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龍井 3·13 反日 運動과 龍井 3·13 記念 事業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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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야 | 역사/근현대 |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 지역 |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100여 년 전 용정은 간도 조선인 항일 운동의 중심에 있었다. 그런 용정은 언제나 일제의 ‘허황된 꿈’ 앞에 놓여있는 장애물에 불과했다. 그러나 용정에 앞서 일제의 ‘허황된 꿈’은 한반도에 대한 침탈로부터 시작되었다. 1905년 11월 을사 늑약으로 한반도의 운명이 기울어가기 시작하며 간도와 연해주에서 항일 운동의 불길이 타올랐다.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이 터지자 급기야 일제는 주권 국가인 한 나라의 군주를 강제로 퇴위시켰다. 피가 끓고 심장이 터지도록 통탄할 일이다. 뜻있는 지식인들과 항일 인사들, 그리고 해산 당한 군인들의 망명의 물결이 간도와 연해주로 이어졌다. 통감 정치로 한반도의 운명은 풍전등화에 놓이고, 간도와 연해주의 한민족들은 마침내 손에 총을 들기 시작했다.
1907년 8월, 용정에 조선 통감부 간도 파출소가 세워지던 무렵, 간도와 연해주에서는 의병들의 총구가 마침내 불을 뿜기 시작했다. 이른바 처절한 의병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1908년 한 해에만 일본군들과 1,451회의 무장 충돌이 있었고, 의병수가 69,804명에 달했을 정도로 간도와 연해주에서 의병들의 항일 투쟁은 절정에 달했다. 의병 전쟁의 중심에 용정과 블라디보스토크가 있었고, 주변의 조선인 집거지들이 의병들의 군자금과 의병 투쟁의 근거지가 되어 주었다. 일제의 ‘허황된 꿈’ 앞에 결코 쉽지 않은 복병들이 나타난 것이다. 마침내 일제와의 기나긴 투쟁이 시작된 것이다.
19세기 말부터 1945년 8월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되는 순간까지 동아시아의 근현대사는 일제의 반인륜적인 만행과 학살로 점철되어 있다. 일제는 그야말로 제국주의 열강들 중에서도 가장 악랄하고, 오로지 한반도와 대륙 침탈과 점령에만 눈이 먼 ‘악의 축’이었다. 그들은 섬나라를 벗어날 수 있으리란 허황된 꿈을 꾸고 있었고, 그 허황된 꿈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과 주변 나라들에게 씻지 못할 죄를 짓고 말았다. 지금도 적지 않은 부류가 허황된 과거의 향수를 그리워하고 있다.
1919년 3월, 일제의 우세한 화력 앞에 숨죽여 오던 한반도와 간도, 연해주의 한민족들이 다시 항일을 위한 몸부림이 시작되었다. 조선에서 연해주 그리고 간도에서 항일 만세 시위 운동이 발발한 것이다.
그 해 3월 13일, 간도의 용정 중심가에서도 이른바 용정 3·13 반일 운동이 발생했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부상을 당했고, 체포와 고문, 옥고를 치렀다. 그때의 끔찍했던 기억은 90년이 지나고 있건만 사라지지 않고 3·13 반일 의사릉과 함께 연변 조선족 사회의 역사적인 아픔으로 간직되어 오고 있다.
역사의 아픔과 흔적은 남겨진 자, 즉 후손들의 몫이다. 과거의 아픔을 거울삼아 다음 세대로 영원히 전달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용정에 자리 잡고 있는 용정 3·13 기념사업회가 바로 역사 보존자로서의 역할을 훌륭히 완수해 오고 있는 그 주인공이다.
민간의 사회 공익 사업이라는 것이 어떤 물질적 이득을 바라고 하는 것이 아닌데도 그들의 역사 지킴이로서의 열정은 자못 크다. 왜 그들은 그토록 내 역사 지키기에 마음을 다하고 있을까? 그들의 활동 발자취를 따라 한 세기 전 용정 조선인들의 항일 정신과 애국심을 되새겨 보는 시간을 가져보자.
1907년 8월, 용정에 조선 통감부 간도 파출소[이후 일본 총영사관]가 설치되었다. 일본 총영사관 설치는 중국 대륙에 대한 야욕을 만천하에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장기적으로는 일제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용정을 중심으로 한 북간도 조선인들의 항일 운동은 그 날부터 시작되었고, 이후 일제는 조선인들의 목숨을 건 항일 투쟁에 직면해야 했다. 허황된 꿈을 꾸고 있는 일제와 이를 막으려는 처절한 공방전이 시작된 것이다.
