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특별한 이야기

기와의 명문을 통해 본 생활 문화, 장재촌 백년 가옥

한자 기와의 名門을 통해 본 生活 文化 , 長財村 百年 家屋
분야 생활·민속/생활|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지신진 장재촌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상세정보
성격 유적|건물|가옥
재질 목조
용도 거주
주거용 가옥 길림성 용정시 지신향 장재촌
김약연의 이주와 장재촌의 형성

중국연변 한인의 이주 개척사는 이웃한 러시아 한인[고려인] 공동체와 유사하게 약 150년의 세월을 간직하고 있다. 두 한민족 간에는 역사적 유사성이 있지만 한편으로 적지 않은 부분에서 차이를 지닌다. 바로 전통 문화의 보존과 활용이라는 측면이다. 러시아 한민족이 유랑의 삶을 살아가는 동안 중국의 한인들은 초기 정착지에 머물며 자치주를 이루어 살아왔고 다양한 측면에서 한민족적인 색채들을 유지해 오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에서는 어디를 가더라도 수십 년, 혹은 백 년을 전후한 한인들의 고옥(古屋)을 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물론 연해주(沿海州) 우수리스크(Ussurisk) 시내 일부 지역에 그나마 꽤 오래된 고옥들이 몇 채 있기는 하지만 연변의 회룡봉촌(回龍峰村)이나 장재촌(長財村)에 남아 있는 백년 가옥(百年家屋)들에는 비할 바가 못 된다.

백년 가옥의 숨결이 전해져 오고 있는 장재촌의 역사는 명동촌(明東村)[당시 용암동]의 실질적인 개척자인 김약연의 등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1899년 2월, 조선회령 출신의 김약연(金躍淵)[1868~1942]은 김하규(金河奎) 가문 63명, 문병규(文秉奎) 가문 40명 등 총 22세대[142명]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와 장재촌에 터를 잡았다. 물론 마을에는 앞서 들어 온 한인 이주민들이 있었다. 김약연은 지도자로서 이주민들과 주경야독하며 기반을 닦아 나갔고, 이웃한 명동촌에 ‘규암재(圭巖齋)’ 서당[1901]까지 열어 장재촌명동촌을 근대적인 한인 이주 정착촌으로 변모시켜 나갔다.

용정 시가지에서 동남 방향으로 육도하(六道河)를 거슬러 약 16㎞ 정도를 올라가면 하늘에 치솟아 웅기를 자랑하는 선바위가 있는데, 그 선바위를 지나면 곧 장재촌에 이르게 된다. 도로를 사이에 두고 장재촌명동촌이 자리잡고 있다. 장재촌은 남서쪽으로 지신(智新), 삼합(三合)을 지나서 북한의 회령으로 연결된다. 장재촌과 인근 지역의 위치를 보면, 용정으로 가는 방향 2㎞ 지점에 신동촌(新東村)이 위치하고, 반대인 남동쪽으로 800m 떨어져 명동촌이, 6㎞ 떨어진 곳에는 지신향(智新鎭)의 소재지 지신진이 있다. 이웃한 명동촌의 경우는 장재촌과 거리가 가까워서 이주 초기에는 같은 마을로 취급되기도 했다. 장재촌은 회령-삼합-지신-용정을 잇는 중요한 경로에 인접해 있어서 이주민들이 정착지로서 특히 선호했던 곳이다.

연변 한인 이주 개척의 역사적 증인인 장재촌! 그곳에 120년 전 한인 이주민들의 삶과 애환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고옥인 함경도식(咸境道式) 전통 팔간(傳統八間) 기와집이 남아 있다. 장재촌의 백년 가옥에는 누가 살았고, 100년이 지난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백년 가옥의 주인, 이자수(李自壽)는 누구인가?

