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특별한 이야기

일제의 만행이 드러난 대참사, 경신년(1920년) 혼춘 사건

한자 日帝의 蠻行이 드러난 大慘事, 庚申年 琿春 事件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혼춘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무기를 들고 일어선 간도와 극동의 한민족들

아침 해가 점점 높아지더니 이내 혼춘시 공안국 건물의 창문들을 뜨겁게 달구기 시작한다. 혼춘시 인민 정부와 연결된 신안(新安) 거리의 중간쯤에 위치한 시 공안국 자리에는 몇 해 전까지만 해도 과거 일제가 세웠던 일본 총영사관 분관이 자리잡고 있었다. 최근 일본 총영사관 분관은 철거되었고, 그 자리에 지금은 현대식으로 지은 밝은 회색 빛깔의 시 공안국이 들어서 있다. 시 공안국 건물은 일제의 잔존을 완전히 씻어내기라도 하려는 듯 크고 웅장하게 지어져 있다.

시 공안국 건물 앞 넓은 대로에는 지나는 차량으로 복잡하기만 하다.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사거리에는 정복을 한 여경이 교통 수신호를 보내며 계속해서 교통상황을 지휘하고 있다. 그 길을 따라 얼마간의 거리를 가니 큰 사거리 모서리에 현대식으로 지어진 혼춘시 병원이 보인다. 혼춘시 시공안국에서 혼춘시 병원으로 이어지는 거리와 그 일대가 바로 1920년 9∼10월에 발생했던 처참한 ‘혼춘 사건(琿春事件)’의 현장이다.

혼춘 사건은 예고된 사건이었다. 원인은 일제의 끝없는 대륙 침탈 야욕이었고, 사건의 가시적인 시작점은 1919년에 한반도와 간도, 그리고 연해주에서 일어난 ‘3·1 만세 운동’이었다. 3·1 만세 운동에 일제도 놀랐고, 한반도와 해외의 모든 한민족도 놀랐다. 그 후 간도와 연해주의 한민족 사회는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일제는 채찍과 회유책으로 더 교묘한 식민 정책들을 시행해 나갔고, 한민족들은 펜과 더불어 총을 들고 무장하기 시작했다. 3·13 만세 운동 이후 연변 일대에서는 간도 국민회(間島國民會)[대한 국민회], 대한 군정서(大韓軍政署), 대한 독립군(大韓獨立軍) 등이 조직되었고, 애국 계몽 운동과 무장 투쟁이 조직화되어 갔다.

1920년 1월, 새해 벽두부터 간도에서는 철혈 광복단(鐵血光復團) 청년들이 주도한 ‘15만원 탈취 사건’이 발생했다. 이어지는 3월, 하바로프스크(Khabarovsk) 북동부에 위치한 항구 도시 니콜라예프스크-나-아무레(Nikolaevsk-na-Amure)[니항(尼港)]에서 러시아인 및 한인 빨치산 부대에 의해 일제가 참패를 당한 일명 ‘니항 사건(尼港事件, 니콜라옙스크 사건)’이 발생했고, 이에 대한 보복으로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와 우수리스크(Ussurisk) 일대의 한인 사회를 중심으로 일제에 의해 ‘4월 참변’[경신 참변]이 발생했다. 다시 1920년 6월 4~7일 간도에서 벌어진 ‘봉오동 전투(鳳梧洞戰鬪)’의 승리로 한민족은 앞서 자행된 일제의 학살 만행에 대해 조금이나마 울분을 씻었다. 혼춘 사건과 이어진 경신 참변[경신년 대토벌(庚申年大討伐)]은 이렇게 1919년 3·1 만세 운동-15만원 탈취 사건-니항 사건-4월 참변-봉오동 전투로 이어지는 시소게임과 같은 일련의 사건들의 연장선상에서 발생한 대형 참사였다.

혼춘 사건의 현장인 혼춘시 병원 앞 대로와 사거리에는 오가는 차량과 사람들로 분주하다. 역사의 현장은 말이 없다. 그러나 말이 없다고 잊혀진 것은 아니다. 왜 그토록 일제는 피에 집착했을까?

