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글로컬 圖門의 자랑, 中國 朝鮮族 非物質 文化 遺産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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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야 | 생활·민속/생활|지리/인문 지리 |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 지역 |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도문시 경신진 |
| 시대 | 현대/현대 |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1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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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정권 수립 당시에 ‘문화유산’이나 ‘문화재’라는 개념과 달리 ‘문물(文物)’이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1949년 11월 중국 정부 문화부 산하 문물 사업 관리국(文物事業管理局)을 설치했고, 1950년 5월에 「진귀 문물 도서 반출 금지 잠정 조치법(禁止珍貴文物圖書出口暫行辦法)」을 제정하였다. 이후 문화 대혁명 등 사회적 혼란기를 거치면서도 문물 정책을 담당하는 기구를 새로이 설치했고, 관련 법규도 제정했다.
특히 1982년 11월 중국 정부는 「문물 보호법(文物保護法)」을 제정하여 문물에 대한 보호와 관리 제도를 체계화시켰다. 그러나 중국의 문물 정책은 ‘문물’이라는 개념이 유형 문화유산만을 포함하는 것이어서 무형 문화유산을 상대적으로 도외시하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정책적 지원을 받지 못한 중요 무형 문화유산들이 사장의 위기에 놓이게 되자 중국 정부는 2004년 8월 유네스코의 ‘무형 문화유산 보호 협약’에 급히 가입했다. 이로써 ‘문물’이라는 개념으로 유형 문화유산만을 보호·육성했던 기존의 패턴을 넘어 무형 문화유산에 대한 중요성을 확대하여 인식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예컨대 2005년 3월 국무원 판공청은 ‘우리나라 비물질 문화유산 보호 강화에 관한 의견[國務院辦公廳關于加强我國非物質文化遺産保護工作的意見]’을 통해 무형 문화유산에 해당하는 ‘비물질 문화유산(非物質 文化遺産)’에 대한 정부 차원의 체계적인 보호와 관리를 지시했다.
그리고 2005년 12월 ‘국무원의 문화유산 보호 강화에 관한 통지(國務院關于加强文化遺産保護的通知)’를 통해 기존의 문화유산을 유형 문화유산에 해당하는 ‘물질 문화유산(物質文化遺産)’과 무형 문화유산에 해당하는 ‘비물질 문화유산’으로 분류했다. 이에 따르면, ‘물질 문화유산’은 역사·예술·과학적 가치를 지닌 문물로서 고유적·고분·고건축·석굴사·석각·벽화 및 역사상 각 시대의 예술품·문헌·친필 원고·도서 자료 등 이동이 불가한 문물을 의미하며, ‘비물질 문화유산’은 무형으로 존재하는 문물로서 구비 전통·표현 예술·민속 행위와 의식 및 명절·민간의 전통 지식과 행위·수공예 기술 등 대중의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전통 문화를 의미한다.
비물질 문화유산에 대한 중국 정부의 관심 변화는 55개 소수 민족의 전통 문화에 대한 보호·육성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2010년 기준으로, 비물질 문화유산 중 소수 민족의 전통 문화 항목이 95%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국가급 비물질 문화유산도 마찬가지인데, 2006년에 선정한 제1차 국가급 비물질 문화유산 518개 항목 중에서 165개 항목이 소수 민족의 전통 문화로 31.9%를 차지했고, 2008년에 재선정한 제2차 국가급 비물질 문화유산 510개 항목 중 248개가 소수 민족의 전통 문화로 48.6%를 차지했다. 유네스코의 인류 무형 문화유산 대표 목록에 등재된 26건 중에서도 위구르족의 무카무(木卡姆), 몽고족의 장조민가(長調民歌), 한인[조선족]의 농무(農舞) 등 10건이 소수 민족의 전통 문화이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중국의 문화 정책이 55개 소수 민족 단위로 민족 고유의 전통 문화를 선양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질 것을 예상할 수 있다. 실례로 아직까지는 몇몇 사례에 불과하지만, 광서성(廣西省)의 장족(壯族), 운남성( 雲南省)의 와족(佤族)·태족(傣族)·묘족(苗族), 귀주성(貴州省)의 동족(侗族), 사천성(四川省)의 모소족(摩梭族) 등 소수 민족 단위별로 그들의 전통 문화[전통 음악·전통 복식·전통 음식·전통 생활]를 문화 관광 상품으로 개발하고 있다.
