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특별한 이야기

조선 의용군 최후의 분대장 소설가 김학철

한자 朝鮮 義勇軍 最後의 分隊長 小說家 金學鐵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길림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조선족 대표 작가, 김학철

김학철(金學鐵)[1916~2001, 본명: 홍성걸(洪性杰)]은 한국·북한·중국에서 문학 창작에 힘쓴 작가이자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한민족의 국권 회복을 위해 항일 투쟁에 참가하여 용감히 싸웠으며, 세상의 불의(不義)에 몸을 던져 저항한 민족 문단의 거목이다.

김학철은 중국 조선족 문단에서 문학의 대부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작가이다.투철한 역사 의식과 민족 의식을 바탕으로 한 그의 작품들은 현재 널리 읽혀지며 대중들의 큰 관심을 받고 있다. 그의 문학 작품을 통해 중국 조선족 문학을 이해할 수 있으며 세계 문학 속에서 한층 발전한 중국 조선족 문학의 위상 또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외발 의인 김학철, 파란만장했던 그의 삶

김학철은 1916년 11월 4일, 북한의 원산(元山)에서 누룩 제조업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일곱 살에 아버지를 여읜 그는 홀어머니 슬하에서 어렵게 자랐다. 넉넉하지 않았던 환경에서도 원산 공립 초등학교를 마친 후, 서울의 보성 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당시 그는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읽고 반일 사상에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1929년 원산 대파업과 광주 학생 운동 등의 사회적 격변을 거치며 그는 본격적으로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 의식을 형성하게 되었다. 19세 때 중국상해로 망명한 그는 의열단에 가입해 의열 활동에 참가하였다. 그는 민족 혁명당의 지령을 받고 남경(南京)에 있는 중국 국민당의 중앙 군관 학교에 들어가서 제1대대 제4중대에 편입되어 그곳에서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접하게 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민족주의자에서 마르크스주의자로 전향하였고 1937년 7월 중일 전쟁이 일어난 뒤 중앙군관학교를 1년 앞당겨 졸업하였다. 그는 1937년 10월 무한(武漢)으로 건너가 조선의용군 결성에 참가하였다. 그는 분대장 직무를 맡아 1940년 8월 29일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고 1941년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과 함께 태항산에 들어갔다. 1941년 태항산 지구의 호가장(胡家庄) 전투에서 김학철은 왼쪽 다리에 총상을 입고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다.

김학철은 석가장의 일본 총영사관 경찰서 유치장에 5개월 동안 갇혀 있다가 1942년 일본의 나가사키 형무소에 이송되어 10년 징역형을 언도받았다. 당시 총상을 입었던 그의 왼쪽 다리는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해 절단해야만 했다.

1945년 8월 해방된 이후 김학철은 석방되어 10년 만에 서울로 돌아왔다. 서울에서 그는 1년 동안 조선 독립 동맹 위원으로 활약하면서 조선의용군의 투쟁 생활을 작품으로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미군정 하에서 좌익 운동이 탄압을 받게 되자 북으로 탈출, 평양에서 창작 활동에 전념했다. 그 뒤 김학철은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가을 다시 중국북경(北京)으로 거처를 옮겼다.

1952년 연변 조선족 자치주가 성립되자 김학철연길시로 이주하였다. 그런데 그는 1957년부터 중국 공산당 정권에 문제시되는 작품들을 창작하였다는 죄로 20여 년 간 가혹한 시련을 겪어야만 했다. 그 뒤 65세에 이르러서야 정치적 생명과 작가적 생명을 다시 찾은 김학철은 1985년 정식으로 중국 국적을 취득하고 중국 공산당 당적을 회복하였다.

펜으로 시대와 싸워나간 조선 의용군

김학철은 해방 후 서울에서 본격적으로 등단하였다. 그는 총칼 대신 붓을 잡고 자신이 직접 경험한 조선 의용군과 신사군·팔로군에서의 항일 투쟁 체험을 모티브로 창작에 몰두하였다. 그는 조선 문학가 동맹의 기관지인 『문학』과 『건설』 등에 글을 발표하였다.

일제와의 태항산 전투에서 한 쪽 다리를 잃은 그는 의기가 충만한 엄숙함과는 다소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그는 되도록 일상적인 에피소드, 즉 어리석으면서도 순진한 허물투성이의 의용군 시절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등단했으며 타고난 유머 감각으로 세인에게 환영받는 작품들을 탄생시켰다.

그 후 그는 북한을 거쳐 중국북경으로 망명하였고 다시 연변에 정착한 후에 문학 창작을 이어갔다. 그는 장편 소설 『해란강아 말하라』, 『격정 시대』, 『20세기의 신화』를 비롯한 많은 문학 작품을 창작하였다. 하지만 이 때문에 그는 1960년대 중국의 반우파 투쟁과 문화 대혁명 과정에서 박해를 받아 20여 년 동안 문학 창작 활동을 중단해야만 했다. 그리고 1980년대부터 다시 왕성한 창작 활동을 재개하여 소설·잡문·수필 등 방대한 창작을 진행함으로써 중국 조선족 문단의 원로 작가의 한 사람으로 활약하였다.