1919년 3월 13일, 용정 시내 한 복판에서 일제와 용정 조선인 시위대 간에 충돌이 발생했다. 이른바 역사적인 용정 3·13 반일 운동이 발생한 것이다. 이 사건은 간접적으로는 제1차 세계 대전 종전과 이어 나온 윌슨(T.W. Wilson)의 민족자결주의원칙, 이웃 러시아에서의 반봉건과 반압제의 기치를 내건 1917년 사회주의 혁명의 영향을 받아 발생했다.
그러나 해외의 한민족들에게 직접적인 투쟁의 불씨로 작용했던 것은 1919년 서울에서 발생한 3·1 만세 운동이었다. 일제의 진압으로 많은 인명이 상하고 쌍방은 격앙되었다. 서울의 만세 운동의 불씨는 삽시간에 간도로 이어졌다. 간도의 조선인 사회에서도 독립 선언서가 채택되고 항일 만세 시위의 불길이 타올랐다.
마침내 3월 13일, 용정 한복판에 3만여 명의 조선인들이 항일 집회와 시위를 위해 모여들었다. 사건 당일 날, 새벽부터 연변 각지에서 용정으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개산둔진(開山屯鎭)의 정동 학교(正東學校) 교원들과 학생들은 3월 12일 밤에 주먹밥을 싸가지고 80여 리 밤길을 걸어와 명동학교에 도착했다.
명동학교와 정동 학교 학생들 300여 명이 충렬대(忠烈隊)를 조직했다. 본래 집회 예정지는 영신 학교(永新學校) 앞 공터였으나 나중에 동북쪽으로 700m 떨어진 서전 대야(瑞甸大野)[지금의 용정 제1 유치원 부근]로 옮겨졌다.
그날, ‘정의, 인도’가 쓰인 대장기와 태극기, 중화민국기를 든 3만여 명의 간도 거류 조선인들이 서전 대야에 모여 반일 집회를 열었다. 집회는 15세 소년 임민호(林民鎬)가 울린 천주 교회당 종소리와 함께 연길 교구 목사 김영학(金永學)의 사회로 시작되었다.
김영학이 먼저 간도 거류 조선인 일동으로 된 「독립 선언 포고문」을 낭독했고, 애국 지사 유례균(劉禮均)·배형식(裴亨植)과 황지영(黃志英)[여자]이 차례로 한국·중국 두 나라 공동의 원수인 일본 제국주의의 죄악스런 침략 행위에 대해 성토 연설을 했다. 대회가 진행되는 동안 대회장에는 “대한 독립 만세!”,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자!”는 구호 소리가 수시로 울렸고, 힘차게 치켜 든 주먹들이 하늘을 향해 숲을 이루었다.
대회를 마친 시위대가 용정 주재 일본 총영사관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시위대는 비무장 상태였다. 그러나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일제가 가만히 있을 리 만무했다. 시위대가 당시의 치외 법권 범위 5층대 거리에 이르러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시위대는 저지선을 뚫고 일본 총영사관 쪽으로 진입을 시도했다. 그때 연길 주둔 중국 지방 군대와 일본 경찰들이 비무장의 시위 행렬에 총격을 가했다. 총격으로 그 자리에서 시위대 중 10명이 사망하고, 48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98명이 체포되었다. 이후 부상당한 사람 중 9명이 연이어 희생되었다.
3월 17일, 간도 거류 조선인 3천여 명이 시위 과정에서 차례로 죽은 희생자 14명을 용정 동남쪽 합성리촌(合成里村)에 자리잡은 공동 묘지에 안장하고 추모식을 가졌다.
용정 3·13 반일 운동 소식은 강풍 속의 불길처럼 북간도와 동북 지역으로 급속히 퍼져 나갔다. 그 해 5월 중순까지 북간도에서만 54회의 반일 집회와 시위 운동이 일어났는데, 그 규모가 75,500여 명에 달했다. 이는 당시 북간도에 거주한 조선인 총인구 254,000여 명의 36.6%에 해당되는 숫자였다. 그 외 동북의 조선인들이 사는 다른 곳곳에서도 반일 집회와 시위가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용정 3·13 반일 운동은 무엇보다 이후 간도 조선인들의 항일 운동의 성격을 바꾸어 놓는 데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시위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비무장 상태였고, 시위대는 그런 상태에서 무참히 짓밟혔던 것이다. 항일 인사들은 무장만이 한국의 독립을 지켜줄 것이라 믿었고, 이는 곧 무장 항일 투쟁으로 이어져 갔던 것이다.
