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한 點 부끄럼 없이 산 抵抗 詩人 尹東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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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 지역 |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차가 명동촌 입구에 들어선다. 명동촌! 150년 조선인 이주 개척사의 상징이자 산 증인이다. 조선인 이주 개척사는 바로 이곳 명동촌에서 시작되었고 또 귀결되었다. 명동촌이 있었기에 용정이 빛을 발했고, 이주 개척의 역사가 더 화려할 수 있었다.
근대 교육의 출발지였던 명동촌은 이주 조선인 사회의 정체성의 근원이었고, 계몽 운동과 무장 투쟁의 시작점이었다. 간도의 명동촌, 바로 그곳에서 조선인 문학의 거장, 윤동주(尹東柱)[1917~1945]가 태어났다. 윤동주는 조선인 가슴 속에 맺혀있던 시대의 울분을 대신했고, 시대의 아픔을 대신한 조선인 문학계의 영웅이며 작은 거인이었다.
일행을 실은 차는 어느새 옛 명동 교회 앞에 멈춰 선다. 명동 교회 마당 한 켠에 명동촌의 진정한 건립자이자 근대 교육의 선구자였던 목사 김약연(金躍淵)의 기념비가 서있다. 마당을 가로질러 내려가니 바로 윤동주 생가가 보인다. 색이 바란 기와가 가지런하게 얹혀있는 작고 아담한 기와집이다. 윤동주 생가는 1900년경에 조부인 윤하현(尹夏鉉)이 지은 집으로 기와를 얹은 10간과 곳간이 달린 전통식 기와집이었다.
1932년 4월에 윤동주가 은진중학교로 전학하자 윤하현은 집을 팔고 용정으로 이사 했다. 이후 본 건물에서는 다른 사람이 거주해 왔는데 아쉽게도 1981년에 허물어졌다. 다행히 그 후 한국 및 중국 의 관련 단체와 인사들의 지원에 힘입어 1994년 8월에 역사 유적지로 다시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본채 옆에는 기와를 얹진 작은 사랑채가 있고, 바로 그 사랑채 앞에 ‘윤동주 생가 옛터’라고 새겨진 기념비가 서있다. 그 어떤 곳보다도 청결하고 정리 정돈이 잘되어 있어 방문자의 마음이 한결 편안하기만 하다. 바로 이곳에서 우리의 작은 거인, 윤동주가 태어나고 자라났다.
윤동주, 그는 왜 안락한 범인의 삶을 뒤로 하고 그토록 험한 길을 갔는가!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화룡현 명동촌[현재 용정시 지신진 명동촌]에서 파평 윤씨윤영석(尹永錫)과 독립운동가이자 교육가인 목사 김약연의 누이 김용(金龍)의 큰아들로 출생했다. 명동촌의 건립자인 김약연이 바로 윤동주의 외삼촌인 셈이다.
어릴 시절, 지혜롭고 총명했기에 어른들은 윤동주를 ‘해환(海煥)’이라고 불렀는데, ‘해처럼 환히 빛나라’는 뜻의 아명이었다. 윤동주는 1925년 4월 4일에 명동 소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급우는 고종 사촌형인 송몽규(宋夢奎)·문익환(文益煥), 외사촌 김정우(金楨宇) 등이었다. 송몽규는 말을 잘하고 엉뚱한데 비해 윤동주는 성품이 순하고 어질었고, 눈물 많고 감성이 풍부한 소년이었다.
윤동주의 문학적 기질과 관심, 그리고 재능은 이미 소학교 시절부터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는 1928년 12세 되던 때부터 이미 송몽규와 함께 서울에서 간행되던 아동 잡지 『어린이』·『아이생활』 등을 정기적으로 구독하였다. 태어나면서부터 타고난 문학적 끼와 재능은 어린 윤동주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윤동주는 소학교에 다니던 10대 초반[5학년]부터 송몽규 등 급우들과 함께 문예지 『새명동』을 간행했다. 이 무렵 윤동주와 송몽규는 동요·동시 등의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하며 일찍부터 문학적 재능의 끼를 발산해 나갔다. 동요를 발표할 때 윤동주는 동주(童舟) 혹은 동주(童柱)라는 필명을 사용했다. 명동촌에 작은 거성이 탄생한 것이다.
1931년 3월, 15세 나이로 명동 소학교를 졸업한 윤동주는 명동에서 20리 남쪽에 있는 화룡현 소재지 달라자[달라즈, 대랍자(大拉子)]에 있는 중국인 소학교 6학년에 송몽규와 같이 편입되어 1년 간 공부했다.
