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특별한 이야기

항일 투사들의 뜨거운 피로 얼룩진 간도 일본 총영사관

한자 抗日 鬪士들의 뜨거운 피로 얼룩진 間島 日本 總領事館
분야 역사/근현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간도 일본 총영사관에 전해 내려오는 슬픈 ‘소가죽 한 장 이야기’

용정 주재 간도 일본 총영사관[이하 일본 총영사관]은 1937년 철수되기 전까지 28년간 중국 정부와 조선인 사회들에 대한 탄압의 소굴로 악명을 떨쳤다. 일본 총영사관 건립 과정에서 ‘소가죽 한 장’과 얽힌 웃지 못할 슬픈 이야기가 오늘날까지 전해져 오고 있다.

때는 바야흐로 1909년 가을. 일제는 무능한 청조 정부를 협박하여 간도 협약을 체결했다. 일제는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해삼위(海蔘威)]에 이어 간도 지역을 관할할 총영사관을 산 좋고 물 좋은 용정에 건립하고자 했다. 일본 관리는 한 치라도 더 크게 지어 중국 땅을 집어 삼킬 요량으로 잔꾀를 생각해 낸 후, 국자가(局子街)에 있는 청나라 도태부를 찾아갔다. 웃음 속에 칼을 품고 일본 관리는 도태부 도대인에게 소가죽 한 장으로 덮을 수 있을 정도의 총영사관 건축용 땅을 달라고 간청을 했다.

"일본 관리: 대인도 알다시피 우리 두 나라는 자고로 친선적인 우호국이지요. 오늘 대인과 자리를 같이 하고 나라 일을 담론하게 되어 그 영광이 하늘에 미치오이다. 귀국 정부에서 용정에 우리 총영사관을 두기로 하지 않았소이까. 우리 영사관원들이 당도했는데 있을 곳이 없어 걱정입니다.

도대인: 허허, 나라에서 승낙한 일인데 있을 곳이 없다니 당치않은 소리요. 도대체 얼마나 큰 집을 세우려 하시오.

일본 관리: 우리가 본디 바다 한가운데 사는 소국인지라 욕심부릴 줄 모릅니다. 그저 영사관을 지을 터자리로 소가죽 한 장 만큼의 땅만 떼어주면 족합니다.

대인: 아니....뭐라고요? 소가죽 한 장 만큼의 땅이면 된다고요.

일본 관리: 예. 그렇습니다. 소가죽 한 장 분량의 땅이면 됩니다.

도대인: 허허.... 정말 그래 그 것 뿐이시오?

일본 관리: 이만한 청도 과분하게 생각합니다. 흐흐..."

도대인은 직원들과 상의한 후 일본 관리를 불러놓고 소가죽 한 장 만한 땅을 떼어 줄 것이니 그 땅에 건물을 짓되 약속을 어기고 한 치의 땅이라도 더 점하는 날에는 용서하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에 일본 관리는 얼굴색도 변함없이 능글맞은 표정으로 한 치의 땅도 범하지 않겠다고 태연하게 대답을 했다.

그런데 얼마의 기간이 지난 후, 일본인들이 용정에 수십 평의 땅을 점하고 엄청난 규모의 총영사관 건물을 세웠다는 소문이 도대인의 귀에까지 들어왔다. 도대인은 자신을 속였다며 노기충천하며 펄펄 뛰었다. “망할 놈들, 여기가 어디라고 강도 행세를 해”. 그 길로 용정에 달려간 도대인은 소문대로 수십 평되는 땅위에 높은 담장이 둘러쳐진 총영사관 건물이 들어서 있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이에 분노하여 도대인은 그 일본 관리를 다시 불러 따져 물었다.

"도대인: 아니 이것이 소가죽 한 장 분량의 땅이란 말이오?

일본 관리: 우리는 언약대로 소가죽 한 장 만큼의 땅에 총영사관 건물을 지었는데, 어찌 그리 화를 내십니까?

도대인: 당신들은 눈도 없소? 이 건물 부지가 소가죽 한 장 만큼의 크기란 말이오?

일본 관리: 예. 그렇습니다. 우리 소가 아닌 용정의 소 한 마리를 잡아서 가죽을 벗기고, 그 가죽을 가지고 길이를 재어서 그 만큼의 크기에다 담을 쌓고 건물을 지었습니다."