8월의 태양이 대지를 달구며 이글거리는 오후. 다시 한번 회룡봉촌과 장재촌의 백년 가옥 답사를 위해 길을 나선다. 하지만 최근 며칠 사이 내린 비로 인해 회룡봉촌의 진입로가 엉망이 되어 있었다. 한참을 들어가다 결국 다시 돌아 나오고 말았다. 아쉽지만 회룡봉촌의 백년 가옥은 다음 기회로 미뤄야 할 것 같다. 장재촌에 남아 있는 백년 가옥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풀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현재 용정시 지신진 명동촌에 소속된 장재촌 한가운데에는 121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함경도식 한인 전통 팔간 기와집이 삶의 숨결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당당히 서 있다. 이 집에는 과거 이자수(李自壽)라는 사람이 거주했었다고 한다.

오랑캐령을 넘어 용정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자리잡은 장재촌에는 김약연 일행이 들어오기 전인 1860년대부터 한인 이주민들이 부락을 이루고 살고 있었다. 장재촌의 이주민들 중에는 머리가 비상하고 일 욕심이 커서 돈벌이를 잘 했던 이자수란 부자가 있었다. 그는 새집을 지을 궁리를 하던 끝에 풍수지리에 입각하여 집터를 골랐다. 주변의 풍수를 보면, 동북켠에 둥그런 사자산이 느슨히 누워있고, 서남켠에는 육도하가 유유히 흐르고 있다. 이에 장재촌이 일등자리[명당자리]라 하여 1890년 이자수는 유명한 목수들을 청하여 바로 사자산 중심부 위치에 해당되는 마을 한복판에 터를 잡고 기와집을 짓기 시작하였다.

이때 이자수는 집건축에 사용될 목재를 원동(元東)골 안에서 실어왔고 기와는 조선회령에서 사왔다. 집은 지세에 맞추어 서남 방향의 전형적인 함경도식 전통 팔간 기와집 모양으로 지었다. 그렇게 하여 탄생된 것이 현재 보존되어 오고 있는 장재촌이자수의 백년 가옥이다.

이자수가 지은 전통 팔간 기와집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나?

이자수가 지은 전통 팔간 기와집은 4면으로 된 우진각 지붕을 갖고 있는데, 용마루 두 끝과 4개의 추녀 끝이 나는 새의 깃털처럼 하늘로 치솟아 있다. 지붕은 용마루와 추녀 및 기와들로 균형적인 직선과 곡선의 조화를 이루도록 하여 대범하면서도 아름답다.

특히 이 집은 지붕에 쓰인 기와 무늬가 이색적이다. 용마루 두 끝에는 ‘수(夀)’자가 새겨진 망와(望瓦)가 하늘을 향해 치솟아 있고, 추녀 끝에는 불타는 횃불 모양의 망와가 놓여 있다. 뿐만 아니라, 처마 끝에는 삼태극과 무궁화, 진주 문양이 새겨진 막새기와가 얹혀있고, 집 정면 왼켠 귀틀 처마 끝에는 기다란 복숭아 모양의 망와가 달려있는데, 거기에는 ‘수복(壽福)’자가 또렷하게 새겨져있다. 그밖에 집 정면 오른켠 귀틀 처마 끝에도 귀신 모양의 귀면망와(鬼面望瓦)가 달려있고, 또 그 외 여러 가지 문양의 기와들이 지붕을 장식하고 있다.

기와 이외에도 이자수의 백년 가옥은 처마가 깊은 것으로도 특색을 이루고 있다. 처마를 깊게하면 여름철에 뜨거운 태양열을 차단할 수 있고, 비가 올 때에도 창문을 열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또 습기가 내부로 들어오는 것을 상당 부분 막아주며, 집벽이 빗물에 씻기는 것을 어느 정도 막아준다는 이점을 갖고 있다.

그 밖에도 백년 가옥은 귀틀 기둥 외에 집벽의 정면과 뒷면에 각 4대의 통나무 기둥이 세워져 있다. 그리고 좌우면에는 한대의 통나무 기둥이 세워져 있는데, 귀틀과 기둥들은 모두 커다란 천연석 위에 고정되어 있다. 벽체는 수숫대와 나무오리로 산자를 엮고, 그 안팎에 초벽과 사벽을 한 산자벽이고, 벽 안팎에 모두 새하얀 회칠이 되어 있다.