중국 한인 비물질 문화유산의 전승과 단절은 일제 강점기에 집단 이주로 인한 연변 한인의 형성과 발전, 그리고 1992년 한·중 국교 정상화로 인한 연변 한인 사회의 급속한 변화와 맞물려 있다.
주지하는 바 일제는 1931년에 ‘9·18 사변’을 일으키고 중국의 동북 3성을 점령하였다. 또한 자국의 계급 갈등을 완화시키면서 동북을 중국 침략의 후방 전선과 식량 기지로 쓰기 위해 강제 이주 정책을 수립했다. 이에 일제는 1941년 8월까지 중국 동북 지역에 435개의 ‘이민 개척단’을 파견했다. 그리고 ‘재만 조선인 지도 요강(在滿 朝鮮人 指導要綱)’을 제정하고 한인 농민들을 해마다 만 호씩 이주시켰다. 1940년 8월 통계에 의하면, 1937년부터 1940년까지 이른바 ‘집단 개척민’ 형식으로 중국 동북 지역에 이주시킨 한인 농민이 1만여 가구에 달한다. 이외 1939년에 ‘집합 개척민’ 형식으로 간도(間島)·길림(吉林)·봉천(奉天) ·통화(通化)·목단강(牡丹江) 등지에 800여 가구를, 1940년에 통화·길림·간도·금주(錦州)·빈강(濱江) 등지에 1,700여 가구를 이주시켰다.
그런데 당시 이주와 정착은 원주지의 생활 습속을 동반한 집단 이주와 집단 정착이었다. 이주민들은 동북 지역에서 삶이 일시적인 정착일 것이라 생각했다. 언젠가는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기에 절기에 따른 세시 풍속을 고수했고, 관혼상제의 예법을 고수했다. 문화 대혁명 이전까지 산신이나 서낭을 기리는 동시에 지신을 밟았고, 발병할 때마다 무당을 불러 액막이나 푸닥거리를 했다. 그리고 이주민들에게 동북 지역이라는 특정한 공간은 한인이라는 정체성을 깨닫게 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이에 민족내혼(民族內婚)을 지켜 나갔다. 낯선 땅의 소수 민족으로서 정치·경제적 자원의 확보에 불리한 조건에서 생존을 위한 전략으로 혈통 간 결속과 민족 정체성에 대한 감각을 강화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농경 중심의 생업 활동을 했기에 공동 노동과 작업이 필수적이었다. 이주하여 정착한 직후에는 화전을 일구어 밭농사를 하면서 산나물 채취를 생업으로 삼았다. 뒤에는 논을 개간하여 벼 농사를 영위했다. 이주민들은 고향에서 농사를 짓던 방식 그대로 황무지를 개간하여 수전을 만들었다.
농경 풍속은 물론이거니와 각종 농기구와 일상 생활용품까지 고향의 전통을 계승했다. 농경이 유일한 생활 수단이었기 때문에 농악대를 구성하여 두레 농사를 지었다. 이러한 기반 위에서 봄철에 풍년 기원제, 여름철에 호미씻이, 다양한 형태의 농요 등이 전승될 수 있었다.
한편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을 창립하면서 실시한 봉폐식 호적 관리 제도로 이주민들이 임의대로 도시 호적에 등재될 수 없었다. 행정구역을 넘어 이주를 할 때에도 호적 심사를 거쳐야 했는데, 수속 절차가 워낙 까다로워 몇몇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이주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중국 공산당이 창립 당시부터 소수 민족에 대한 포용 정책을 펼쳐 한인의 언어와 문자를 중시했고, 풍속과 관습을 존중했다. 언어와 문자에 대한 중시 및 풍속과 관습에 대한 존중으로 인위적이나마 한인의 비물질 문화유산을 포함한 전통 문화가 전승될 수 있었다.
