 마딩 등의 선교사들은 항일 인사들을 지지하고 돌봐주었다. 그들은 일본 총영사관과 교섭하여 감금된 교원이나 학생들의 석방을 주선했고, 영국 조계지 내에서 진행되는 모든 활동에 대해서 묵인을 해주었다. 또한 독립군 부상자들이나 항일 인사들이 교회 병원에서 무상으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물심 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연변 조선인 항일 운동과 민족 교육의 둥지, 기독교 장로교파 교회들

1925년 경 연변 지구에는 장로교[파], 남감리교, 동아 기독교, 안식일교, 성결교 등 85개 기독교 종교 단체들이 있었다. 이 중 교회와 신도수, 사회적 영향력 면에서 제일 큰 곳은 기독교 선교부 산하 기독교 장로교[파] 교회들이었다. 이러한 배경에는 영국더기 내에 본부를 두고 활동하던 캐나다인 선교사들의 활동 및 간접적인 지원과 깊은 연관이 있다. 캐나다 선교사들은 선교 활동과 교육 사업에 주력하며 조선인들의 항일 운동을 동정하고 지지해 주었다. 그들은 일제가 연변 지구에서 야만적 폭행을 감행할 때마다 현장 사진과 조사서를 본국에 보내어 구미 사회에 일제의 야만적 행위를 폭로했다. 또한 수시로 구미 사회에 조선인들의 항일 정서와 독립운동 상황을 전하거나, 반대로 타국가 지역의 민족 투쟁 상황을 전해줌으로써 조선인의 민족 운동이 국제적인 투쟁과 연계되도록 매개 역할을 해주기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 선교부 산하 기독교 장로교파 교회들의 부흥은 조선인 애국 지사와 항일 운동가들의 활동에서 더 직접적인 요인을 찾을 수가 있다. 그들은 장로교파 교회를 배경으로 민중을 단합시켜 항일 애국 운동으로 승화시키고자 했고, 일부 교육 구국론자들은 장로교파 교회들과 손을 잡고 학교를 세워 인재 양성에 주력해 나갔기 때문이기도 하다. 1906년 8월에 이상설이 장로교파 교회의 박무림(朴茂林), 여준 등과 세운 근대적 교육 기관 서전 서숙이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김학연(金學淵)·남위언(南葦彥)·오병묵(吳秉默) 등 20여 명의 항일 운동가들은 모두 서전 서숙 출신이다. 감리교 신자이면서 상해 임정 초대 국무총리를 지냈던 이동휘도 장로교파 교회와 손을 잡고 항일 운동을 하기도 했다. 그 또한 간도와 극동 지역을 오가며 항일 운동을 했던 인물로, 1911년 2월, 이동휘연변에 와 용정 교회, 와룡 교회, 명동 교회 등, 장로교파 교회들과 연계하여 부흥 대사경회의 개최를 통해 주변의 많은 조선인들을 기독교 입교로 이끌었다.

장로교파 교회들은 종교활동 외에 또 무엇을 했을까?

교회 인사들은 종교 활동과 사회 활동이라는 두 가지 활동을 통해 장로교파 교회들을 부흥시켜 나갔다. 그들은 종교 활동으로서 전도 활동을 통한 교회 세력의 확대, 신도 간의 친목 증진, 단합과 복지, 계몽 운동 등을 수행해 나갔다. 명동촌에서 부흥 대사경회가 개최될 때 200여 명이 모여 조직된 3국 선교회, 기독교 여성회, 기독교 청년회 등이 이에 해당된다. 장로교파 교회들은 또한 외부적인 사회 활동으로서 기독교가 들어간 마을마다 학교를 세우고 신식 교육을 실시하며 항일적인 성격의 애국 계몽 활동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예로, 1912년 9월에 용정 중앙 교회는 용정 교회가 세운 광동 서당을 인수, 영신 학교(永新學校)로 바꾸고 용정에서 처음으로 6년제 신식 교육을 실시해 나갔다.

