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특별한 이야기

조선족이 배출한 최고의 정상급 장군 조남기

한자 朝鮮族이 倍出한 最高의 頂上級 將軍 趙南起
분야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시대 근대/근대|현대/현대
최고의 조선족 출신 장군, 조남기

조남기(趙南起)는 전 중국 인민 정치 협상 회의 전국 위원회 부주석[부총리급]이며 전임 중국 인민해방군 총후근부(總後勤部) 부장[상장]으로서 한인[조선족]이 배출한 최고의 장군이다. 그는 한인[조선족] 역사에서는 물론 중국 역사 전반에도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그의 발자국은 중국 대지의 방방곡곡에 남겨져 있으며 그의 일생은 민족의 생존과 발전을 위해 분투한 인생이었다. 그는 사업을 위하여 몸과 마음 모두를 바쳤으며 정협 부주석으로서 나라와 민중, 더 나아가서 한인[조선족]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어린 조남기의 남다른 애국심과 타고난 조직력

조남기는 1927년 충청북도 청원군 강내면에서 독립운동가의 손자로 태어났다. 조남기의 조부와 부친은 길림, 북한 등지에서 반일 봉기를 조직하였는데, 이는 조남기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 주었다.

조남기가 8살 때, 그의 부친은 그를 서당에 보냈다. 하지만 일본 제국주의의 통치 아래에 있던 당시 조선에서는 일본어로 성을 고치지 않으면 학교에 입학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조부는 조남기에게 일본 이름을 지어 학교에 보내면서 당부했다. “성을 고친다는 것은 글자만 바뀌는 것뿐이고 너는 언제까지나 조씨 집안의 사람이다. 우리나라는 일본인들에게 점령당했지만 우리 민족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

조부의 의미심장한 말은 오래도록 어린 조남기의 머릿 속에 각인되었다. 그는 비록 어렸지만 애국심 하나만은 투철했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매일 방과 후 일본 국가를 부르도록 했는데, 조남기는 자리에 선 채 절대로 입을 열지 않았다.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고 고향의 살림이 어려워지면서 조남기의 가족은 1940년 초, 희망의 땅인 만주로 건너가 백두산 자락인 길림성(吉林省) 영길현(永吉縣)에 정착했다. 청년 시절, 그는 가게 점원으로 일하였지만 일제의 압박 아래 늘 가난한 생활을 벗어나기 어려웠다.

18살이 되던 해, 조남기는 ‘길림 민족 해방 동맹’에 참가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야 한다는 사상의 영향을 받고 100여 명의 청년을 모아 자위대를 구성하고 각 마을의 치안을 유지하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1945년 11월, 동북 인민자치군은 조남기가 거주하고 있는 지역에 주둔하였는데, 근거지가 없어 식량 문제가 시급한 문제로 제기되었다. 조남기는 이에 자위대를 동원하여 '친인(親人)을 맞이하여 양식(糧食)을 바쳐 마음을 전하는' 활동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한인[조선족] 백성을 동원하여 쌀을 헌납하기로 하였다. 그의 노력으로 동북 인민 자치군의 여러 공작대가 해결하지 못한 쌀이 12.5㎏나 마련되었다. 이와 같은 조남기의 뛰어난 조직력은 동북 인민자치군 부 총사령이자, 길림성 인민 정부 주석인 주보중(周保中) 장군의 극찬을 받았다. 결국 주보중 장군의 추천으로 조남기는 동북 항일 군정 대학에 들어가게 되었다.

끊임없는 노력과 탐구의 일생

조남기는 매사에 진취적이고 열정적으로 임했다. 그는 동북 항일 군정 대학에 가서 공부할 기회를 얻었지만, 중국어를 하나도 모르는 상태였고 한인[조선족] 부대에 가서 중국어를 처음부터 배워야 했다. 당시 동북 항일 군정 대학에서의 생활은 매우 어려웠는데 학생들이 쓰는 생활 필수품은 수량이 제한되어 있었으며 공급이 끊길 때도 많았다. 조남기는 중국어를 공부하기 위해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땅을 공책 삼아 글쓰기 연습을 했고 기초 발음을 익힌 후에는 기회만 생기면 중국인들과 대화를 시도했다. 3개월 뒤 조남기는 기본적으로 중국어로 선생님 및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고 중국인에 버금가는 중국어 실력을 키웠다. 동북 군정 대학을 반년 앞당겨 졸업한 그는 연변 토지 개혁 공작대의 구성원이 되었고 후에 길림성 정책 연구실 연구원으로 승진하였다. 5년 간의 짧은 기간 동안 그는 세상일을 전혀 모르던 청년에서 간부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조남기는 수많은 정치적 업적을 이룩하였으며 민족과 국가를 위해 일생을 바쳤다.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그는 중국 인민지원군 사령부 작전처 참모로 북한에 파견되어 조선과 중국 고위관계자들의 회담 시 통역을 하거나 사령부가 발령하는 작전 명령서를 일선부대에 직접 하달하는 일을 맡았다. 그는 고위 간부 회의 때 팽덕회(彭德懷)의 통역 업무를 담당하였고 평소에는 물자 조달 운송을 담당하여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일을 하였다.

