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특별한 이야기

연변 여성의 이주 현상

한자 延邊 女性의 移住 現象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시  
시대 현대/현대
조선족 여성, 해외로 나가다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한국과 중국의 왕래가 자유로워짐에 따라 연변의 많은 조선족들이 한국으로 진출하였다. 한국으로 가서 돈을 많이 벌어 돌아오면 잘 살 수 있다는 ‘코리안 드림’은 이 시기 조선족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한국이 언어와 관습이 비슷한 고국이라는 점, 조선족 사회보다 여러 부분에 있어 선진적이라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 일이었다. 당시 한국으로 진출할 수 있는 대표적인 방법으로는 근로 연수와 국제결혼이 있었다. 모든 면에서 연변보다 우월한 조건을 갖춘 한국으로 가는 것은 많은 조선족 여성들의 꿈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꿈을 이룰 수 있는 방법으로 국제결혼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한국 내 결혼 이민자 가운데 대부분은 조선족 여성이다. 조선족 여성과의 국제결혼 비율이 높은 것은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데서 오는 이점이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선족 여성들의 이주[한국 외]는 조선족 사회에 있어 남녀 성비의 불균형을 초래하였다. 조선족 여성의 한국 취업과 국제결혼은 조선족 농촌 총각의 결혼 문제, 더 나아가서 인구 감소의 심각한 문제로도 이어지고 있다.

국제결혼의 베일에 가려진 ‘코리안 드림’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주도(州都)인 연길의 거리에는 곳곳에 ‘한국’의 흔적이 보인다. 한글로 된 대형 간판이 빼곡히 들어찬 이곳에 들어서면 마치 한국 땅을 밟고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이다. 한국 상품만 전문으로 취급하는 백화점은 물론이고 거리의 난전에서도 너도 나도 한국 물건을 외치면서 손님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한국의 패션 스타일을 선호하는 조선족 젊은이들의 모습과 최신 K-POP이 흘러나오는 카페의 풍경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연길 곳곳에서 한국 상품의 광고 전단지와 만나는 일은 이제 익숙하다.이처럼 겉으로 보기에 연변은 한국과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정말 조선족과 한국인 사이가 가까워졌을까?

한중 수교 이후 많은 연변의 조선족들이 한국으로 진출하였다. 특히 앞서 말한 대로 조선족 여성의 수가 많았다. 그러나 ‘코리안 드림’의 흥행 초기, 한국에 가는 것은 복잡한 절차와 더불어 많은 비용을 들여야만 했다. 많은 조선족들이 처음에는 고액의 수수료를 내고 브로커를 통하여 한국으로 입국하였으나 점차 돈을 적게 들이고 수월하게 한국으로 가는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방법 가운데 하나가 한국인과 결혼하는 것, 즉 국제결혼을 통하여 한국 땅을 밟는 것이었다. 딸을 한국으로 시집보내고, 한국인과 결혼하여 한국 국적을 취득한 딸이 양친 부모를 한국으로 초청하는 손쉬운 ‘한국행’의 방법이 생겨난 것이다. 초기의 국제결혼은 비록 그 목적을 한국 진출에 두었지만 결코 도덕적으로 어긋나지 않았고 사회적으로도 큰 물의를 일으키지 않았다.

하지만 ‘코리안 드림’이란 황금만능 사상이 팽배함에 따라 국제결혼은 본격적으로 상품화되었고 ‘사랑’이란 명목 아래 ‘위장 결혼’도 거침없이 행해지기 시작하였다. 이미 이혼한 조선족 여성은 물론이고 조선족 부부 사이에서도 작은 마찰만 생겨도 바로 이혼하고는 한국인과 국제결혼을 해서 코리안 드림의 실현에 나서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심지어는 멀쩡하게 잘 살고 있던 부부가 한국으로 가기 위해 가짜로 이혼하고 한국행에 가세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런 배경의 직접적인 원인은 한국인과 결혼하면 한국행이 쉽고 출국 비용이 상대적으로 적게 들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경제적으로 부유한 삶을 추구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부와 행복 사이에서, 위기의 조선족 사회

조선족은 개혁개방 전인 1970년대 말까지만 하더라도 전통적인 유교 사상과 금욕 사상이 뿌리 깊게 자리 잡은 민족이었다. 조선족 여성의 결혼관은 매우 보수적이었다. 그리하여 조선족 사회는 중국 내의 타민족에 비해 가장 안정적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특히 조선족 여성들은 순결하다는 호평이 자자했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은 개혁개방 이후, 특히 1992년 한중 수교 이후부터 급격한 변화를 맞았다.