이듬해인 1920년 1월에 새해 벽두부터 발생했던 ‘15만원 탈취 사건’은 바로 그런 무장의 필요성에서 발생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간도 곳곳에서 무장 항일 부대들이 일어섰다. 그리하여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빠져 들어가는 가운데에서도 봉오동 전투에서 큰 대승을 거두게 되었고, 그 해 10월의 경신 참변(庚申慘變)의 비극 속에서도 다시 ‘청산리 대첩’이라는 대승을 통해 조선민족의 울분을 잠시나마 달래줄 수 있었다.
여름 햇살이 따갑게 3·13 반일 의사릉을 내리쬐고 있다. 땀이 소리 없이 등줄기를 타고 흐른다. 의사릉 전체뿐만 아니라 각 묘마다 정리 정돈이 잘 되어 있다. 고운 잔디로 봉분이 덮여져 있고 주변에는 잡초 한포기 보이지 않는다.
3·13 반일 의사릉의 오늘의 모습이 있기까지 정기적으로 많은 이들의 손길이 이어져 왔다. 용정 3·13 기념사업회 회장직을 맡고 있는 필자의 인도로 잠시 묵념을 드렸다. 멀리서 온 답사팀원들은 짧은 순간 의사릉에 잠들어 있을 순국 영혼들과 교감을 나눈다. “이곳에 잠든 이들이여! 감사합니다. 평온히 잠드소서!”.
용정 3·13 반일 운동은 중국 동북 지역에서 일제와 직접 맞서 싸운 사건 중 시기적으로 가장 앞서 있다. 또한 규모와 지속 기간이 가장 크고 길었던 항일 운동으로써 일제에게 큰 타격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북간도 조선인들의 향후 항일 투쟁 노선에 새로운 장을 열어준 사건이었다.
용정 3·13 반일 운동의 영혼들이 잠들어 있는 용정 동남쪽 합성리 공동 묘지인 ‘3·13 반일 의사릉’은 현재 용정시 중점 문물 보호 대상으로 지정되었다. 또한 애국심 교육의 현장이자 용정의 대표적인 역사 유적지로 인정을 받고 있다. 그러나 처음부터 희생자 묘역이 보호를 받아왔던 것은 아니다. 용정 3·13 반일 의사들이 묻혀있는 묘소는 여러 가지 현실적인 상황으로 인해서 안타깝게도 70여년 간 무주고혼(無主孤魂)으로 방치되었다.
3·13 반일 의사들이 묻혀있는 합성리 공동 묘지 묘역을 다시 세간에 알리고, 그에 얽힌 역사를 되살려 놓은 것은 1990년 4월에 발족된 용정 3·13 기념사업회다. 기념사업회는 1989년부터 용정시의 여러 지역에 산재해 있는 역사 유적지들의 지킴이 역할을 시작했다. 창립 후 20년 동안 기념사업회는 용정 3·13 반일 집회장·3·13 반일 의사릉·서전서숙·명동학교·15만원 탈취 사건·장암동사건·5·30 폭동 지휘부·은진중학 등의 역사 유적지를 발굴하고 수선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용정 3·13 기념사업회가 추진한 사업 중 가장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은 3·13 반일 의사릉 복원 사업이다. 3·13 반일 의사릉의 복원에는 용정시 대외 경제 문화 교류 협회최근갑(崔根甲)[1926년생] 회장의 공로가 컸다.
개혁개방 이후 최근갑 회장은 잊혀진 용정 3·13 반일 운동을 후세들에게 알릴 필요성을 크게 인식하고, 1989년 10월에 합동 조사단을 편성했다. 이어 그는 이 사건을 기억하고 있는 32명의 노인들을 방문하고 그들과 함께 5회에 걸쳐 현지 답사를 진행했다.
계속된 노력 끝에 마침내 이듬해인 1990년 4월 10일, 최 회장은 최원악(崔元岳)·방창화(方昌化)·박응삼(朴應參) 등의 증인들과 연변대학 역사학자들, 그리고 용정시 관계 인사들과 함께 합성리 공동 묘지에서 3·13 반일 의사들의 묘소를 확인해내는 데 성공했다.