이자수의 백년 가옥을 더 살펴보자. 앞 벽의 왼쪽 귀틀과 두 기둥 사이에는 두꺼운 통널판을 깐 넓직한 툇마루가 있다. 한웃방과 웃방 가운데 각기 출입문이 있고, 웃방 출입문 곁에는 되창이 달려 있다. 그리고 앞 벽 가운데의 두 기둥 사이에는 정주간(鼎廚間)과 부엌간 출입문이 나있는데, 정주간의 내부 온도를 높이기 위해 정주간 출입문을 창문으로 고쳐 단 것으로 보인다. 그 밖에도 앞 벽 오른켠 귀틀과 첫번째 기둥사이에 방앗간문이 달려있다.

집 내부 구성은 평면도를 보면 더 쉽게 알 수 있다. 이 집은 부엌간과 정주간이 통칸으로 되어있다. 부엌에서 땐 불의 연기가 구들을 거쳐 실내를 덥히고 굴뚝으로 배출된다. 이 집은 구들을 잘 놓아 최근 몇 해 동안 집이 비어 있었건만 당장 부엌에 불을 지피면 불이 잘 들어 구들이 금세 따스해지곤 한다.

백년 가옥에서 태어난 미래의 항일 열사-손자 이현극(李賢極)

1900년 음력 2월, 장재촌이자수의 팔간 기와집에서 이자수의 손자 이현극(李賢極)이 태어났다. 집안 어른들의 총애 속에 손자 이현극은 건강하게 자랐다. 이현극은 명동학교(明東學校)에 다니면서 공부도 잘하고 품성도 뛰어나 늘 칭찬을 받았다. 한편으로 매우 민첩하고 대범하여 보는 이들의 손에 땀을 쥐게 하는 행동들도 서슴지 않고 했다고 한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했던가!

언젠가 한번은 이현극이 두 명의 친구와 함께 선바위 꼭대기에 올라갔다. 그곳에서 그는 친구들에게 자신의 허리에 굵은 밧줄을 묶고 잡아당기라 하고는 자신은 밧줄에 매달려 빈 공중에서 그네를 뛰면서 선바위의 비둘기 둥지를 들추어 냈다. 이 아슬아슬한 광경을 본 마을 사람들은 놀라 고함을 질러댔고 곧바로 이자수에게 기별을 보냈다. 그때서야 이현극은 밧줄을 타고 선바위 위로 다시 올라왔다. 그의 헝겊 주머니에는 새끼 비둘기 두 마리와 비둘기 알들이 가득 들어있었다. 손자 이현극이 집에 들어서자 이자수는 손자를 바로 세워놓고 욕을 하며 회초리질을 했는데, 이때 손자를 혼내는 소리가 육도하 건너 수남둔(水南屯)에서까지 다 들릴 정도였다고 한다.

이현극은 열세 살 되던 해에 조부의 뜻대로 박금실(朴今實)을 아내로 맞아 들였다. 열세 살 먹은 철부지 신랑이 식을 올린다고 곧바로 철이 들 수는 없는 법이다. 결혼식 날, 식을 마치고 마당에 앉아있는데 참새들이 이현극의 머리 위로 날아갔다. 그러자 그는 벌떡 일어나 신랑복 웃옷을 벗어 휘저으며 날아가는 참새를 잡겠다고 한참이나 쫓아다녔다. 이 모습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동네 사람들이 포복절도 했다고 한다.

이현극은 어릴 적부터 남다른 구석이 있었고, 무엇보다 대범함을 지닌 인물이었다. 시국이 어수선하던 시절, 그도 마침내 영웅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백년 가옥의 영웅, 이현극, 항일의 꿈을 펼치다!