그러나 1992년 한·중 국교 정상화 이후 연변 지역 한인 사회가 크게 변화했다. 특히 2000년대 이후부터 ‘제2의 민족 이동’이라고 할 만큼 중국 전역으로 연변 지역 한인의 대대적인 인구 이동이 일어났다. 한인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대련(大連)·천진(天津)·연태(煙臺)·위해(威海)·청도(靑島)·상해(上海)·심천(深圳)·광주(廣州) 등의 대도시에 한국 기업이 진출하면서 적게는 몇 만에서 많게는 수십만에 이르는 인구의 한인 집거지가 우후죽순으로 형성되었다. 한인이 떠난 연변 지역의 경작지는 한족이 소작농 혹은 계약농의 직분으로 채우고 있다. 연변 지역 한인 사회가 변화하면서 한인의 비물질 문화유산도 몇몇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자연스레 단절되었다.
도문시가 용정시와 더불어 연변 지역 문화 관광의 핵심지로 부상하고 있다. 도문시는 60㎞의 조(朝)·중(中) 국경선이 있으며, 함경북도 남양시와 통하는 국제 통상구이고, 연길시로의 접근이 용이하며 한인의 전통 문화가 전해오고 있다는 점등을 활용하여 ‘다국 관광’·‘변경 관광’·‘민속 관광’ 등을 활성화시키고 있다. 이를 통해 ‘글로컬 도문시’라는 도시 브랜드를 구축하겠다는 구상을 갖고 있다.
이에 따라 도문시는 2006년부터 ‘연길-용정-도문 관광 일체화 발전’을 추진하고 있으며, 2007년부터 ‘중국 두만강 문화 관광절 행사’를 기획·추진하여 두만강반(豆滿江畔) 제1 도시로서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있다. 또 2008년부터 민속놀이를 복원하여 ‘화인컵 투우 경기’를 개최하고, 이와 때를 같이 하여 ‘두만강 관광 부두 준공식’을 두만강 공원에서 거행하기도 했다.
두만강 관광 부두를 통해 대외 교류와 문화 관광의 활성화, 나아가 경제 발전을 추진하고 한인의 전통 문화를 선양하겠다는 전략이다. 그리고 이 연장선상에서, 2010년 7월 두만강 축제 기간에 맞춰 ‘중국 조선족 비물질 문화유산 전시관’을 개관했다.
중국 조선족 비물질 문화유산 전시관 개관은 변경 관광과 민속 관광을 연계하여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하려는 ‘변경 문화 관광 산업 발전 프로젝트’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 조선족 비물질 문화유산 전시관은 외형부터 한인의 전통 기와 가옥을 연상케 한다.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는 현대식 외형의 ‘도문시 소년궁(少年宮)’과 어우러져 ‘전통과 현대의 결합’이라는 콘셉트를 잘 소화하고 있다.
중국 조선족 비물질 문화유산 전시관은 2개 층 10개 전시장으로 운영되고 있다. 1층에서는 한인[조선족] 민간 무용·한인[조선족] 전통 악기 제작 기예·한인[조선족] 전통 음악·한인[조선족] 전통 문학 이야기·한인[조선족] 전통 공예 등을 전시하고 있다. 2층에서는 한인[조선족] 민간 체육과 유희·한인[조선족] 민족 예의·한인[조선족] 음식 문화·한인[조선족] 복장 문화 및 무형 문화재 전승인의 전수 등을 전시하고 있다.
그 가운데서 국가급 비물질 문화유산이 11개, 성급(省級) 비물질 문화유산이 26개, 주급(州級) 비물질 문화유산이 8개, 시(市)·현급(縣級) 비물질 문화유산이 7개이다. 도문시의 한인 비물질 문화유산도 19개이다.
이곳에서는 기존의 평면적인 전시와 달리, 연변 과학기술대학교 도시 연구소의 주도로 첨단 과학기술을 접목하여 해당 비물질 문화유산들을 입체적으로 전시하고 있다. 예컨대 밀랍으로 인물상을 정교하게 만들어 한인의 민속 정경을 보다 생생하게 재현해 놓았다.