오늘날 연길의 거리 곳곳에는 ‘한국 취업’, ‘국제결혼 대행’에 관한 전단지를 쉽게볼 수 있다. 심지어 ‘국제결혼 사무소’라는 간판을 버젓이 내건 출입국 대행업체들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이처럼 중국 조선족 사회에서 ‘코리안 드림’ 열풍은 여전히 식을 줄을 모른다. 한중 수교 이후 한국을 다녀간 조선족은 아주 많은데 이들 중 상당수가 연변 출신이다. 급격한 인구 유출은 연변 조선족들에게 물질적 풍요로움을 안겨준 대신 적잖은 사회 문제를 야기시켰다. 조선족 사회의 시골 풍경은 쓸쓸하고 황폐하기만 하다. 주인 없는 폐가가 하나 둘씩 늘어나고 조선족 마을에 한족들이 입주하기 시작하면서 예전의 전통들이 자취를 감추기 시작하였다.

더욱 심각한 것은 조선족 남성들의 혼인 문제가 현실적인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는 점이다. 많은 조선족 여성들의 이주로 말미암아 가정을 이루지 못하는 조선족 남성의 수가 늘고 있다. 결혼 적령기의 조선족 여성은 한국으로 시집을 가거나 근교 도시로 진출하고 있어 조선족 남녀 성비의 불균형을 초래하였다. 이에 따른 여파로 조선족 인구수의 감소도 이제 더 이상 회피할 수 없는 문제로 다가와 있다. 연변 지역의 조선족 초등학교의 학생 수는 예전에 비해 그 수가 현저하게 줄었으며 심지어 시골에서는 폐교된 학교도 부지기수이다.

조선족 사회는 ‘코리안 드림’의 후유증으로 심각한 몸살을 앓고 있다. ‘코리안 드림’은 가족 해체의 근본 원인이 되기도 하다. 연길에서는 해마다 많은 부부가 이혼하고 있으며 그 주된 원인은 ‘한국 방문’으로 인한 부부의 장기간 이별이다. 이혼율이 급증하면서 결혼에 대한 윤리관이 크게 변했으며 타민족과의 통혼으로 인해 다문화 가정도 크게 늘고 있다. 가정이 파탄되고 한 부모 가정이 많아지면서 부모와 헤어진 조선족 자녀들이 비행 청소년으로 전락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는 아이들이 안정된 생활 환경과 학습 환경을 상실하고 양호한 가정 교육을 받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조선족 사회는 옛날부터 도덕적인 결혼관을 고수해 왔다. 혼인에 있어서도 자민족끼리의 통혼만을 고집하며 타민족과의 혼인을 허락하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오늘날 이러한 전통은 이미 깨진 지 오래이다. 국제결혼으로 인한 조선족 사회의 남녀 성비 불균형 문제와 인구 감소의 문제는 나날이 심각해지고 있으며 위기에 직면해 있다. ‘코리안 드림’의 실현으로 전반적인 조선족 사회가 경제적인 면에서 부유해졌다고 하지만, 그에 따라 행복지수도 과연 높아졌을까?

중국 조선족 어디로 가야 하는가? 민족 정체성의 위기와 희망

현재 조선족이 가장 많이 거주하고 있는 연변은 인구 유동으로 인해 심각한 몸살을 앓고 있다. 도시화 과정과 해외 출국으로 인해 대부분의 조선족들이 중국의 연해 지역, 그리고 한국, 일본, 미국 등지로 떠나 그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거주하고 있다. 현재 중국 조선족은 해체의 위기를 맞고 있다. 외국 국적을 취득하고 외국 국민으로 귀화한 사람, 조선족이지만 생활 환경의 변화로 인해 중국 문화에 동화되어 버린 사람, 여전히 중국 조선족의 일원으로 살고자 노력하며 정체성을 지켜가고 있는 사람 등 조선족은 서서히 분화되어 가고 있다. 조선족은 코리안 드림으로 경제적인 실익은 얻었지만 정신적으로 혼란을 겪고 있다.