영국더기기독교 선교부 산하 기독교 장로교파 교회가 수행했던 중요한 사회 활동 중의 하나는 항일 활동 관련 사업들이었다. 1920년 3월, 기독교에 몸을 담고 있던 김약연·구춘선(具春先)·황병길(黃炳吉) 등이 이전에 설립되어 있던 교민회[1907]와 한민회를 합쳐 간도 국민회를 조직했다. 당시 회장은 구춘선이었다. 간도 국민회는 일본 총영사관을 피해 연길(延吉) 국자가(局子街)에 본부를 두었고, 이하 80개 지부를 설치하고 향촌 통신기구로 삼았다. 이때 활동 및 연락 장소는 바로 영국더기 내의 제창 병원 지하실에 있었다. 간도 국민회는 교육 사업 외에 1919년 3·13 반일 시위 운동이나 1920년 1월에 있었던 ‘15만원 탈취 사건’ 등의 항일 활동을 주도해 나갔다. 하지만 1919년 3·13 반일 시위 운동에서의 실패를 교훈으로 간도 국민회 인사들은 무장 투쟁 노선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마진(馬晉)[일명 문호(文鎬)]는 명동촌에 가서 청장년과 명동 중학 고학년 학생들을 중심으로 충렬대(忠烈隊)를 조직했고, 김상호는 암살대를 조직하여 친일파를 제거하고 일본 총영사관과 동척 사무실을 방화하기도 했다. 그밖에도 간도 국민회는 지하 신문인 『자유의 종소리』를 발행하고, 군자금을 모으고 무기를 사들여 1919년 11월에는 충렬대와 암살대를 토대로 하여 국민회군을 창설했다. 1920년 1월에 있었던 15만원 탈취 사건은 바로 간도 국민회의 무장 투쟁 노선 수행 과정에서 발생했던 것이다. 이후 안무 등이 지휘한 국민회군은 보총 450자루와 권총 50여 자루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후 홍범도의 지휘 하에서 1920년 6월에는 봉오동 전투에, 그리고 10월에는 청산리 전투에 참가하여 일본군에 큰 타격을 주기도 했다.

종교 단체들과 항일 인사들에 의해 세워지는 민족 학교들

1920년대 들어 영국더기 내의 외국인 선교사들과 교회 인사들의 교육 활동은 큰 결실을 맺어갔다. 1920년 2월, 캐나다 선교사 푸트는 은진중학을 창립했고, 그해 6월 기에스 여사는 명신 여자 학교를 명신 여자 중학으로 승격시켰으며, 그해 여름에 영국더기에 동산 교회를 설립했다. 그녀는 이듬해 2월 토성보 교회(土城堡敎會)를, 8월에는 일광 학교를 세웠고, 용강동과 합성리에도 교회를 세웠다. 그 이듬해인 1922년 5월에 용정 중앙 교회 목사들인 윤화수(尹和洙)·박례헌(朴禮獻) 등이 용정 중앙 교회당에서 영신 중학 개학식을 인도했고, 1923년 6월에는 영신 여자 중학을 창립했다. 이와 같이 연변에서 영국더기기독교 선교부 산하 장로교파 교회의 세력은 점차 신장되어 갔다. 장로교파 교회들 외에 타종파들도 전도 활동과 더불어 교육 사업에 참여했다. 천도교회는 동흥 중학을 세웠고, 대성 유교의 공교회대성 중학을, 천주 교회는 해성 학교를, 시천교회(侍天敎會)는 동아 학교를 세웠으며, 불교 단체는 성화 학교를 세웠다. 이로 인해 연변의 용정은 학생과 신도가 많기로 유명했고, 그로 인해 ‘간도의 문화 도시’로 대내외에 이름을 알렸다.

그러나 1940년대 들어 부흥기를 맞이해 왔던 장로교파 교회들은 일제와 위만 정부의 강제 병합 정책으로 크게 의미가 퇴색되어 갔다. 1941년 11월, 일제에 의해 기독교 각 종파가 만주 조선인 기독 교회로 강제 통합되었다. 이때부터 장로교파 교회들은 위만 정권을 받들고 일제와 위만 정권의 이용 도구로 변질되어 갔다. 연길 장로교파 교회 신도 김응필은 신사 참배 거부죄로 8년 징역형을 살다가 해방이 되어서야 풀려나기도 했다. 태평양 전쟁 직전 일제와 위만 정권은 외국 선교사들을 강제 추방하고, 교회 지도자급들은 매수했으며, 친일파들을 교회에 심어놓음으로써 교회를 일제의 침략 전쟁에 호응하는 여론 도구와 첩보 기관으로 변질시켰고, 장로교파 교회들은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고 말았다.

용정 조선인 사회와 항일 인사들의 생명의 집, 제창 병원

영국더기 내 캐나다 기독교 선교부는 종교 활동을 자선 활동과 긴밀히 연계하여 수행해 나갔다. 선교사들은 성경책과 약을 항상 지니고 다녔고, 동시에 아픈 자들을 진료해 주었기에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선교사들은 이런 치료 사업을 발전시켜 영국더기 내에 제창 병원을 설립했다.