그 여세를 몰아 1990년 4월 10일에 최근갑을 회장으로 한 용정 3·13 순난의사 추념준비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용정 3·13 기념사업회는 1990년 5월 18일에 묘소를 수선했으며, 이튿날 묘소에 ‘3·13 반일 의사릉’이라 새겨진 목조 비석을 세우고 첫 추모식을 가졌다. 이 과정에서 최근갑 회장이 참가자 초대비를 부담했고 용정시 조선족 민속 박물관에서 비석을, 용정시 문화관과 용정시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비디오와 사진 촬영을, 그리고 용정시 제5 중학교에서 꽃다발을 지원했다. 모두가 함께 이룬 성과였다.
1993년 4월, 용정 3·13 기념사업회는 앞서 세웠던 목조 비석을 제거하고 3·13 반일 의사릉에 화강암 비석으로 대체했다. 용정 3·13 기념사업회와 관계 인사들의 노력과 그 중요성을 인식한 용정시 인민 정부에서는 1994년 5월에 3·13 반일 의사릉을 ‘용정시 중점 문물 보호 대상’으로 명명하고 의사릉에 대해 더 많은 관심과 지원을 표명했다.
그 후 용정 3·13 기념사업회는 3·13 반일 의사릉에 대한 보다 더 체계적이고 실제적인 관심과 관리 지도를 해나갔다. 1995년 11월에 의사릉을 다시 수선하기 시작하여 이듬해인 1996년 6월과 9월에는 각각의 묘소마다 봉분 주위에 낮은 석담을 두르고, 앞줄과 둘째줄 앞에는 낮은 돌벽을 쌓아 자연 재해에 따른 묘지의 붕괴를 사전에 방지하는 조치를 취했다.
2000년대 들어서도 용정 3·13 기념사업회는 3·13 반일 의사릉에 대한 보호 및 관리 사업을 지속해 나갔다. 기념사업회는 2003년 4월부터 7월까지 의사릉에 대한 2단계 성역화 사업을 시작했다. 당시 의사릉 주변에는 지역에 연고를 두고 있는 잡묘들이 많이 자리 잡고 있었고, 그로 인해 의사릉이 실제적으로 차지하고 있는 공간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기념사업회는 우선 1,300㎡의 주변 토지를 매입하고, 그 안에 있는 잡묘를 타 지역으로 이장시켰다. 이어 의사릉 주변에 105그루의 소나무를 옮겨 심고 묘소에 잔디를 심었으며, 공간이 넓어진 만큼 200여 명이 동시에 설 수 있는 참배 공간(參拜空間)도 마련했다.
이듬해인 2004년 10월에는 참배장을 콘크리트 바닥으로 수선했고, 의사릉 주변에 소나무와 여러 가지 나무, 잔디를 더 보충하고 추가 이식했다. 2007년 5월부터 11월 사이에도 의사릉에 잔디를 새로 심고, 그 둘레에 철조망을 세워 의사릉을 보호하기 위한 안전 장치로 삼았다.
오늘날 용정 지역의 역사 문화가 잘 보존되고 국내외적으로 알려지게 된 데에는 용정 3·13 기념사업회의 공이 적지 않다. 가깝게는 합성리 공동 묘지에 조성된 3·13 반일 의사릉 조성 사업이 그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용정의 역사지킴이’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용정 3·13 기념사업회는 어떻게 출범하게 되었을까?
1990년 4월 10일, 최근갑을 회장으로 한 ‘용정 3·13 순난의사 추념준비위원회’가 설립되었다. 준비 위원회는 다시 1990년 7월 10일에 ‘용정 3·13 반일의사릉 수선위원회’로 개칭되었고, 1998년 12월 10일에는 현재의 명칭인 ‘용정 3·13 기념사업회’로 개칭되었다.
2000년대 들어 용정 3·13 기념사업회는 명칭을 다시 개칭했다. 2002년 2월 22일, 기념사업회는 명칭을 ‘용정 3·13 기념사업회’에서 ‘사단 법인 용정 3·13 기념사업연구회 ’로 이름을 고쳤다가 2003년 4월 14일, ‘사단 법인 용정 3·13 기념사업회’로 이름을 고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단 법인 용정 3·13 기념사업회는 성립된 그날부터 3·13 반일 의사릉 복원 사업을 중심으로 용정 지역 항일 역사 유적지 발굴과 유적지 복원 사업을 수행해 나갔다. 1995년 4월, 용정 3·13 기념사업회는 서전서숙, 서전 대야[3·13 반일 운동 집회 장소], 그리고 명동학교 유적지에 표지석 크기의 기념비를 세웠다.