혼춘 사건의 도화선, 빛나는 봉오동 전투

봉오동 전투는 혼춘 사건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된 전투였다. 1920년 초부터 봉오동·안산촌(安山村)·걸만동(傑滿洞) 일대에서 활동하던 신민단(新民團)은 수시로 두만강을 넘어 국내의 일본군 수비대에 타격을 주었다. 1920년 6월 4일, 신민단의 박승길(朴昇吉) 소대장은 30명의 항일 독립군을 이끌고 삼둔자(三屯子)에서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鍾城郡 江陽洞)에 있는 일본 헌병 순찰 소대를 기습한 후 귀환했다. 봉오동 전투의 서막이 오른 것이다. 이에 조선함경북도 남양에서 주둔 중이던 일본군 아라요시[新美二郞] 중위는 남양 수비대(南陽守備隊)와 헌병 경찰 중대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보복적인 토벌을 감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본군은 초반 토벌 작전에서 소기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또 6월 6일 밤에 일광산(日光山)에서 숙영 중이던 아라요시 부대가 기습을 받게 되자 아라요시 중위는 급히 사령부에 증원군을 요청했다. 이에 함경북도 나남에 주둔 중이던 일본군 19사단 사령부는 한인 항일 부대들을 완전히 토벌한다는 계획으로 73 연대야스가와[安川二郞] 소좌(少佐)를 책임자로 이른바 월강 추격대대(越江追擊大隊)를 편성하였다. 이후 월강 추격대대가 두만강을 건너면서 한인 항일 독립 부대들에 대한 본격적인 토벌이 시작된 것이다.

월강 추격대대의 총 병력은 보병 제73연대 10중대 70명, 기관총 1소대 27명, 보병 제75연대 2중대 123명, 헌병대 11명, 경찰대 11명, 아라요시 소대 27명 등 총 269명이었다. 월강 추격대대는 봉오동 독립 운동 기지를 초토화시키라는 19사단 사령부의 명령을 받고 6월 7일 새벽 함경북도 온성군 하탄동(下灘洞)에서 두만강을 건넜다. 그러나 그들 중 아무도 그 길이 황천길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한편 홍범도(洪範圖)최진동(崔振東)두만강을 건너 온 일본군들을 봉오동에 끌어들여 몰살시키기로 계획하고 마을의 한인들을 산중에 피신시킨 후 독립군을 봉오동 상촌 마을인 남동을 중심으로 매복토록 했다. 봉오동은 두만강에서 40리 정도 떨어져 있는데, 고려령의 험한 산줄기가 에워싸고 있고, 1500고지가 넘는 험준한 산새로 인해 천혜의 독립군 기지였다. 봉오동은 최진동 가족이 일군 곳인데, 주민들은 상촌[북촌]·중촌[남촌]·하촌 등 3개 마을에 100여 호의 민가가 흩어져 있었다. 상촌은 봉오동을 대표하는 곳으로 독립군의 훈련장이 있었다. 당시 봉오동에 집결한 독립군들은 대한 독립군 63명, 도독부군(都督府軍) 100여 명, 신민단 60여 명을 합쳐서 200여 명 정도였다.

봉오동 전투는 독립군 연합부대인 대한군북로독군부(大韓軍北路督軍府) 부장 최진동과 북로 제1군(北路第1軍) 사령부 부장 홍범도의 지휘 하에 진행되었다.

제1중대는 봉오동 상촌 서북단에, 제2중대는 동산에, 제3중대는 북산에, 제4중대는 서산 남단에, 이흥수(李興秀)가 지휘하는 신민단은 남산에 각기 배치했고, 본인은 2개 중대를 인솔하여 서산 북단에 매복했다. 이어 제2중대 3소대 1분대장 이화일(李化日)에게 1분대를 거느리고 고려령(高麗嶺) 북쪽 약 1,200m 지점의 고려둔(高麗屯) 마을 앞에 잠복하고 있다가 일본군을 매복권 내로 유인해 오도록 지시했다. 치고 빠지는 식의 유인책에 걸려든 일본군 월강 추격대대가 오후 1시경에 모두 상촌 마을에 들어섰다. 홍범도의 공격을 알리는 신호탄이 울리자 서산과 동산 쪽에 매복해 있던 독립군들의 총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일본군들은 우수한 화기를 앞세워 반격에 나섰지만 꼼꼼하게 짜여진 매복망을 뚫기란 불가능했다.