1964년, 전국적인 농촌 ‘사회주의 사상 교육’ 운동이 시작되자 조남기는 북한·중국·소련 3국의 접경 지대인 혼춘현[오늘의 혼춘시(琿春市)] 경신(敬信)공사로 가서 공작대 대장 겸 당서기를 하게 되었다. 그는 촌민이 쌀밥을 먹지 못하고 돌피밥을, 그것도 손님이 와야 먹게 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는 경신 지역이 물이 많고, 땅이 기름지지만, 지하수의 수위가 높아 벼 농사에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경신에서는 벼 농사가 쉽지 않은데 반해, 강 건너 지역에서는 벼 농사가 잘 되고 있음을 주의 깊게 살펴본 그는 문제가 상류 지역에 있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그길로 성에 가서 전문가들을 찾아 해결 방법을 논의했고, 두만강 연안 지역, 특히 하류에서 벼 농사를 지을 수 없었던 문제를 해결하였다.

조남기, 그의 빛나는 리더십

1966년 문화 대혁명이 시작되면서 연변에도 그 불똥이 튀었다. 조남기는 당시 연변 군분구의 정치 위원이었다. 처음에는 문화 혁명에 대해 호감을 가졌던 그였으나, 지나친 무질서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입장을 내세우게 되면서 정치적인 박해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1976년 ‘4인방(四人幇)’이 숙청된 후 조남기는 다시 활동하게 되었고, 이듬해 길림성 군구의 정치부 주임, 중공 연변조선족자치주 위원회 제1서기 겸 혁명위원회 주임[연변 조선족 자치주 주장에 해당됨], 그리고 길림성 성위 서기와 길림 군분구 정치 위원을 지냈다. 연변으로 돌아온 후 그는 자신의 올곧은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하였고, 잘못 처리된 사건들을 모두 찾아내어 3만 여건을 취소시켰다.

1979년 조남기는 전국인민대표대회 민족사무위원회 부주임이 되면서 더욱 적극적으로 민족 지구의 입법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는 또한 농촌의 ‘사회주의 사상 교육’ 활동과 연변 민병 공작에서 뚜렷한 성과를 거두어 인정을 받아 점차 군분구(軍分區) 정치부 주임(政治部主任), 부정위(副政委), 제이정위(第二政委)를 역임하게 되었다. 연변조선족자치주 당위 서기(書記)를 맡았던 시기, 그의 주도하에 중국 민족 자치 구역의 첫 법규가 출범하였고, 그가 길림성 성위 서기를 역임할 때에는 전국에서 곡식 산출량, 상품 곡식 제공량, 인당 양식 점유율, 투입과 산출 비율이 가장 높게 나타나기도 하였다. 이러한 조남기의 업적은 점차 알려져 후에 중국 인민해방군 총후근부의 고위직을 맡게 되는 데 밑바탕이 되었다.

1985년부터 조남기는 인민해방군 총후근부 부부장과 부장을 역임하였는데, 그 동안 그는 부대 후근 보장 체계를 효과적으로 개혁하여 후근 사업의 새로운 국면을 열었다. 그가 총후근 부부장으로 지낸 7년은 중국 인민해방군 후근 사업이 많이 발전한 7년이었다. 그의 지도하에 여러 기업이 크게 성장하였고, 후근 사업은 크게 변모하여, 대총관(大總管), 홍총관(紅總管), 호총관(好總管) 등 칭호를 받았다. 또한 조남기가 총후근부를 떠날 때에는 부임할 당시 제기했던 부대의 물 문제, 목욕 문제, 병 문제, 고발 문제 등 이른바 '사난(四難)' 문제가 대부분 해결되었으며, 신강, 티베트 주둔 부대의 생활 필수품 자체 공급 체계도 구축되어 효율성이 극대화되었다.

조남기는 1988년 중국 인민군에서 17명밖에 되지 않는 최고 계급인 상장으로 진급하였다. 그리고 1992년 10월 중국 인민해방군 군사과학원 원장으로 부임하였으며 1998년 2월에는 국가 원로 예우를 받은 전국 인민 정치 협상 회의 부주석에 선출되었다.