윤동주는 이듬해인 1932년 4월, 16세 때에 용정에 있는 은진중학에 입학했다. 윤동주의 본격적인 시 창작 활동은 바로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윤동주는 3개의 중학교 교육 기관을 거치며 감출 수 없는 문학적 감성을 발산하였다.
윤동주는 주로 순수한 자아를 표현하는 동시를 많이 썼다. 당시 윤동주의 시 속에는 민족적 수난 속의 시인의 모습보다는 순수한 자아를 표출하는 시인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그런 자아는 시대적 아픔으로 점점 더 일그러져 가고 있었다.
1932년 윤동주가 은진중학에 다닐 때에는 윤동주의 집은 이미 용정가 제2구 1동 36호에 이사를 와 있는 상태였다. 윤동주는 문학적인 감성만이 아니라 다방면에 소질이 많은 청년이었다. 수학과 기하학을 좋아했고, 재봉에도 솜씨가 있어 기성복을 맵시 있게 고쳐 허리를 잘록하게 하거나 나팔바지를 만들어 입고 다니기도 했다.
은진중학 시절 윤동주는 축구 선수로 활약하기도 했고, 교내 웅변 대회에서 「땀 한 방울」이라는 제목으로 1등을 차지하기도 하였다. 여동생 윤혜원(尹惠媛)은 “절구통우에 귤 궤짝을 올려놓고 웅변연습을 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오빠의 손가락에는 늘 등사잉크가 묻어있었다”고 회상하고 있다.
은진중학 시절, 윤동주는 일생일대의 스승을 만나게 된다. 동양사와 국사를 가르치던 명희조(明羲朝)였다. 명희조는 동경 제대에서 동양사를 전공한 사람으로 동경 유학 시절에 일본인들에게 돈을 주지 않기 위해 전차를 타지 않았다는 일화로 유명한 위인이었다.
윤동주는 명희조로부터 독립 사상과 민족 의식을 배우며 문학가 윤동주로서의 자아를 깨우쳐 나갔다. 은진중학 시절에 윤동주의 문학적 재질 또한 꽃을 피워 나갔다. 1934년 12월 14일, 문학소년 윤동주는 「초 한대」·「삶과 죽음」·「내일은 없다」 등의 시를 발표하며 주목을 받았다.
「초 한대」
초한대
내 방에 풍긴 향내를 맡는다
광명(光明)의 제단(祭壇)이 무너지기 전
나는 깨끗한 제물(祭物)을 보았다.
염소의 갈비뼈 같은 그의 몸,
그의 생명인 심지(心志)까지
백옥(白玉)같은 눈물과 피를 흘려
불살라버린다.... (생략)
윤동주는 세 편의 작품을 쓸 때부터 날짜를 명기하기 시작했다. 이는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시를 쓰겠다는 각오의 표현이기도 했지만, 송몽규에게서 받은 자극도 은근히 작용했다고 한다[문익환 증언]. 당시 송몽규는 중학교 3학년 때인 17세의 나이로 『동아 일보』 신춘문예에 콩트 「숟가락」를 투고해 당선의 영예를 안았던 것이다. 1935년 3월부터 윤동주는 용정 중앙 교회 주일학교에서 유년부 학생들을 가르쳤다.
1935년 9월, 윤동주는 은진중학에서 평양 숭실 중학에 편입했다. 그는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창작 활동에 몰두했다. 이때 나온 작품들이 「남쪽하늘」·「창공」·「거리에서」·「조개껍질」 등이다.
하지만 1936년 3월, 신사 참배 거부 문제로 평양 숭실 중학이 폐교되자, 윤동주는 다시 용정으로 돌아와 광명 학원 중학부, 즉 광명 중학 4학년에 편입했다. 그는 광명 중학에 다니면서 연길에서 발행하던 잡지 『가톨릭 소년』에 동주(童舟)라는 필명으로 동시 「병아리」·「비자루」 등을 발표했고, 이듬해에는 「오줌싸개지도」·「무얼 먹구사나」·「거짓부리」 등의 동시를 발표했다.
1938년 2월, 22세 나이로 윤동주는 광명 중학을 졸업했다. 그 해 4월, 윤동주는 연희 전문 학교 문과에 송몽규와 함께 입학했다. 본래 윤동주의 부친 윤영석은 윤동주가 대학을 의과 계통으로 진학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윤동주는 문학을 원했고, 결국 조부 윤하연 장로와 외삼촌 김약연의 중재와 권유로 대학에서 문과반에 진학을 할 수 있었다.