초기에 캐나다인 의사 육장안은 용정 뒤십자 거리성경 서원 뒤편에 초가집 한 채를 구입하여 전도소 겸 약방으로 만든 후 진료를 했다. 이후 1913년 캐나다 해외 선교부의 결정에 따라 선교사 바커에게 위탁하여 영국더기 산비탈 길옆에 반지하가 딸린 100여 ㎡ 규모의 ‘ㄱ’자형 회색 양옥 건물을 짓고, 건물 동쪽 복도 입구에 붉은 십자가와 한문으로 제창 병원이라는 편액이 달아 두었다. 개업 초기에는 의사 1명과 약제사, 간호원, 서기가 각 1명씩 근무했고, 의료 설비가 빈약해 간단한 진료 정도만 보았다. 하지만 1918년 10월에 좌우가 대칭되는 ‘ㄷ’자형 건물로 확대하며 방사선기와 검사 기기 등의 병원 설비를 늘리고, 내과·외과·산부인과·소아과·전염병과·진찰부를 두었다. 이때 의학 박사 출신의 선교사 마딩이 원장직을 맡았고, 영국인 노은혜 여사가 간호장이 되었으며, 3명의 조선인 간호사와 조선서울세브란스 의학 전과 학교 출신의 이익걸·최관실·정창성 등 5명의 의사가 초빙되어 왔다.

당시 먼저 개업한 혼춘 로씨야 병원과 연길 독일 천주교 병원은 신도들의 병만 진료하고 있었고, 일본인이 세운 용정 자혜 병원과 이후의 도립 병원은 가난한 자의 병은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에 반해 영국더기 안에 있던 제창 병원은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가난하든 부자이든 구별없이 환자들을 받았고, 심지어 돈이 없는 경우에는 돌려보낸 후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갚도록까지 하는 등, 의술이 아닌 인술을 실천하고자 하는 병원이었다. 예로, 제창 병원은 1919년 3·13 반일 시위 운동에서 다친 부상자 20여 명을 인도주의적인 차원에서 무상으로 치료해 주기도 했다.

1920년대 제창 병원의 명성은 주변 각지로 퍼져 나갔다. 그 명성으로 인해 각지에서 외래 환자들이 밀려들자 병원측에서는 병실과 침대수를 늘리며 병원을 확장해 나갔다. 1918년 병원을 확장 한 이후 7년 사이에 제창 병원에서 약 9천여 명이 치료를 받았고, 396명이 입원치료를 받았다. 제창 병원은 또한 영국더기 내에 있는 2개의 남녀 중학교 교원과 학생들의 의료 보건까지 책임졌고, 해마다 봄과 가을에는 신체 검사를 통해 교원과 학생들의 건강을 살피기도 했다. 제창 병원은 존속한 30년 동안 수많은 병자들을 치료하고 훌륭한 의사들을 많이 배출해 내었다. 임병호·이옥룡·마춘산·박정극·김경호·주의권·구정서·임윤정 등이 바로 1세대 배출 의사들이다. 병원 시작 초기에는 육장안이 원장직을 맡았으나 1918년부터는 줄곧 마딩이 수행해 왔다.

그러나 위만 통치기에 점차 쇠락의 길을 걸어오던 제창 병원은 1940년에 이르러 정세의 급격한 변화로 캐나다 선교사들이 모두 용정을 철수하게 되며 상황 변화를 맞게 되었다. 그 후 병원은 부기원이었던 허상훈 장로가 넘겨받아 1943년까지 운영해 나갔다.

영국더기에 남겨진 윤동주와 송몽규(宋夢奎)의 발자취, 은진중학

간도의 조선인들은 밥은 굶더라도 자식을 가르쳤다. 밥을 빌어 먹을 지언정 자식들을 공부시키려 한 것은 조선 사람들의 전통적인 관념 때문이었다. 조선인들은 의·식·주 등 생계와 관련된 절박한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며 우선적으로 자녀 교육 문제에 관심을 쏟았다. 이는 타 지역의 한민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인들의 그런 정신적 가치를 잘 알고 있던 캐나다 선교사들은 자선 사업의 중심을 학교 교육에 두었다.