이후 1990년대 말부터 이들 유적지 기념비들을 보다 나은 재질과 형태로 교체하는 사업을 진행해 나갔다. 우선 2002년 5월에 용정 3·13 기념사업회는 ‘서전 대야 유적지(瑞甸大野遺蹟地)’기념비를 ‘서전 대야’라고 새긴 높이 2m의 자연석으로 교체해서 세웠고, 2009년 10월에는 이 기념비를 제거하고, ‘3·13 반일 집회 유지(3·13反日集會遺地)’란 문구를 새긴 기념비로 다시 교체하였다.
또 1999년 7월에는 앞서 1995년 4월 7일에 세웠던 소형의 첫 ‘서전 서숙 유적지(瑞甸書塾遺蹟地)’ 기념비를 모양을 달리하여 ‘서전 서숙 유적지’ 기념비로 대체했고, 2002년 5월에는 이 기념비를 ‘서전 서숙 옛터’라고 새긴 높이 2m 크기의 자연석으로 교체했다. 2002년 5월에는 앞서 1995년 4월 7일에 명동촌에 세워졌던 ‘명동학교 유적지(明東學校遺蹟地)’ 기념비를 ‘명동학교 옛터’라고 새긴 2m 크기의 자연석으로 대체했다.
그 밖의 지역에서도 용정 3·13 기념사업회는 용정 조선족의 역사 복원 사업을 계속해 나갔다. 용정 3·13 기념사업회는 1999년 7월 25일에 동량어구(東良於口)에 1920년 1월에 발생했던 15만원 탈취 사건 관련 ‘15만원 탈취 사건 유지(15萬圓奪取義擧遺地)’의 첫 기념비를 세웠다. 이어 기념사업회는 2002년 5월에는 동일한 문구가 새겨진 새로운 자연석 기념비를 길옆에 세웠다가 2004년 10월에 그 기념비를 다시 언덕에 올려 세웠다. 2008년 6월에 기념사업회는 다시 자연석 기념비의 동남쪽에 돌담을 새로 쌓고, 기념비 주위를 수선하고 한자로 된 설명문도 새로 새겨 넣었다.
용정 3·13 기념사업회는 장암동 사건 현장에도 기념비를 세웠다. 기념사업회는 1994년 7월에 1920년 10월 경신참변 당시 일제에 의해 자행된 사건을 기려 표지석 크기로 ‘장암동 참안 유지(獐岩洞慘案遺蹟地)’의 첫 추모비를 세웠다.
이어 기념사업회는 1999년 7월에는 장암동 입구 언덕에 커다란 크기의 두 번째 추모비로 다시 대체해 세웠고, 2005년 7월에는 다시 비슷한 크기의 자연석 추모비로 교체했다. 이어 합동 묘소를 만들고 둘레에 낮은 돌담도 쌓았으며, 2008년 6월에는 합동 묘소 주변에 철제 울타리를 세우고, 철제 울타리안의 지면에는 콘크리트로 처리를 해주었다.
이외에도 용정 3·13 기념사업회는 2000년 5월에 동량 어구에 ‘5·30 폭동 기념비(5·30暴動紀念碑)’를 세웠고, 2010년 5월에는 이천으로 들어가는 포장길 옆에 새롭게 동일한 문구가 새겨진 기념비를 세웠다. 또 기념사업회는 1998년 9월에 은진중학으로 올라가는 길옆에 ‘은진중학 구지(恩眞中學旧地)’ 기념비를 세웠고, 2005년 6월에는 그 기념비를 은진중학 옛터 부근의 용정 4중학 울타리 안에 옮겨 세웠다.
사단 법인 용정 3·13 기념사업회가 용정 조선족의 역사를 지키기 위해 수행하는 사업은 다양하다. 기념사업회는 유적지 현장에서 벌이는 사업 이외에도 1990년부터 해마다 청명절이면 3·13 반일 의사릉을 참배하고 1999년 3월부터는 해마다 3월 13일이면 기념 대회와 추모회를 개최했다.
1999년부터 2004년까지 유적지 참배활동은 용정 3·13 기념사업회·연변대학·연변 역사학회·연변 해외문제연구소 등 기관의 협력을 받아 용정시 인민 정부가 조직 및 수행했고, 2009년부터는 다시 용정시 인민 정부가 직접 기념 대회를 주최해 나갔다.