한편, 당시 송몽규는 은진중학 시절 명희조의 밀명을 받고 북경·상해 등지를 다녀온 일로 일본 경찰의 요시찰 인물로 지목받고 있었다. 송몽규는 용정의 대성 중학을 졸업한 뒤 윤동주와 함께 연희 전문 학교에 들어 온 뒤에도 일본 경찰의 요시찰 대상으로 감시를 받고 있었다.
연희 전문 학교 시절, 윤동주는 당시 흥업 구락부(興業俱樂部) 사건으로 교수직을 박탈당하고 도서관에 근무 중이던 최현배(崔鉉培)에게 조선어와 민족 의식을 사사 받으며 정신적·사상적인 측면에서도 무장을 해나가고 있었다. 윤동주는이양하 선생으로부터 영시(英詩)도 배웠다.
대학 진학 후 윤동주의 창작 활동은 한층 더 왕성해졌다. 당시 윤동주는 「새로운 길」·「슬픈 족속」·「사랑의 전당」·「이적」·「아우의 인상화」 등의 시 작품과 동시 「산울림」·「고추밭」을 썼다. 첫 학기를 마치고 여름 방학에 윤동주는 고향인 용정으로 돌아와 용정 북부 하기 성경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윤동주의 작품 활동은 절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누가 막을 수 있으랴, 윤동주의 붓끝을, 그리고 화수분같이 용솟음쳐 올라오는 시적 감흥과 주옥같은 언어적 마술들을!
1939년, 23세에 윤동주는 『조선 일보』 학생란에 산문 「달을 보다」를 발표했고, 잡지 『소년』에 동요 「산울림」을 발표했다. 또한 「자화상」·「달같이」·「소년」 등의 주옥같은 시 작품들을 계속 발표했다. 그 해 가을에 윤동주의 고향집은 용정의 정안구 제창로(精安區 濟昌路) 1-20호로 이사를 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1939년 11월 창씨 개명령이 공포되면서 조선인 사회는 숨 막히는 압박감에 치를 떨어야 했다. 1940년 새해가 밝고 3학년을 맞이했건만 윤동주의 가슴은 길 잃은 기러기처럼 비참함 속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렇게 윤동주는 1940년 12월에 가서야 「병원」·「위로」·「팔복」 등, 3편의 시를 겨우 창작할 수 있었다. 암울해져 가는 현실을 이겨내며 다시 붓을 통해 세상을 보고자 몸부림 쳤다. 1941년 25세 되던 해에 윤동주는 「서시」·「또 다른 고향」·「십자가」·「별 세는 밤」·「눈오는 지도」·「눈감고 간다」·「새벽이 올 때까지」 등 16편의 원숙한 시 작품들과 1편의 산문을 썼다. 이때 나온 시들은 시인 윤동주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작품들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윤동주는 대학에서 발행한 잡지 『문우(文友)』에 「자화상」·「새로운 길」을 발표했다. 11월 20일에 쓴 대표작 「서시」를 잠시 감상해 보자.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와 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 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서시」는 삶의 좌표를 가리키는 한 편의 서정시이다. 지난 삶을 되새겨보며 부끄럼 없는 삶을 개척하도록 일깨워지는 자아 성찰의 하나의 맑은 거울이기도 하다.
한편, 윤동주는 그 해 5월에 정병욱(鄭炳昱)과 함께 기숙사를 나와 종로구 누상동 9번지김송(金松) 집에서 하숙 생활을 했다. 하지만 다시 9월에 일본인 형사들의 주목을 피해 정병욱과 함께 북아현동으로 하숙을 옮겼다. 그런 상황 속에서 12월 윤동주는 연희 전문 문과를 졸업했다. 졸업 시에 윤동주는 19편으로 된 자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졸업 기념으로 출간하려 했으나 미간에 그치고 말았다.
윤동주는 배움에 대한 열정이 컸다. 연희 전문 학교를 통해 대학 교육을 이수했지만 그는 늘 더 나은 자신을 만들고자 배움에 목말라 했다. 1942년 4월, 26세에 윤동주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입교 대학(立敎大學) 영문과에 진학했다. 그 해 여름, 윤동주는 여름 방학을 이용하여 용정에 있는 고향집을 다녀왔다.
그러나 그 길이 고향을 본 마지막이 될 줄을 아무도 몰랐다. 고향집에서 윤동주는 동생들에게 “우리말 인쇄물이 앞으로 사라질 것이니 무엇이나, 심지어 악보까지 사서 모으라”고 당부했다.