독립군들의 교차 사격 속에 일본군들은 나뒹굴기 시작했고, 독립군들의 총구는 쉬지 않고 불을 뿜었다. 그렇게 매복 기습전은 3시간 남짓 진행되었다. 오후 4시 20분쯤이 되어서 장대비가 내리기 시작하며 총성이 멎었다. 생존한 일본군들은 황급히 비파동(琵琶洞)을 거쳐 온성 유원진(柔遠鎭)으로 도망쳤다.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당시 일본군 화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막강 그 자체였다. 이에 구한말의 의병 전투를 포함, 대부분의 항일 무장 전투는 전면전이 아닌 게릴라식 전투였다. 그런 면에서 봉오동 전투는 3·13 항일 운동 이후 장기간에 걸쳐서 준비해 오던 간도 지역 항일 무장 단체들이 일본군과의 직접적인 교전에서 얻은 승리라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니고 있다.

혼춘 사건 도발을 위해 마적 두목 장강호(長江好)를 매수하는 일제

1920년 6월 독립군의 봉오동 전투 승리는 일제를 쇼크 상태로 몰아넣었다. 봉오동 전투 승리 이후 독립군 단체는 그 여세를 몰아 통합과 공조 체제를 굳건히 다져 나갔다. 반면 일제는 한인 사회의 항일 투쟁을 질식시키고, 독립군 근거지를 없애고자 이를 갈았다. 일제는 1920년 7월, 동북 군벌 장작림(張作霖)을 매수하여 한인 독립군 단체를 완전히 궤멸시키고, 나아가 중국 동북 지역을 완전히 잠식하기 위해 천인 공로할 학살 계획을 세웠다. 이른바 혼춘 사건을 일으킬 빌미를 찾았다.

1920년 6월 일제는 봉오동 전투 패배 이후 장작림을 협박하여 중국군으로 하여금 한인 독립군 단체를 토벌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중국 주재 일본 공사 고하다는 그해 8월 중국 외교 총장에게 불평이 담긴 다음과 같은 각서를 보냈다.

“봉천성에서 압록강 북안 불령 선인(不逞鮮人)에 대한 탄압은 어느 정도 효과를 보았으나 불령선인이 가장 횡포하고 유력한 근거지를 가지고 있는 간도는 아직도 방임한 상태에 처해 있다. 만약 중국 지방 당국에서 계속 적당한 조치를 강구하지 않으면 일본은 부득불 독자적으로 불령 선인들의 소굴을 초토하기 위해 자위책을 취하겠다”

일제가 말하는 자위책이란 일본군의 '간도 출병'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1920년 8월 15일, 일제는 경성 회의를 개최하여 일지(日支: 일본과 중국) 협동 토벌을 적극 추진하기로 결의하고, 일본군이 대부대 작전을 개시한다는 방침 하에 ‘간도 지방 불령선인 초토 계획(間島地方不逞鮮人剿討計劃)’을 작성했다. ‘간도 지방 불령선인 초토 계획’은 크게 총칙·출동·병기·통신·보급·징용 등 6개 부분으로 나누어 총 23개 항목으로 구성되었다. 일제는 초토 구역을 혼춘-초모정자(草帽頂子), 서대파(西大坡)-하마탕(蛤蟆塘)-백초구(百草溝), 용정촌-대굴훈-국자가(局子街), 광포-두도구(頭道溝) 등 4개 지역으로 설정하고, 초토 대상은 항일 무장 단체뿐만 아니라 해당 지역의 불령 한인과 이에 동조한 마적 및 기타 세력으로 정했다. 그야말로 일제는 한인 사회 전체를 토벌하려는 끔찍한 계획을 세워놓고 ‘간도 출병’의 기회만을 엿보았다.