도대인과 일본 관리는 말싸움을 벌였다. 결국 일본 관리는 길이를 잴 때 사용했던 소가죽을 가져와 도대인에게 보여주었다. 그런데 일본 관리가 가져온 것은 통째로 된 소가죽이 아니라, 실오라기처럼 가늘게 잘려져 있는 소 한 마리 분량의 소가죽이었다. 일본인들은 교묘하게도 소 한 마리 분량의 소가죽을 실오라기처럼 가늘게 썬 다음, 서로 연결하여 영사관 테두리를 만들고 그 길이만큼의 땅을 총영사관 부지로 취해갔던 것이었다. 도대인은 더 이상 할 말을 잃고 국자가로 돌아가고 말았다.

일제 식민 통치의 잔존 물, 용정 옛 간도 일본 총영사관 건물

용정 시내 중심에 기다랗게 늘어선 주황색 담벼락이 딸린 건물이 있다. 바로 100여년 전 간도 지역의 조선인들을 탄압하기 위해 일제가 건립한 악명 높은 일본 총영사관 건물이다. 이 건물은 한 차례의 화재를 겪은 후 1924~1926년에 재건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소가죽 한 장 이야기’를 알고 있는 터라서 그런지 일본인들의 간계함이 100년이 지난 지금에도 다시 되씹어지는 것 같아 머릿속에서 조소가 맴돈다.

일본 총영사관의 역사는 1907년에 설립된 조선 통감부 간도 파출소[이하 간도 파출소]가 1909년 11월에 총영사관으로 확대 개편[승격]되면서 시작되었다. 수십 년의 세월이 흘러 일본 총영사관 건물은 용정시 인민 정부 청사로 사용되다가 현재는 리모델링을 통해 전시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그런데 일본 총영사관이 현재의 위치에 자리를 잡고 세워지기까지는 몇 번의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당시 일본 총영사관 옆에 용정 빈관[용정 호텔]이 있었는데, 바로 그 뒤편 쪽에 총영사관의 모태인 간도 파출소[1907]가 처음 자리를 잡았다. 용정 3·13 기념사업회 부회장 겸 용정시 문화관 관장인 이광평 선생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간도 파출소 주변에는 오동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었는데, 오늘날 현지 조선족들조차도 그곳이 간도 파출소의 옛터인지를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이후 간도 파출소는 지금의 해관로에 위치한 용정 고급 중학 자리로 옮겨왔다. 그리고 그곳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간도 파출소는 현 용정시 정부 자리로 이전되었고, 간도 협약[1909.9.4] 이후에 간도 파출소는 일본 총영사관으로 확대 개편되었던 것이다[1909.11.1].

1922년 11월에 화재로 일본 총영사관은 전소되었고, 이후 재건립되어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기다랗게 쭉 뻗어 있는 일본 총영사관의 담을 바라보며 일제가 용정 시내에 저 총영사관을 세워놓고 수많은 조선인들을 탄압하고 학대했을 것을 생각하니 가슴 속 한켠에 뜨거운 것이 솟아 올라오는 것이 느껴진다.

일제의 대륙 침략의 발판, 간도 일본 총영사관

용정 주재 일본 총영사관은 중국 침략의 발판이었다. 총영사관이 설립되던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잠시 살펴보자. 이 무렵 조선의 한반도에서는 이상설·이준·이위종 등 3인에 의한 헤이그 밀사 사건[1907]이 실패하고, 이를 빌미삼아 일제가 고종을 퇴위시키던 시점이었다. 또 그 여파로 군대가 해산되고 내정을 간섭해나가려는 의도로 강제로 정미 7조약을 체결하였다. 이어 조선을 실제적으로 손아귀에 넣은 일제는 그 여세를 몰아 중국과 러시아 대륙으로 침략의 칼끝을 돌리고 있던 상황이었다.

한편, 1907년 1월~7월 사이, 일제는 상인·관광객으로 가장한 300여 명의 인력을 동원하여 연길현 내에 들어와 지형을 정찰하고 지도를 제작하였다. 1907년 7월 30일, 러일 양국은 러일 비밀 조약을 체결하고 동북의 북부는 러시아 세력권으로 하고, 남부는 일본 세력권으로 하여 서로 나누어 가졌다. 당시 러시아는 러일 전쟁 패배 이후 일제의 눈치만 보면서 정치적으로나 외교적으로 동북아 지역에서 일본에게 주도권을 내어주고 있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일제는 간도에 대한 침략을 강화하기 위한 실제적인 목적으로 1907년에 용정 시내에 조선 통감부 간도 파출소를 세웠다. 그 후 1909년 간도 협약 이후 간도 파출소는 일본 총영사관으로 확대 개편되었다. 일제는 용정 주재 일본 총영사관을 중국 정부에 대한 정치적, 외교적 압박의 구심체로 삼았다.