1913년, 바커 선교사는 캐나다 연합 교회 해외 선교부의 파견으로 용정에 온 후, 용정 뒤 십자 거리에 2층 목조 건물을 매입하여 성경 서원을 꾸리고, 그곳에서 성경과 교리를 가르쳤다. 이후 1917년 7월에 바커 선교사는 앞서 용정 예수교회가 운영했던 학교를 넘겨받아 전일제 성경 학원으로 고치고, 성경 학원 2층에서 성경 학습을 위주로 한 계몽 교육을 진행해 나갔다. 같은 해 바커의 아내 레베카는 용정 교회에서 운영하다 중단된 상정 여교를 넘겨받아 명신 여자 학교로 개칭했고, 그 후 1920년 6월에 이 학교는 카스에 의해 명신 여자 중학으로 승격되었다.

한편 1920년 2월, 용정 지구에 중등 교육 기관이 없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 푸트[포드] 선교사가 캐나다 해외 선교부의 비준을 얻어 성경 학원을 교사로 삼고 은진중학을 창립했다. 학생들의 대부분은 30세 전후의 청장년들이었고, 그 중에는 독립군 전사들도 있었다고 한다. 이듬해 봄에 영국더기에 600㎡ 규모의 3층 푸른 기와집이 건축되었다. 이에 교원과 학생들이 영국더기 내의 새 학교 건물로 옮겨오게 되었고, 이때부터 영국더기에서 은진중학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 해 안식년으로 물러난 푸트에 이어 교육 사업 경험이 많은 스코트 목사가 교장으로 위임되었는데, 그는 서울연희 전문 학교와 평양숭실 전문 학교로부터 5명의 졸업생들을 청빙해 왔다. 이에 은진 학교의 기틀이 더 잡혀지게 되면서 학생 수도 3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은진중학이 영국더기에서 새 삶을 시작하면서 일부 진보적인 교원과 학생들은 공개적으로 반일 사상과 민족 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민족 운동의 대부였던 조만식(曺晩植) 선생과 여운형(呂運亨) 선생이 용정에 와 은진중학에서 연설을 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 학교 교직원 및 학생들, 그리고 주변의 많은 사회 인사들이 와서 그들의 뭉클한 연설을 듣기도 했다. 또한 일본교토 제국 대학 역사학부를 졸업생 출신의 평양명희조(明羲朝) 선생도 한때 은진중학에서 교편을 잡은 적이 있었는데, 명희조는 그 누구보다도 민족 의식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는 역사 과목을 홀시하는 학생들을 보면, ‘민족 기개를 잃어버리는 것은 나라가 망한 고통보다 더 슬픈 일이다’라고 말하며 역사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곤 했다.

1920년 3월에 3·1 운동 1주년 기념 대회를 준비하던 교원 2명과 학생 27명이 일본 총영사관 소속 일경들에 의해 불시에 체포되어 간 적이 있었다. 이때 푸트 교장이 일본 총영사관에 즉시 달려가 영사에게 직접 항의하고 교섭 끝에 체포자 전원을 당일 밤에 빼내오기도 했다. 1920년대 중반부터 30년대까지 국치일인 8월 29일과 단군절[개천절]인 음력 10월 1일이면 은진중학 전체 학생들과 교원들은 3층 예배당에 모여 기념 활동을 거행하곤 했다. 이때 선교사들도 학생들 사이에 앉아 격정에 찬 연설을 들었고, 마음에 격동이 일 때에는 박수갈채를 보내곤 했다고 한다.

1920년대 초기에 연변에 마르크스 레닌 사상이 들어오면서 한때 은진중학에서도 반종교 투쟁 움직임이 일었다. 이로 인해서 기독교를 믿지 않는 장기주·김창걸 등 150여 명의 학생들이 한 달 남짓 동맹 휴학을 했다. 그들은 ‘우리는 천당으로 가지 않겠다’고 선언 한 후 1927년 4월에 퇴학하고 대성 중학, 동흥 중학으로 옮겨가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은진중학은 26년 간 존속하면서 목사·학자·혁명가와 사회 저명인사들을 포함, 총 983명의 졸업생들을 배출해 내었다. 1930~1940년대 한국 근대 문학사에서 항일 시인으로 이름을 날린 윤동주가 영국더기은진중학에서 민족 의식과 문학 세계를 열어 갔고, 사촌형 송몽규 역시 같은 학교에서 같은 길을 걸었다. 당시 이들에게 영향을 많이 미친 인물이 바로 역사 교사 명희조 선생이었다. 그밖에도 중국 공산당 연길현 위원회 제1대 서기와 중국 공산당 동만 특별 위원회[약칭 동만특위] 조직부장을 지냈던 김성도(金聖道), 그리고 조선 의용군 포병 사령관 참모직 등을 맡으며, 조선 의용군에서 활동했던 김덕근·이익성 등 모두 은진중학이 배출한 인물들이다.