1~2차 혼춘 사건의 전말

1920년 9월, 일제는 간도 출병의 구실을 만들고자 조선 총독부 경무국에서 동북 지구의 마적 두목 장강호를 매수했다. 일제는 그들에게 무기를 공급해 주고 동북 지역 한인 독립군 단체와 근거지를 습격하도록 종용했다. 1920년 9월 12일 아침, 3~400명에 달하는 비적들이 네 갈래로 나누어 혼춘현성을 포위 공격을 했다. 비적들은 먼저 변방초소에 불을 지르고, 관은전호(官銀錢號)[금융기관, 은행]·현(縣) 공서[관공서]·세연국(稅捐局)[세무서]·교육국·전보국 등 기관시설에 쳐들어가 닥치는 대로 약탈했다. 그 와중에 상부지 내의 가옥 200여 채가 불타고, 1,500만 조에 해당하는 재물이 약탈되었으며, 80∼90여 명의 무고한 양민들이 납치를 당했다. 이것이 이른바 1차 혼춘 사건의 전말이다.

혼춘 사건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해 9월 30일, 일제의 사주를 받은 고산(靠山)의 부하 진동(鎭東)을 우두머리로 한 만순(萬順)·쌍양(雙羊)·만천비(滿天飛) 등의 마적단이 혼춘현 황구(荒溝)에 주둔 중인 공병 제4중대를 습격하고 20여 명의 병사들을 포로로 잡아갔다. 이어 10월 2일 새벽 4시에는 40여 명의 마적들이 기관총과 대포를 앞세우고 동서 두 방향으로 나누어 재차 혼춘현성을 공격했다. 마적들은 1차 때와는 달리 입성한 후 곧바로 일본 영사분관을 공격했다. 그들은 우세한 화력으로 일본 영사분관의 호위대를 제압하고 담장을 폭파한 뒤 영사관 내에 들어가 불을 질렀다. 현 동대문으로 입성한 마적들도 중국 관병들의 방어선을 뚫고 상부지에 쳐들어 가 닥치는 대로 살인, 방화하였다. 아침 8시가 되어서야 마적들은 동북과 서북 두 갈래로 나뉘어 노흑산(老黑山) 방향으로 철수했다.

이것이 바로 2차 혼춘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일본 영사분관 건물을 비롯하여 상점 6개가 전소되었고, 일본인 11명과 한인 6명이 살해되었으며, 200여 명의 무고한 양민들이 납치를 당했다. 간악한 일제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간도로 출병하는 일본군들, 마침내 침략의 날선 이빨을 드러내다!

일제는 자신들이 계획한 중국 대륙 정복의 꿈을 이루기 위해 인간이기를 포기하였다. 일제는 두 차례의 조작한 혼춘 사건을 빌미로 당일 경원 수비대를 선두로 마침내 간도 출병, 즉 연변 침입 작전을 개시했다. 1920년 10월 6일,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齊藤實]는 우치다 고사이[內田康哉]에게 형식적으로 간도 출병을 요청했고, 일본 내각에서는 신속하게 출병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1920년 10월 9일, 육군대신 명의로 조선군 사령관에게 출병 명령을 하달했고, 각종 구체적인 작전 명령이 육군 참모 총장을 통해 조선군 사령부와 그 예하 부대로 재빨리 하달되었다.

연변을 침략한 일본군은 남으로는 조선군(朝鮮軍) 19사단과 20사단 78연대, 동으로는 우라시오 파견군[포조 파견군(浦潮派遣軍)] 11, 13, 14사단, 북으로는 북만주 파견대의 안자이 지대[안서 지대(安西支隊), 서로는 관동군(關東軍) 19연대와 기병 제20연대 등, 총 2만여 명에 달했다. 일본군은 사방을 포위하면서 연변 지역으로 밀고 들어왔다. 이 중 주력 부대인 19사단은 다시 이소바야시 지대[磯林直明支隊][혼춘-나자구(羅子溝)-삼차구(三侘口) 일대], 기무라 지대[木村益三支隊][서대파-십리평(十里坪)-대감자(大坎子)-백초구-하마탕-의란구(依蘭溝)-팔도구(八道溝) 일대], 아즈마 지대[東正彥支隊][용정-국자가-천보산-이도구(二道溝)-삼도구(三道溝) 일대], 사단 직할 부대[통신 비행, 병참 보급], 국경 수비대[두만강 대안 일대], 그리고 우라시오 파견군의 14사단[혼춘 및 용정 일대], 토문자 지대(土門子支隊)[토문자 일대], 하이리 지대[나자구-이도구-이십팔도구하자 일대], 북만주 파견대안자이 지대[팔가자 일대]로 나뉘어 각자의 토벌 구역에서 작전을 수행했다.