일제는 총영사관을 간섭과 침략의 발판으로서 뿐만 아니라, 이를 기반으로 간도의 한민족 사회를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탄압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후 간도 지역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사건들의 배후에는 늘 일본 총영사관이 연루되었다.

조선인 탄압의 악의 축, 일본 총영사관은 어떻게 변해갔는가?

용정 주재 일본 총영사관은 간도와 연해주 지역 한민족 탄압의 선봉이었고, 일제 제국주의 대륙 침략의 상징물이다. 일제는 총영사관이라는 공식 외교 채널을 통해 해당국을 압박해 나가는 방식으로 간도와 연해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항일 운동을 제압해 나가고자 했다. 또한 많은 경찰 병력의 충원을 통해 총영사관의 통치 역량을 확대시켜 나갔다.

1907년 러일 양국에 의해 러일 비밀 조약이 체결되었다. 1907년 8월 6일, 일제는 간도를 침략할 선견대를 규합하고, 1907년 8월 20일에는 사이토 스에지로[齋藤季治郞]가 헌병 61명을 이끌고 용정에 입성했다. 이어 그들은 8월 23일에 ‘간도 한민[조선인]의 생명 안전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용정에 조선 통감부 간도 파출소를 세우고 사이토를 소장으로, 시노다(篠田治策)를 부소장으로 간도 파출소를 이끌어 나가기 시작했다.

1909년 건립 초기에 용정 일본 총영사관은 총 16명의 인력으로 구성되었다. 이후 1920년에는 조선 총독부로부터 300명의 경찰을 들여와 경찰부를 두었고, 용정을 비롯한 10여 곳에 경찰서를 개설했다. 1928년에는 다시 일본으로부터 100여 명의 경찰 병력을 더 들여왔고, 1931년 11월에는 경찰부에 특별 수사반까지 신설하며 간도 침략의 기반을 공고히 해나갔다. 이는 중국 정부에 대한 정치적, 외교적 압박을 강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인들의 항일적인 움직임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목적이기도 했다.

일본 총영사관은 용정촌·국자가·두도구(頭道溝)·동불사(銅佛寺)·이도구·팔도구·천보산(天寶山)·의란구·대랍자(大拉子)·걸만동(傑滿洞)·부동·팔도하자(八道河子)·백초구(百草溝)·가야하·양수천자(凉水泉子)·혼춘·흑정자(黑頂子)·혼춘 두도구 등 18개 지역을 주 관할지로 두고 있었다. 일제는 그곳에 경찰서나 경찰부소를 두고 식민 통치를 체계화시켜 나갔다. 1935년 경 일본 총영사관의 지시를 받는 일제 경찰은 646명에 이르렀다.

1937년 11월 5일, 일제와 만주국 간에 체결된 ‘만주국 치외 법권 철회와 남만 철도 부속지 행정권 양도 조약’에 의해 일본 총영사관과 이하 기구들이 철수했다. 하지만 총영사관의 관리들은 관동군과 소속 기관들로 배속되고, 경찰들은 만주국 경찰 기구에 배속되었다. 또한 특별 수사반은 간도 특별 공작반으로 개칭된 후 중국인들과 조선인들에 대한 탄압과 만행을 지속해 나갔다.

일본 총영사관의 탄압에 맞선 항일의 외침들!

1909년 9월 4일, 일제는 청조를 압박하여 북경에서 도문강 중조 변무 조약(圖們江中朝邊務條約), 즉 간도 협약을 체결하고 길림에서 조선회령 구간의 길회 철도 수축권을 얻어냈다. 나아가 국자가·백초구·두도구·용정 등을 일본에 개방하는 상업 도시로 정하고 연변에서의 영사 재판권을 얻어냈다.

일제는 1909년 11월 1일에는 간도 협약 2조, 7조의 규정에 의거해 용정에 있던 조선 통감부 간도 파출소를 간도 일본 총영사관으로 개칭하고 11월 2일부터 침략 활동을 공개적으로 자행해 나갔다.