특히 김학철은 항일 전쟁 시기 민족의 경계를 넘어 빛나는 ‘국제 전우’들이었던 조선의용군과 관련한 많은 창작품을 남겼다. 역사적으로 남·북한에서 모두 배반당한 조선의용군의 이야기에 혼신의 힘을 쏟았다. 김학철은 끝까지 유일하게 살아남은 조선의용군의 한 사람으로 그 시대를 증언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는 조선의용군의 생활과 투쟁을 예술적으로 형상화하였을 뿐만 아니라 당파 싸움에 의해 소외당했던 조선의용군 용사들을 위해 예술적 기념비를 세웠다.

조선족 문단의 영원한 전설

김학철의 문학은 20세기 한인 문화임과 동시에 세계적인 문학이다. 그가 인생 전반기를 항일 무장 투쟁 혁명가로서 조선의용군으로 살았다면 후반기는 철저한 사회주의자 문학가로서의 삶을 살았다고 하겠다.

김학철의 문학 세계는 그의 초인간적인 정신력과 풍부한 체험이 깃들어 있다. 작품의 무게는 언제나 글을 쓴 사람이 겪는 고통의 심도와 정비례한다. 그는 파란만장하고 눈물겨운 일생을 통하여 여러 번이나 극한적인 상황을 극복하고 인간 승리의 신화를 창조했다.

일제에 반대하는 동아시아 인민들의 투쟁이 고조되던 격동의 시대에 한국·중국·일본을 무대로 싸웠던 그의 파란만장한 생활 체험은 그의 문학을 체험과 증언의 문학으로 이끌어냈다. 때문에 김학철 문학은 20세기라는 시간성과 더불어 동북아를 가로지르는 공간성을 확보하고 있다.

혁명적 낙관주의에 바탕을 둔 풍부한 해학과 유머, 신랄한 풍자는 김학철의 힘이자 매력이다. 그는 노신·숄로호프 등 타민족 작가들의 유산을 자기의 문학에 녹여내면서도 시종일관 우리말로 창작하는 것을 통해 민족 문학을 고수하였다.

김학철은 조선족 문단의 대표적인 지성인으로서 어떤 권력과 폭압에도 굴하지 않고 사회의 비리와 싸워 온 예리한 비판 정신의 소유자였다. 특히 전근대적인 폐습과 전제주의 폭정의 쇠사슬을 부수기 위한 후반생의 눈물어린 투쟁은 그의 문학작품들을 통해 세계사적 의미를 지닌다.

특히 그는 『해란강아 말하라』를 발표하여 반동 분자로 내몰렸고, 『20세기의 신화』라는 작품에서 모택동의 일당독재를 신랄하게 비판하여 10년간의 옥살이와 14년간의 강제 노역을 당해야만 했다. 그런 중에도 그는 자신의 신념과 의지를 단 한 번도 꺾지 않았다. 뚜렷한 삶의 가치관에 바탕을 둔 김학철의 정신적 좌표는 조선족 문단의 정신사적 흐름에 빛나는 이정표로 남겼다.

이와 같은 김학철의 문학은 국제 공산주의 코민테른 「12월 테제」를 기반으로 한 레닌주의에 입각한 사실주의적 사회주의 문학의 전범을 보여준다. 고리끼·고골리·숄로호프와 같은 사회주의적 세계 문학성이다. 진정한 사회주의는 가장 인간적인 인민의 세상이며 인위적이 아닌 과학적인 법칙에 의해 사회가 자연스럽게 변혁되어 나가야 한다고 그는 믿었던 것이다.

김학철은 어느 한 인터뷰에서 “불같이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은 눈귀가 찢어지게 미워하지도 못합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80여 세의 고령에도 노익장의 정열로 창작에 정진하던 중 병환이 깊어지자 그는치료와 식음을 전폐하던 중 2001년 9월 25일 ‘추도회를 일절 하지 마라’는 말을 남기곤 세상을 떠났다.

그가 남긴 “편안하게 살려거든 불의(不義)에 외면하라. 그러나 사람답게 살려거든 그에 도전을 하라”는 유언에 따라 화장하여 그의 유골은 두만강에 뿌려졌고 일부는 동해로 띄워 보냈다. ‘조선 의용군 최후의 분대장’으로 불린 김학철의 일생은 한인의 지난 세기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한인 사회에서는 김학철의 문학을 기리기 위하여 다양한 활동들을 펼치고 있다. 김학철 문학에 대한 연구는 지난 세기 1980년대 말부터 이미 진행되었는데 관련 논문과 평론이 속출하고 연구 논문집도 출판되었다. 또한 김학철 문학에 대한 전문적인 비평, 연구진이 형성되었으며 김학철 문학 연구회가 성립되어 정기적인 학술대회도 개최될 뿐만 아니라 김학철 문학상을 제정하여 그의 뜻을 기리고 있다. 김학철은 한인 후손들에게 미래의 세계인으로 영원히 기억되고 있다.

참고문헌
  • 강옥, 「김학철 문학 연구」(고려 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06)
  • 김호웅,「우리 문학의 산맥-김학철」(민족문학사연구 21호, 2002)
  • 김호웅·김해양, 『김학철 평전』(실천문학사, 2007)
  • 최건, 「김학철 소설 연구」(서울 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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