일본군의 연변 침략에 중국 정부는 일본측에 강하게 항의했다. 중국 정부는 출병을 중지하고 병력 철수를 일본측에 강력히 요구했으나 일본측은 이를 무시하고 계속 군대를 증파해 나갔다. 그들은 이미 1920년 4월에 연해주에서 이와 같은 참혹한 ‘4월 참변’을 일으켜 수많은 양민들을 학살한 경험이 있었다. 1920년 3월에 일제는 연해주 하바로프스크 북동부에 위치한 항구 도시 니콜라예프스크 나 아무레[니항]에서 당한 참패를 만회하기 위해 일본은 그해 4월 4~5일 새벽에 연해주 블라디보스톡과 우수리스크 일대에서 피의 학살 작전을 자행했던 것이다.

경신 참변의 불길 속에 휩싸인 조선인 마을들

중국 침략의 기회를 엿보던 일제는 1920년 9~10월에 자행한 1~2차혼춘 사건을 빌미로 마침내 무력 침탈의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크게 연변과 남만, 장백현 지역에서 토벌 작전을 벌였다. 연변 지역에서의 일제의 동선을 따라가 보자. 이소바야시 지대는 그해 10월 13일 혼춘에 집결한 후 다시 3개의 토벌대로 편성하고 이튿날 밤부터 혼춘과 나자구 일대 한인 마을에 대한 1차 토벌을 개시했다. 제1 토벌대는 혼춘 동북부 지역의 28개 한인 마을들을 습격하여 28명을 체포하고 그 중 4명을 사살했으며, 제2, 3 토벌대는 3명을 사살하고 4명을 체포했다.

기무라 지대는 1920년 10월 20일에 온성 부근에서 국경을 넘은 후 22일에 서대파·십리평·석두하자(石頭河子) 일대에서 작전을 감행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49명을 사살하고 십리평의 무관 학교와 인근 마을들을 소각했다. 11월 30일의 일본군측 자료에 따르면, 기무라 지대는 토벌 작전에서 86명을 사살하고 132명을 설복 귀순시켰으며, 2개 학교와 민가 103채를 소각했다고 한다.

한편 일본군 국경 수비대는 주로 두만강 연안의 수비를 강화하며 헌병대 및 경관대와 함께 수시로 국경 대안에 침입하여 한인 마을들을 습격했다. 또한 회령 수비대는 10월 19일 학성·송언·무관툰을 습격하여 한인 10명을 사살하고 시체에 석유를 뿌린 후 방화했다. 종성 수비대 또한 10월 19일과 21일에 대안에 있는 한인 마을을 습격하여 17명의 무고한 주민을 살해했다. 일본군 통계 자료에 따르면, 국경 수비대에 의해 1920년 10월 17일부터 12월 20일 사이에 한인 107명이 사살되고 민가 94채와 학교 3개소가 전소되었다.

일본군 토벌대의 만행은 여기서 그치는 않는다. 아즈마 지대는 1920년 10월 15일 부대를 편성한 후 10월 17일 천보산 방면으로 출동하려다가 청산리와 이도구 일대에서 항일 부대들이 집결해 있다는 첩보를 접수하고 야마다 토벌대를 청산리 일대에 급파했다. 이어 아즈마는 주력군을 이끌고 이도구로 이동하여 남, 북 완루구(完樓溝)에 있는 홍범도 부대를 포위했다. 하지만 10월 21일부터 26일 기간에 청산리와 어랑촌(漁浪村) 일대에서 전개된 항일 부대들과의 전투, 즉 김좌진(金佐鎭)이 이끄는 청산리 전투에서 아즈마 지대는 오히려 항일 부대들의 매복과 기습에 걸려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백운평 사건(白雲坪事件)과 장암동 사건(獐岩洞事件)을 통해 본 일제의 잔악상