민족의 별, 조선족의 영원한 자랑

중국 한인[조선족] 사회에서는 물론이거니와 중국에서도 조남기 장군은 유명 인사이다. 조남기는 중국 한인[조선족] 사회에서 영웅으로 받아들여지는 인물이며 한인[조선족] 중 중국 정계에서 최고위직에 오른 인물이다. 중국 인민해방군 후근 사업과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발전에 있어 조남기의 공헌은 매우 크다. 조남기는 나라와 민족의 사업에 혼신을 다했으며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다. 조남기는 한인[조선족] 사회의 발전을 위해 뛰어난 공헌을 하였는 바, 연변의 정치, 경제는 물론 과학기술, 교육, 문화와 체육, 신문 출판 방송 사업의 발전을 위해 매우 큰 기여를 하였다.

조남기는 지방에서나 군대에서나 일상 생활 속의 사소한 일을 매우 중요시하였고, 자신에게 엄격하였으며, 공무에 충실했고 청렴결백하였다. 사업에서는 착실하고 세밀하며, 어느 위치에서나 모두 임무를 착실하게 수행해냈다. 이는 조남기가 계속해서 진급을 할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1987년은 조남기의 인생에 있어 또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그해 10월에 열린 중국 공산당 제 13기 전국 대표 대회를 계기로 대대적인 군부 인사 변동이 단행되었는데, 1988년 4월, 그는 여러 난관을 이기고 중국공산당 중앙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당선되었으며 9월 14일 중국 인민해방군 상장으로 승진되었다. 당시 17명 상장 가운데 유일하게 소수 민족 출신이었다. 조남기는 1992년부터 1995년까지 중국 인민해방군 군사과학원 원장을 맡았으며, 1998년부터 2003년 3월까지 중국 인민 정치 협상 회의 부주석을 맡았다. 또한 중공 중앙 위원회 제12기, 제13기, 제14기 위원이자 제5기 전국인민대표대회 민족위원회 부주임 위원으로 활약 후, 2003년 3월 공직에서 은퇴했다.

조남기는 1995년 7월, 50년 간의 군인 생활을 끝마쳤다. 군사 학원에서 진행된 전원대회에서 전체 간부들은 그칠 줄 모르는 박수 갈채로 그에게 경의를 표시하였다. 그는 웃음을 머금고 작별인사를 하였고, 그의 연설이 끝나자 장내에는 또다시 우뢰와 같은 박수소리가 터졌다. 이 갈채에는 조남기에 대한 전체 장병들의 두터운 애정이 깃들어 있었다.

한편 오랫동안 ‘중국 녹색 사업’에 관심을 갖고 ‘삼림 관심’ 운동을 최초로 일으켰던 그는 2009년 녹색(綠色) 중국 초점 인물 연도 대상(年度大賞)을 받기도 하였다.

2000년 4월 중국 전국 인민 정치 협상 회의 부주석인 조남기는 중국 전국 인민 정치 협상 회의 대표단을 거느리고 한국을 방문하였는데 한국 측에서는 최고의 예의를 갖추어 조남기를 맞아주었다. 이 방문 기간 동안 조남기는 떠난 지 60년 만에 그의 고향 인 청원군을 찾았다. 그곳에서 그는 고향민들과 함께 인사하고 담소를 나누는 따뜻한 시간을 가졌고 옛 정취를 되새기고자 했다. 그는 중국 정계의 최고위급 장군이기 전에 자신의 뿌리를 잊지 않은 명실상부 중국의 한인[조선족]이었다.

지지 않는 별

중국으로의 이주 후 한 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억척스럽게 삶의 터전을 일궈온 한인[조선족] 사회에는 영원히 지지 않는 별이 있다. 중국으로 이주하여 중국에 뿌리를 내리고 중국 정계의 최고의 장군이 되기까지 조남기가 이루어낸 것은 다만 정치적 업적만이 아니다. 그는 한인[조선족] 사회 전반에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으며, 이주 민족이지만 한인[조선족]들에게 당당하게 살아가는 법을 가르치고 있다. 조남기는 한인[조선족]의 영원한 우상이며 본보기이다.

오늘도 조남기는 말한다.

“한 인간이 만약 하는 일 없이 평범히 보내지 말고 성과를 이루려면 반드시 두 가지 원칙을 견지해야 한다. 첫째는 창조적이면서도 실제적인 것을 추구하여야 하며 둘째는 사업을 최고로 삼고 군중을 근본으로 여겨야 한다. 이것은 나의 사업 원칙이기도 하거니와 또한 내가 추구하는 목표이다.”

참고문헌
  • 「赵南起」, 百度知识吧.
  • 「趙南起」, 维基百科.
  • 成海,「趙南起:朝鮮族將軍耀目政壇」(『文汇报』, 2001)
  • 곡애국·증범상, 『조남기전』(연변인민출판사, 2004)
  • 肖思科, 「朝鲜族上将赵南起的多彩人生」(『党史博览』, 2008)
  • 王兮之, 「薄熙来赵南起贾治邦获年度大奖」(『中国绿色时报』, 2010. 4.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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