또한 장구 체험구를 컴퓨터 화면의 지시 내용에 따라 치면, 곧 초음파 탐지기가 진동하여 전통적인 북소리를 내게끔 했다. 또한 한인의 대표적인 비물질 문화유산으로 꼽히고 있는 퉁소를 그 전승인들이 전시관 내부에서 관람객을 위해 직접 시연을 하기도 한다.
중국 조선족 비물질 문화유산 전시관에는 하루 평균 400여 명의 관람객이 찾아든다고 한다. 관람객 대부분은 조·중 국경선이 있는 두만강 지구를 관광하는 한족으로 장구·북·퉁소 등 한국의 전통 음악과 김치·냉면 등 한국의 전통 음식에 관심을 표한다고 한다. 또한 한족 문화와 다른 통과 의례인 한인의 환갑에도 관심을 표한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상모를 직접 돌릴 수 있고, 장구를 직접 쳐 볼 수 있어 한국의 전통 음악을 체득하기도 한다.
반면, 한국인 관람객은 7∼8월에 백두산 관광과 연계하여 도문 대교를 들렀다가 이곳을 찾는데, 아직은 한국 관광사에 홍보가 덜 되어 있어 그 수는 미미하다고 한다. 필자가 한국인으로서 이곳을 찾았을 때, 중국의 여느 전시관들 보다 훨씬 진보한 수준의 내부 전시물을 통해 도문시의 문화 관광 활성화에 대한 관심과 노력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차후 중국 한인 비물질 문화유산의 문화 산업화가 어떤 방식으로 전개될 것인지 자못 궁금하다.
기존의 도문시 문화 관광에 있어서는 도문 대교[中朝 다리]·두만강 교두·두만강 공원 등이 그것을 둘러싼 자연 경관과 더불어 연변 지역 관광객을 유입할 수 있는 최고의 유형적 매력물이었다. 도문 대교는 약 100여 m의 교각으로 도문 해관에서 중국과 북한의 경계 역할을 하고 있다. 다리 중간까지는 중국 영토이고, 나머지는 북한 영토이다. 대교 너머로 함경북도 남양시의 면면을 볼 수 있다. 국문 전망대(國門展望臺)에 올라서면 두만강 일대와 북한을 더욱 선명하게 조망할 수 있다. 대교 양끝에는 세관이 있으며, 각각 국경 수비대원들이 경계를 서고 있다. 두만강 교두는 도문시와 북한남양시 사이에 놓여 있는 약 1,000m의 교각으로, 도문 대교와 마찬가지로 중국과 북한이 공동으로 관리하고 있다. 그리고 관문을 중심으로 5㎞ 지점에 시민들의 휴식처로서 두만강 공원이 넓게 자리하고 있다. 이들 관광지 주변에 한인 민속 특색의 상품을 판매하는 관광 상품점도 늘어서 있다.
그러나 도문시는 기존의 유형적 매력물을 중심으로 한 문화 관광으로는 더 이상 관광 활성화 효과를 얻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즉 두만강이라고 하는 풍경구 및 그것이 함축하고 있는 변경(邊境)으로서의 정치·경제·사회적 의미, 그리고 한인 집거지로서 한인 전통 문화가 잘 보존되어 있는 특색 지구라는 이점을 조화롭게 융합해야만 문화 관광 활성화를 기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이에 기존의 풍경구에 민족 가무 공연·민족 예절·민속 식품 등의 관광 상품을 도입하는 것을 필두로, 관광 상품 개발의 강도를 높여 민족 문화·민족 복장과 장신구 등 한민족 특색의 관광 상품 개발 및 투자에 더욱 힘쓰고 널리 권장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기반을 바탕으로 글로컬 도문시의 자랑으로서 조선족 비물질 문화유산 전시관이 개관했다. 아직 그 효과가 눈에 띄는 것은 아니지만, 지속적인 투자에 이은 새로운 관광 상품 개발로 반드시 그 효과를 거두겠다고 다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