어려부터 대범했던 백년 가옥의 손자, 이현극! 그는 시대를 외면하지 못하고 험난한 길을 택하고 말았다. 1919년 3월 13일 용정 3·13 반일 운동의 시련을 겪은 이현극은 점차 반일 구국 활동(反日救國活動)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이 무렵 이자수는 밤색 말을 기르고 있었다. 그는 항상 기마복을 떨쳐 입고 위풍당당하게 용정, 연길을 오갔다. 하루는 이현극이 밤색 말을 타보겠다며 조부를 조른 끝에 말을 몰고 외출을 나갔다. 그런데 그는 한밤중에 홀몸으로 돌아와서는 말을 잃어버렸다고 할아버지에게 시치미를 뗐다. 그는 남몰래 그 말을 군자금으로 반일 조직에 헌납(獻納)하였던 것이다. 머리 끝까지 부아가 치솟은 조부가 화를 내었지만, 일이 탄로 나면 좋지 않을 듯하여 그는 이를 밝히지 않았다고 한다.

연변의 상황은 일제의 본격적인 무력 개입으로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1920년 10월 20일 오전 11시 40분 일본군이 경신년 토벌(庚申年 討伐)을 하면서 명동학교를 불사르고 무고한 양민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이에 이자수는 손자가 잡힐 것을 우려해 나뭇가지 속에 그를 숨겨두고 근심하였다. 하지만 상황이 어려워지자 이자수는 비장한 결심을 하고 이튿날 제일 좋은 황소를 팔아 이현극을 천진(天津)으로 피신시켰다.

천진에 이른 이현극은 친구의 도움으로 중학교를 다니면서 지하 항일 운동에 몰두하였다. 그때 천진에는 항일 운동에 참여한 한인 열혈 청년들이 많았다. 천진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이현극은 북경에 들어가 북경 외국어 대학(北京外國語大學)에 입학하여 공부하면서 계속 지하 항일 운동에 종사하였다. 졸업을 몇 달 앞둔 때에 대학에서 학생들의 합법적인 권리를 박탈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이현극은 앞장서서 학생들을 조직하여 동맹 휴학을 선포하고 학긴생 폭동을 일으켰다. 학교 당국은 경찰과 연합하여 학생 운동을 진압하였고, 이현극 등 세 명의 학생 운동 조직자들을 퇴학 조치시켰다. 이현극의 왼쪽 볼에 난 기다란 흉터는 그때 칼에 찍혀서 생긴 것이다.

그 후 이현극은 다시 시험을 쳐서 북경 화북 대학(北京華北大學)에 입학했다. 몇 년 후 졸업증을 받은 이현극은 북경의 어느 한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되었다. 안정된 직장을 얻자 이현극은 아내를 북경에 데려다 함께 살면서 딸 정옥(貞玉)과 영옥(英玉)을 얻었다.

그러나 안정된 삶도 잠시였다. 1933년 여름, 북경에서 이현극은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2년 형을 언도받고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이현극의 부인은 남편 친구들의 도움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고향 장재촌으로 돌아왔다. 북경에서 감옥살이를 하던 이현극은 일본 천황이 태자를 낳은 기념으로 특별 사면령이 내려졌던 덕에 14개월 만에 감옥에서 풀려나 1935년에 고향인 장재촌으로 돌아왔다.

고향에 와 있는 동안 이현극의 학력 배경을 듣고 용정이나 연길에서 직장을 제안하는 사람들이 다녀가곤 했다. 그러나 이현극은 일본 사람을 위한 일은 안 한다면서 모든 것을 거절하였다. 그 후 사립 명동학교와 학부모들의 반복되는 간청으로 1936년부터 1938년 사이에 명동학교 교장을 맡으면서 한때 민족 인재 양성에 헌신하기도 했다. 한편 이현극의 딸 영옥은 1939년에 명동학교에 입학 했는데, 그때 이현극은 이미 사퇴를 하고 일본 사람이 명동학교 교장을 맡고 있는 때였다.