청산리 전투에서 대패한 후 일본군 토벌의 성격은 보복성 만행으로 바뀌었다. 그로 인해 도처에서 반인륜적 범죄 행위들이 무자비하게 행해졌다. 일본군들은 10월 26일 연길현의 동불사(銅佛寺)·태평구·와룡동(臥龍洞)·소영자·의란구를 비롯한 23개 마을과 흥동 학교(興東學校)·영신 학교(永新學校)·명신 학교(明信學校) 등의 18개 학교, 그리고 화룡현의 상광포(上廣浦)·어랑촌·유동·청산리·청파호·장재촌·걸만동 등의 12개 마을과 명동학교·창동 학교·광동 학교·정동 학교 등 19개 학교, 왕청현의 유수하·대감자·덕원리·서대파·봉오동·합수평·나자구 등의 11개 마을과 명동 소학교, 원동 소학교 등의 5개 학교를 대상으로 대대적인 소탕과 학살을 감행했다. 『연변 조사 실록』에는 그때의 참혹상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일본 침략자들은 도처에서 한인 촌락에 대하여 위협, 공갈하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조리 집안에 가둔 채 불을 질러 태워 죽였다. 그리고 무릇 불속에서 뛰쳐 나오는 자가 있으면 즉시 총칼로 찔러 죽이거나 땅굴을 파서 생매장 하였다.”

이러한 일본군의 행위가 그해 4월에 연해주에서의 4월 참변 과정에서 보여주었던 반인륜적인 행위와 너무도 똑같았다. 중국 지방 관원인 장순사(張巡師)와 포대사(鮑大師) 등이 1920년 11월 5일 외교 총장에게 보낸 서한에도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며 그때의 참상이 기록되어 있다.

“간민들이 모여 사는 부락을 한당(韓党)들의 근거지라고 하면서 온 마을을 불살라버렸으며, 한민들 대부분이 살해되었다.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마을들을 골라서 몇 집 또는 몇 십 집씩 불살랐고, 몇 명 또는 몇 십 명씩 죽였다. 가는 곳마다 불타버린 집과 시체가 널려있었다. 이들은 태반이 밭가는 농민들이었지 결코 무기를 들고 떼를 지어 소란을 피우는 무리가 아니었다. 이렇게 마음대로 참살하는 것은 실로 인간성이라곤 털끝만치는 없는 일이다.”

경신참변 당시 일본군들은 무고한 조선인들을 이른바 ‘독립군’이란 혐의를 씌워 무차별 학살을 감행했다. 일본군들이 경신 참변에서 저지른 야수적인 만행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데, 그 중에서 몇 가지 사례만 살펴보자.

첫 번째는 백운평 사건의 사례이다. 1920년 10월 21일, 백운평 전투에서 패한 일본군은 백운평 마을의 32세대 여자들을 모두 밖으로 나오게 한 뒤 남자들은 나이를 불문하고 모두 집안에 가둔 채 불태워 죽였다. 혹시라도 밖으로 나오는 자가 있으면 총창으로 사정없이 찌르고 총을 난사했다. 당시 친일 단체였던 조선인 거류민회 보고서는 “여자들을 제외한 모든 남성들은 늙은이나 어린이나 전부 살해되었다. 심지어 4∼5세 [남자] 유아까지도 불행을 면치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화룡현 공서의 「조사 보고서」에도 “청산자 골짜기에서 조선인 가옥 32채가 부에 탔고 52명이 불에 타죽었다. (중략) 이들의 가옥과 양식은 몽땅 불에 타 남은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두 번째는 장암동 사건의 사례이다. 용정 영국더기 내의 제창 병원 원장 마틴(Stanly F.Martin)[한국명 규심발(閨心潑) 박사]이 쓴 견문기에는 1920년 10월 30일에 일어난 장안동 사건을 상세히 기록해 놨다. 영국더기는 용정 안의 ‘작은 영국 땅’, 즉 당시 중국에서 활동하던 어떠한 외세 열강들의 영향이 미치지 못했던 ‘영국 조계지’를 의미한다.