1942년 가을 학기에 윤동주는 도쿄동지사 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에 편입했다. 이때 윤동주는 교토시 자교구 다나카다카겐마치 27호에서 하숙 생활을 하고 있었다. 당시 윤동주는 「쉽게 씌여진 시」·「흰 그림자」·「사랑스런 추억」 등의 작품을 썼다. 이 작품들 또한 윤동주의 유작이 되고 말았다.
한편, 그 해 정신적 스승이었던 외삼촌 김약연이 사망했다. 김약연의 죽음은 청년 윤동주에게 큰 충격이었다. 한편으로 1943년에 일제에 의해 징병제가 공포되고 문과 계통 대학·고등학교·전문 학교 재학생들 중 학도병에 지원하지 않은 적격자 및 졸업생에게는 징용 영장이 발부되는 등, 조선인 사회는 또 다시 흉흉한 분위기에 휩싸이고 있었다.
불행은 우리의 작은 거장 윤동주에게도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1943년 7월, 첫 학기를 마치고 귀향길에 오르기 직전 윤동주는 도쿄 대학에 재학중인 송몽규와 함께 특고 형사에게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도쿄카모가와 경찰서[鴨川警察署]에 구금되었다. 죄명은 독립운동이었다.
체포될 때 윤동주는 일본 유학 기간에 썼던 상당한 분량의 작품과 일기를 몰수당했다. 당시 도쿄에 있던 당숙 윤영춘(尹永春)[1912~1978]과 외사촌 김정우가 옥중의 윤동주와 송몽규를 면회했다.
1944년 2월, 윤동주와 송몽규는 기소되었고, 3월 교토 지방재판소 제2 형사부는 윤동주와 송몽규에게 각각 2년형을 언도했고, 이후 규슈(九州)후쿠오카 형무소(福岡刑務所)에 수감되었다. 윤동주는 투옥 중 고향집에 부탁하여 차입한 『신약성서』를 옥중에서 읽었다. 투옥된 뒤 고향집으로 보내는 서신은 매달 일어로 쓴 엽서 한 장씩만 허용되었다.
1945년 들어 고향집으로 매달 초순에 배달되던 엽서가 이해 2월 중순까지 오지 않았다. 윤동주에게 불행이 닥친 것이 분명했다. 이후 엽서 대신 온 것은 ‘2월 16일, 동주 사망, 시체를 가져가라’는 내용의 사망 통보 전보 한 장이었다.
1945년 2월 16일 오전 3시 36분, 윤동주는 후쿠오카 형무소 안에서 생체 실험 대상으로 이름모를 주사를 맞아오다가 끝내 옥사하고 말았다. 송몽규도 윤동주가 사망한지 23일 만인 3월 10일에 옥사했다. 두 명의 피 끓는 청춘이 일제의 생체 실험 대상이 되어 끔찍한 고통 속에 죽어 간 것이다. 참으로 원통하고 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윤동주는 한 줌의 재가 되어 고향에 돌아왔다. 1945년 3월 초순, 용정 동산마루턱에서 가족들과 친지들이 모인 가운데 장례식이 치러졌다. 그리고 그 해 단오 무렵에 묘소에 ‘시인 윤동주지묘(詩人尹東柱之墓)’라고 새겨진 비석이 세워졌다.
1947년 2월 16일, 정지용(鄭芝溶)·안병욱(安秉煜)·이양하(李敭河)·김삼불(金三不)·정병욱 등 30여 명이 모여 서울 소공동(小公洞)플로워 회관에서 윤동주 사망 2주년 모임을 가졌다. 이어 1948년 1월, 고인의 유고 31편을 모아 정지용의 서문과 함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간행되었다.
그 후 1955년 2월, 윤동주 사망 10주년을 맞이하여 흩어진 유고들을 보완하여 88편의 시와 5편의 산문을 묶어 다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를 간행했다. 그리고 그 해 2월 16일, 연희 전문 대학 문과 대학 주최로 박영준·김용호·정병욱·최영해·노천명(盧天命)·조병화(趙炳華) 등 동문·문단 친지 20여 명이 모여 윤동주 추도 모임을 가졌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그 사이 윤동주는 세인들의 기억 속에 잊혀져 갔다. 윤동주의 묘소를 찾는 발길 또한 점차 줄어갔다. 시인 윤동주가 연변 조선인 사회에 다시 알려진 것은 1985년에 연변을 찾은 일본와세다 대학[早稻田大學]오오무라 마스오[木村益夫] 교수에 의해서였다.