용정 3·13 기념사업회는 다양한 학술 활동을 통해서도 용정 지역의 역사 알리기를 실천해 오고 있다. 기념사업회는 1990년에 『용정 3·13 반일 의사릉 전집』을 출판했다. 1999년 3월에는 연변 역사학회, 연변 해외문제연구소와 함께 『용정 3·13 반일 운동 80돐 기념 문집』을 출간했다. 2006년 12월에 『서전 서숙 개숙 100주년 기념 문집-역사의 종소리』를 출간했다. 2009년 12월에는 『용정 3·13 기념 사업 20주년 사진집-의사릉의 향연』을 출간하여 용정의 지역민뿐만 아니라 연변의 조선족 사회에 자랑스런 조선족의 역사를 알리는 데 일조했다.
출판 사업 외에도 용정 3·13 기념사업회는 학술 회의 개최를 통해서도 용정의 역사를 알리는 데 열심을 다해오고 있다. 기념사업회는 1999년 3월 12~13일 동안에 연변 역사학회, 연변 해외문제연구소와 함께 ‘용정 3·13 반일 운동 80돐 학술 연구회’를 개최했다. 2006년 9월에는 ‘서전 서숙 개숙 100주년 기념 학술 회의-중국 조선족 민족 교육과 반일 운동’를 용정 호텔 국제회의실에서 개최했다. 또한 기념사업회는 2008년 10월 23일에는 연변대학 민족역사연구소, 한국 근현대사학회와 공동 주최로 연변대학에서 ‘명동학교 100주년 국제학술회의-연변 지역 조선족의 민족 교육과 항일 운동’ 이라는 학술 대회를 수행했다.
용정 3·13 기념사업회는 또한 해외로부터 자금과 기술을 유치해 용정의 경제와 사회, 문화 발전에도 일정한 기여를 해오고 있다. 최근갑 회장의 노력으로 기념사업회는 1996년 4월부터 해외로부터 53만원의 농촌 빈곤 부축 자금을 받아 대성·용강·명동·영성·용하·조동 등 6개 촌에 소와 돼지를 지원해 주었다. 아울러 해당 지역에 4개의 문화실과 2개의 의료실을 세워주었고, 2개 촌의 초가집 개량사업을 지원하기도 했다.
또한 기념사업회는 2000년 9월부터 2010년 9월까지 매해 해외로부터 장학금을 가져와 용정 5중의 40명의 학생들에게 개인당 500원씩 지급했고, 2004년에는 54대의 컴퓨터를 용정 5중학에 제공하기도 했다.
1945년 8월 제2차 세계 대전 종료 시점까지 일본이 동북아시아 곳곳에서 행한 죄악은 헤아릴 수가 없다. 중국의 동북을 비롯한 곳곳에 무고한 사람들의 원혼이 서려있다. 누가 그들의 원혼을 달래줄 수 있을까? 일본의 우익들은 여전히 중국 대륙과 한반도에서 행한 죄악스런 행위들에 대해서 진심어린 사과를 하지 않고 있다. 반성을 모르고 끊임없이 과거의 허황된 꿈을 쫒으려는 그들에게 과연 21세기 희망이 있을까?
오늘날 다행스럽고 고맙게도 용정 3·13 기념사업회가 연변 조선족 역사의 혼과 맥을 이어가는 중요하고도 성스러운 역사적인 사업들을 많이 해오고 있다. 어디를 가서 보든 조선족 관련 유적지마다 모든 것이 잘 정비되어 있음을 목도할 수 있다. 바로 그러한 사업과 사업을 통한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으리라.
용정 3·13 기념사업회의 용정 사랑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용정 3·13 기념사업회는 기술 도입과 한국과의 자매 결연 등을 통해서도 지속적으로 용정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조선족의 정신을 알리는 사업과 활동을 수행해 나가고 있다.
물론 이외에도 정기적인 추모제와 학술 세미나, 기념 보고회 등 꾸준하고도 지속적으로 용정 조선족의 지나 온 발자취를 후대에 알리는 일을 계속해 나가고 있다. 기념사업회의 지속적인 활동을 통해서 용정과 나아가 연변 조선족의 역사가 더 살아 숨쉬게 되기를 진심으로 희망한다.
과거의 아픔은 내일의 더 나은 발전을 위한 자양분이 될 수 있다. 잊혀져가는 역사는 반드시 되살려 남겨진 후손들에게 전달될 필요가 있고, 과거의 아픔이 반복되지 않도록 깨우칠 필요가 있다. 역사를 모르는 민족은 불행할 수밖에 없다. 비록 100년 전의 슬픈 역사였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기개와 의연함을 잃지 않고 한 줄기의 빛으로 끝까지 투쟁해 온 한민족의 위대함이 21세기에도 연변 땅에서 영원히 지속되어나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