백년 가옥 이자수 가문에 불어 닥친 시련들

1942년 음력 9월, 이자수는 병으로 인해 82세를 끝으로 팔간 기와집에서 사망하였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그해 음력 11월 초에 증손녀 이영옥이 감기로 앓아눕게 되었고, 얼마 안 있어 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알 수 없는 이유로 병마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영옥은 다행히 병을 이기고 일어났으나, 알고 보니 이들은 전염병에 걸린 것이었다. 결국 이현극 부부는 그해 음력 11월 7일과 11일에 각기 사망하고 말았다. 나중에 전해진 이야기에 따르면, 감옥에서 얻은 미열로 인해 이현극은 사망할 때 온몸에 검붉은 자열이 가득했다고 한다. 이현극 부부가 전염병으로 사망했던 탓에 가까운 친척들만이 모여 관을 발구로 실어 동네 사람들이 파놓은 묘혈에 묻어 장사를 지냈다.

이현극 부부의 죽음은 이자수 집안에 닥친 큰 재앙과도 같았다. 이영옥이 5살 되던 해에 조부[이현극의 부친]도 사망하였기에 이제 이자수의 집안에는 누워있는 증조모와 언니 이정옥, 그리고 남동생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집의 기둥이 쓰러지자 이자수 집안의 가세는 점차 기울어져 나중에는 파산되는 처지에 이르고 말았다.

1945년 8월, 광복이 되자 증손녀 이영옥은 팔간 기와집을 같은 동네의 이범춘(李範春)이란 사람한테 팔고 화룡현 평강(和龍縣 平崗)으로 이사를 갔다. 이영옥의 조모는 후손들에게 물려주겠다며 집을 판 돈 전부를 털어 땅을 샀다. 그러나 토지 개혁이 진행되면서 그 땅마저 무상으로 초급사(初級社)에 들어가는 바람에 빈털털이가 되고 말았다. 그 후 이영옥은 노두구(老頭溝)로 이사하였다. 그곳에서 그녀는 1952년 노두구 아마 공장에 취직을 하였고, 1976년에 조양천(朝陽川) 술공장에서 퇴직을 하였다.

장재촌의 상징이자 자랑, 백년 가옥이여 영원하라!

장재촌이자수의 팔간 기와집은 장재촌 한인 이주 개척사의 상징이자 자랑이다. 그 백년 가옥 자체만으로도 장재촌의 한인 공동체는 가슴 뿌듯한 자부심을 느낀다.

장재촌에 남아 있는 이자수의 백년 가옥은 일부 건물들이 소실되어 있는 상태이다. 과거에는 몇 동의 건물이 더 딸려 있었다. 현재 남아있는 본채를 중심으로 왼쪽 편에는 본채와 크기가 비슷한 기와를 얹은 사랑채가 있었다. 사람들이 출입을 하며 집물과 식량 등을 보관했던 곳이다. 그리고 본채 오른 편에도 커다란 초가집 사랑채가 있었다. 그곳에는 소와 말을 기르는 외양간이 있고, 말이나 소가 끄는 커다란 연자방아나 발방아, 절구도 놓여있었다. 마당도 지금보다 훨씬 더 넓었고, 지금의 수레길이나 커다란 비술나무도 모두 집 마당 안에 속하였다. 그래서 단오가 되면 이현극이 마당의 비술나무에 그네를 매어 놓고 이영옥 자매에게 그네를 태워주곤 했다고 한다.

그 후 장재촌이자수의 백년 가옥은 주인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 세월이 흘러 지금은 팔간 기와집 한 채만 남았고, 집안과 창문, 외양간과 방앗간, 집마당도 많이 변하였다. 2006년에 장재촌의 김범춘(金範春)이 그 당시 거주자였던 이종순(李宗順)에게서 백년 가옥을 구입하였다. 그는 지금까지 마치 대를 이어 살아 온 집안의 후손처럼 백년 가옥을 잘 가꾸고 지켜오고 있다.

참고문헌
  • 『중국 길림성 한인 동포의 생활문화』(국립 민속 박물관, 1996)
  • 북경 대학 조선 문화 연구소, 『중국 조선 민족 문화사 대계 7. 민속사』(연변대학, 2000)
  • 김광택, 「연변 조선족 전통 건축 문화의 현주소」(『예술 세계』제4기, 연변인민출판사, 2010)
  • 인터뷰(길림성 용정시 이영옥, 여, 2006. 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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