“날이 밝아오자 무장한 일본 보병들은 예수촌을 빈틈없이 포위하고 골짜기에 높이 쌓아놓은 낟가리에 불을 질렀다. 이후 모든 촌민을 밖으로 나오게 호령하고는 나오는 사람마다 아버지고 아들이고 헤아리지 않고 눈이 띄면 마구 사격하였다. 아직 숨이 떨어지지 않은 부상자도 관계치 않고 그저 총에 맞아 쓰러진 사람이면 모두 마른 짚을 덮어 놓고 식별할 수 없을 정도로 불태웠다. 어머니와 처자들은 마을 청년 남자 모두가 처형당하는 것을 강제적으로 목격하게 하였다. 가옥은 전부 불에 타 마을은 연기로 뒤덮였는데, 그 연기는 용정촌에서도 보였다. (중략) 마을에서 불은 36시간이 지나서도 계속 타고 있었고 사람이 타는 냄새도 나고 집이 무너지는 소리도 들렸다' (중략) 알몸의 젖먹이를 업은 여인이 새 무덤 앞에서 구슬프게 울고 있었다. (중략) 큰 나무 아래의 교회당은 재만 남고 두 채로 지은 학교도 같은 운명이 되었다. 새로 만든 무덤을 세어 보니 31개였다. (중략) 다른 두 마을을 방문했다. 불탄 집 19채와 무덤과 시체 36구를 목격했다.”

장암동 사건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튿날 일본군 17명은 다시 장암동에 들어와 유가족을 강박하여 무덤을 파헤치고 채 타지 않은 시체들을 다시 꺼낸 후 소각하는 이중 살해의 만행을 저질렀다. 백운평 사건과 장암동 사건 외에도 도처에서 이와 유사한 참담한 사건들이 일본군들에 의해서 자행되었다. 연길현 제3구 고당구의 한인 이씨 집성촌이나 춘양향[현재 왕청현 하마탕], 화룡현의 개운툰 마을, 혼춘현 회룡봉 마을, 왕청현 탁반구 지역 등에서도 무고한 한인들에 대한 끔찍한 학살과 살인이 자행되었다.

1920년 10월 14일~11월 20일 기간의 이른바 ‘경신참변’ 과정에서 피해 규모는 정확하지는 않다. 당시의 사건을 다룬 보고서나 기록물들이 여럿 있는데, 『독립 신문』 제92호의 「간도 참상에 대한 후속 보도」 기사에 실린 통계 자료가 가장 근접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신문 기사에 피살 3,664명, 체포 155명이고, 재산 피해 정도는 민가 3,520채, 학교 59개소, 교회당 19개소, 그리고 곡물 59,970섬이 방화 및 약탈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아픔을 딪고 일어서는 한민족의 후예들!

1920년은 그 어느 해보다도 폭풍과도 같았던 한 해였다. 너무도 엄청난 사건과 만행들이 중국과 러시아의 한민족 사회 속에서 마치 쓰나미처럼 휩쓸고 지나갔다. 일제의 무자비한 경신년 대토벌의 흔적은 중국 동북 지방 곳곳에 남아 있다. 그곳은 역사적인 아픔이 서린 곳으로 현대인들의 큰 교훈이 되어 주고 있다.

일제가 1920년 9~10월 자행한 1, 2차의 혼춘 사건과 그 후에 일어난 경신 참변은 100년이 지난 지금도 중국인 및 한인 사회의 기억 속에 또렷이 남아 있다. 이 사건은 일제의 대륙 침략의 서막에 불과했다. 일제는 그 여세를 몰아 만주 사변[1931]과 중일 전쟁[1937]을 일으켰고, 이를 통해 중국을 제압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들은 두 개의 원자 폭탄이 떨어질 때까지 자신들의 종말 또한 가까이에 다가왔음을 알지 못하였다.

참고문헌
  • 연변조선족자치주 위원회 문사 자료 위원회, 『연변 문사 자료 휘집』1(연변인민출판사, 2007)
  • 김춘선 외, 『중국 조선족 혁명 투쟁사』(연변인민출판사, 2009)
  • 김춘선, 김철수, 『중국 조선족 통사』상(연변인민출판사, 2009)
  • 독립기념관, 『1920년대 전반 만주·러시아지역 항일무장 투쟁』49권(2010)
  • 이광평, 「이주 1번지 두만강 기슭의 조선족 선배들」(『재외 한인 연구』20, 재외 한인 학회,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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