하지만 길게 보았을 때 연변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의 인구 이동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또한 인구 이동으로 조선족 사회의 전망을 말하는 것은 섣부른 판단이다. 현재 상황에서는 조선족이 어디로 이동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이들이 어디를 가든지 조선족이라는 정체성을 지킬 수 있느냐가 화두라 할 것이다. 어디로 가든지 동화되지 않고 고유의 전통과 문화를 보존할 수만 있다면 조선족 사회의 뿌리는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중국 조선족 사회는 이처럼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지만 그 전망이 암울한 것만은 아니다. 중국 조선족으로서의 정체성을 보존해가려는 의지와 신념을 가진 사람들, 이를테면 지성인, 학자, 교수, 민족 간부, 기업인 등과 같은 사람들이 아직도 남아 조선족 사회를 고수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에서 돈을 벌어 귀국하여 조선족으로 살려는 재한 조선족과 학업을 마치고 다시 돌아와 조선족 사회에서 꿈을 펼치려는 조선족 유학생들도 많다. 도시화 과정에서 많이 이동한 중국의 연해 지역과 대도시들에는 이미 민족의 전통 문화와 언어를 보존하고자 조선족 학교의 창립에 나선 개인과 단체들도 늘고 있다. 중국에 있는 조선족 학교를 전적으로 후원해주는 한국의 재단과 기업들도 점점 늘어가고 있는 추세이다.

조선족 사회 내부에서도 이미 조선족 자체의 문제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반성과 성찰을 거듭하는 동시에 적극적인 방안을 토의하고 있다. 교육면에서 볼 때 비록 예전보다 학생 수는 감소되었고 학교의 수도 적어졌지만 더욱 집중적이고 높은 교육의 질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연변보다 발전이 빠른 중국의 연해 도시와 중국보다 발전이 빠른 선진국에 다녀온 경험을 바탕으로 조선족 사회 구성원의 전반적인 자질도 높아졌다. 문화 수준도 보편적으로 상승하는 추세이다.

한때 중국 조선족 사회는 ‘코리안 드림’에 의한 국제결혼의 흥행으로 말미암아 남녀 비례의 불균형과 인구 감소라는 심각한 위기를 가져왔고 그 폐해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곧 조선족 사회의 해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전반적으로 조선족 사회의 수준이 향상되었고 자신이 몸담고 있는 조선족 공동체를 지켜가려는 개개인의 의식도 고양되었다. 사회는 발전하고 그에 따라 개인의 의식도 변한다. ‘코리안 드림’이 조선족 사회 전체에 끼친 영향은 결코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라고 할 것이다. 멀지 않아 조선족 사회는 자기 성찰과 경험을 토대로 더욱 번영하는 공동체로 거듭날 것이다.

반성과 성찰을 통한 뿌리 되찾기

아직도 식을 줄 모르는 코리안 드림은 중국 조선족에게 희비와 명암이 엇갈리는 결과를 끊임없이 가져다주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 조선족 사회는 한번쯤 자기반성을 해볼 필요가 있다. 농촌은 피폐해졌고 출생률은 낮아졌으며 도덕성은 떨어졌다. 코리안 드림으로 경제적인 실익은 챙겼지만 이로 인해 심한 정체성의 혼란이 찾아 온 것도 사실이다. 황금만능의 사상이 팽배하는 현재, 도덕성은 서서히 자취를 감추고 있고 조선족 사회는 뿌리가 흔들리는 위기를 겪고 있다. 그러나 지금 조선족 사회는 정체성을 되찾기 위한 노력과 끊임없는 자기 성찰을 거듭하고 있고 조선족만의 문화 공동체 보존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한 세기 이전 이 땅에 조선족의 조상들이 억척스레 뿌리내렸던 것처럼 언젠가는 후손들이 다시 돌아와 더욱 단단하게 이 땅에 뿌리를 내릴 것이다.

참고문헌
  • 리혜선, 「한국 국제결혼의 삶에 대한 현장」(『코리안 드림』, 요령민족출판사, 2001)
  • 박창욱, 「조선족 공동체의 력사, 현황과 전망」(중국 조선족 문화 통신, 2003. 12. 11)
  • 전신자, 「中国朝鲜族女性涉外婚姻研究」(중앙 민족 대학, 2006)
  • 「중국 조선족 어디로 가야하나」(『연합 뉴스』, 2007. 8. 28)
  • 「˂조선족 1프로 시대˃ 흔들리는 연변조선족자치주」(『연합 뉴스』, 2011. 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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