한국 문학에 관심이 많았던 오오무라 교수는 윤동주의 작품에 깊은 매력을 느끼던 차 우연한 기회에 일본도쿄에서 윤동주 시인의 동생 윤일주(尹一柱)를 만나게 되었다. 윤일주는 40년 전의 기억을 더듬어 윤동주의 묘는 은진중학으로 이어지는 한 묘지에 있다고 했다.
오오무라 교수는 연변대학에서 일본어 교수를 담당한다는 체류 명목 하에 제주도 출신의 한국인 부인과 함께 연길을 방문했다. 오오무라 교수는 사실 옛 북간도에서 활약했던 문학인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그들의 잘 알려지지 않은 문학적 업적을 추적하고 정리할 목적을 가지고 왔던 것이다.
지역 공안국의 허가증이 나오자 오오무라 교수는 곧장 연변대학의 승용차를 타고 직접 용정으로 향했다. 오오무라 교수는 그곳에서 대성 중학 터인 용정 중학을 방문하고, 용정 지역 역사에 밝은 한생철과 동행했다.
오오무라 등과 함께 옛 동산 교회 묘지에서 윤동주의 묘소를 찾아 쑥밭을 헤치며 앞장을 서던 이해산 교수가 마침내 ‘시인 윤동주지묘’라고 씌여진 비석을 발견했다. 윤동주의 묘소를 찾은 뒤 오오무라 교수와 연변의 학자들은 용정 중학에서 윤동주의 학적부를 발견했고, 이어 송몽규의 무덤과 윤동주의 생가 터, 그리고 유서 깊은 명동 교회를 비롯하여 윤동주의 삶의 궤적과 그 주변의 많은 사실들을 밝혀냈다. 풀숲에서 외롭게 잠들어 있던 시인 윤동주는 그렇게 다시 우리 곁에 돌아 온 것이다. 너무나 반갑고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일행을 실은 미니 버스가 용정 중학 정문으로 들어선다. 넓은 운동장 우측으로 윤동주의 학적부가 소장되어 있던 옛 대성 중학교 건물이 기념관으로 변모되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단아한 회색빛 2층 벽돌 건물 입구에는 ‘대성 중학교’라는 간판이 대리석판에 새겨져 있고, 그 우측에는 윤동주의 「서시」가 새겨진 4단 높이의 ‘윤동주 시비’가 세워져 있다. 시비의 맨 하단 전면 부위는 검은색 대리석임에도 불구하고 빛이 바래 있었다. 연변과 한국 등지에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그 앞에서 사진을 찍고 앉으며 윤동주를 생각했으리라.
옛 대성 중학교 기념관 건물에 타지에서 온 관람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기념관 2층에는 기념실마다 용정 조선인들의 민족 교육과 민족 학교들, 그리고 윤동주와 김약연·안중근을 비롯한 인물들의 항일 운동에 대한 내용들이 전시되어 있다.
곱고 단정하게 차려입은 안내자가 진열실을 따라 열심히 설명을 하고 있다. 저마다 메모를 하기도 하고 사진을 찍으며 귀담아 듣고 있는 모습이 자못 진지하기만 하다. 호기심어린 눈길로 하나라도 놓칠세라 진지하게 들으며 메모하는 어린 학생들의 모습이 흐뭇하기만 하다. 1층에 마련된 윤동주 교실을 관람하던 한국인 방문자는 목매인 목소리로 그 옛날을 회상했다.
“과거 연변 조선인들의 삶을 생각하니 목이 메이네요. 모두가 항일 독립운동을 열심히 하셨고, 그래서 오늘이 있는 것 같아요. 특히 윤동주 시인은 참 훌륭한 삶을 사신 것 같아요. 한국에 더 많이 소개가 되어서 그 분의 정신이 잘 계승되어 나갔으면 합니다.”
(한국인 관광객)
명동촌에 거주하시는 김민숙 할머니도 윤동주에 대해 아름다운 기억을 간직하고 계신다.
“김약연은 여기 이 마을에서 살았었는데, 현재 공사 중인 집자리가 거주지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었는데 사람이 참 좋았습니다. 그는 윤동주와 같이 지하운동을 했습니다. 김약연도 그렇고 윤동주도 참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명동촌김민숙 할머니)
거장 윤동주는 우리 곁을 떠났다. 하지만 윤동주의 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한다. 저항시인 윤동주는 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기를”처럼 짧은 생애를 한 점 부끄럼 없이 살다가 갔다. 암울하고 불운했던 시대, 윤동주는 분명 시대가 낳은 영웅이자 위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