영국더기를 떠나는 캐나다 장로교파 선교사들

1937년. 1937년이라는 숫자는 중국이나 극동 지역의 한민족들에게는 기쁨보다는 악몽같은 기억을 던져주고 있다. 중일 전쟁 중국 여타의 민족과 조선인 사회에 대한 일제의 지배욕은 강화되었다. 1937년 12월 1일, 영국더기 내의 은진중학은 만주국 교육부의 지령에 따라 공과 학교로 개칭되었고, 프레스 교장에 이어 조선인 박종열이 교장직을 물려 받았으나 얼마 안있어 일본인 히다카 헤이지로[日高丙子郞]가 교장직을 맡으며 일제의 수중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또 영국더기 내에 있던 명신 여자 학교의 소학부가 폐교되어 학생들은 시내의 각 소학교에 흩어졌고, 중학부는 광명 여자 중학과 합쳐져 용정 여자 국민고등학교가 되었는데, 이때 교장은 간악한 일본인 히라다였다. 그렇게 캐나다 선교사들이 열었던 자선 교육 기관들은 하나 둘씩 일제의 수중에 넘어가고 말았다.

그런 가운데 일제의 압력으로 영국더기 내의 캐나다 선교사들은 영국 대사관으로부터 “즉시 현지를 떠나라”는 통보를 받게 되었다. 선교사들은 선교부 소속 자산 처리 위원회를 구성하고 간도성 관변측과 교회 재산 처리 문제를 두고 논의를 했다. 하지만 일제는 배후에서 모의하여 최철산과 같은 무지한 학생들을 동원해 선교부 앞에서 “영국인, 캐나다인들은 즉시 무조건 물러가라”는 시위를 하게 함으로써 캐나다 선교사들은 곧바로 철수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사후 처리는 용정 장로교파 교회의 조선인 목회자들에게 맡겨졌는데, 선교부는 문재란 목사에게, 두 남녀 중학교는 명신 여자 중학의 김두식 교장에게, 제창 병원은 동산 교회의 허상훈 장로에게 맡겨졌다. 캐나다 선교사들을 영국더기에서 쫓아낸 후 일제는 관동군 진구 츠카사 부대를 동원해 영국더기에 들어가 십자가를 뜯어 버린 후 선교부 전체를 점령했다. 학생들은 쫓겨나 합성리(合成里) 영림서로 옮겨갔고, 제창 병원은 일본군의 의무부로 변했으며, 동산 교회당은 일본군의 취사실로 변해버렸다. 이후 영국더기는 일제에 의해 완전히 일본 ‘군부더기’로 변모되었고, 일제가 물러날 때까지 아무도 그곳에 발을 들여 놓지 못했다.

선교사들이 떠난 이후 영국더기는 어떻게 되었을까?

해방 후 영국더기는 다시 중국인들의 품으로 돌아왔다. 해방 이후부터 1950년대 초반에 영국더기에는 영예 군인 학교나 영예 군인 속성 중학 등이 세워져 활동을 했다. 그 후 영국더기는 길림성 민정청(吉林省民政廳)의 사회 복지 기지가 되어 그곳에 사회 교양원이 세워지고, 그 산하에 노인 장애자원, 고아 학교, 농아 학교, 공독 학교 등이 설치되었다. 현재 영국더기에는 많은 민간 주택들이 들어서 있다. 과거의 아픈 역사를 망각하고 있듯 영국더기에는 평온만이 감돌고 있다. 이제 서슬퍼렇게 날뛰던 일제도 없다. 영국더기는 다시 주민들의 공간인 ‘주택더기’가 되었고, 조용히 역사의 산증인으로 그곳을 찾는 이들에게 교훈이 되어주고 있다. 영국더기는 모든 곳이 일제의 감시와 탄압으로 숨 막히던 시기, 항일 의식과 민족 교육의 길을 열어주었던 산소와 같은 역할을 했던 곳이며, 항일 운동의 든든한 울타리였다.

참고문헌
  • 백민성, 『유서깊은 명동촌』(연변인민출판사, 2001)
  • 전광하·박용일, 『세월속의 용정』(연변인민출판사, 2002)
  • 연변조선족자치주 위원회 문사 자료 위원회, 『연변 문사 자료 휘집』1(연변인민출판사, 2007)
  • 연변조선족자치주 위원회 문사 자료 위원회, 『연변 문사 자료 휘집』2(연변인민출판사, 2008)
  • 김춘선, 김철수, 『중국 조선족 통사』상(연변인민출판사, 2009)
  • 김춘선, 김철수, 『중국조선족통사』중(연변인민출판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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