용정 주재 일본 총영사관은 연변을 침략과 항일 투쟁에 대한 탄압의 1번지였다. 또한 간도 지역의 자원 약탈과 식민 지배의 앞잡이 노릇을 해나갔던 주체이기도 하다. 일본 총영사관은 간도 지역에서 치외 법권을 누리며 무장 경찰과 헌병, 특무 기관을 유지하며 항일 애국 운동을 탄압했다. 일본 총영사관이 동아시아 근현대사에서 저지른 범죄는 일일이 열거하기란 가히 불가능하다 할 것이다.

1919년 3·13 반일 시위 운동 당시 일본 총영사관은 현지의 군벌과 결탁하고 경찰 병력을 동원하여 발포와 함께 무자비한 시위 진압을 감행했다. 그 과정에서 19명이 죽고 수 십 명이 부상을 당했다. 그 중에는 명동학교정동 학교 등 어린 학생들도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희생자 19명 중 14명의 시신은 3·13 반일 의사릉에 모셔져 있고, 나머지 5명의 희생자는 사후에 가족들에 의해서 모셔져 갔다.

한편, 1920년 10월 2일, 일제는 혼춘 사건(琿春事件)을 도발하고 그것을 구실로 경신 대토벌 작전을 무자비하게 감행했다. 토벌 과정에서 일제는 5~6천 명의 군인을 동원하여 2천여 명의 조선인들을 학살하고 집거지들을 불태웠다.

또한 일본 총영사관은 1930년 5월에 있었던 ‘붉은 5월 투쟁’을 탄압하기 위해 경찰들을 동원해서 탄압하였다. 일제는 1930년 6월 20여 명의 경찰을 동원하여 용정에서 20여 리 떨어진 동량구 어구의 5·30 폭동 지휘부를 공격하여 총지휘자 강학제가 격전 중에 죽고, 김철이 중상을 입고 체포되었다가 희생되기도 했다.

일본 총영사관의 만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들은 1931년 9·18 사변 당시 팔도하자 소명당현동에서 조선인 12명을 학살하고 불에 태웠다. 1932년 4월에는 조선 주재 일본군 19사단을 동만에 끌어들여 “천명을 오살할지언정 공산당을 한 명도 놓치지 말라”고 외치며 4천여 명을 학살하는 범죄를 저질렀다.

또 1932년 5월에는 총영사관 경찰들이 학생 운동을 탄압하고 은진중학과 대성 중학 학생 100여 명을 체포하였다. 천주교·기독교 단체에 앞잡이를 심어놓고 종교계의 반일 운동을 탄압하기도 했다. 또한 1932년 8월 7일에는 화련리에서 6차의 토벌을 감행하여 150여 명의 양민을 학살했다.

1933년 가을에는 총영사관 경찰부를 통해 일본군 19사단을 끌어들여 왕우구 항일 근거지(연길현 의란구)를 보름 동안 소탕했다. 그 과정에서 일제는 비행기와 대포를 동원하여 700여 채의 가옥을 불태우고, 56명의 무고한 양민들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용정 주재 일본 총영사관은 28년 동안 일제 간도 침략의 소굴 역할을 했고, 1930~1935년 동안 연길현의 30만 인구 중에 2만여 명의 지하 항일 활동자, 항일 인사 및 양민들을 탄압하고 학살했다.

아픔의 기억 속에서 굿굿하게 피어난 한민족의 혼

용정시 길안가 14~21촌에 위치하고 있는 현 용정시 정부 청사는 과거 일본 총영사관이 재수리되어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길림성 중점 문물 보호 대상으로 지정되어 있다. 일본 총영사관은 총 면적 42,944㎡에 높이 2m의 주황색 담장에 둘러쳐져 있다.

주요 청사의 건축 면적은 2,503㎡이고, 3층 건물[지하 1층, 중간 남쪽 5층]로 되어 있는데, 청사 바닥은 철근 콘크리트이고, 벽은 붉은 벽돌이다. 또한 외벽은 미황색의 타일이 붙여져 있고, 지붕은 녹색페인트가 칠해진 양철로 덮여져 있다. 총영사관의 지하에는 감옥이 있었다. 지하 감옥의 경우 일제 침략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오늘날 중요한 역사 교육과 애국주의 고취의 현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동아시아 근현대 전쟁사에서 일본만큼 반인륜적이고 잔인하며 100년이 지난 이 시점까지도 미움을 받고 있는 나라가 또 있을까? 2차 세계 대전의 전범국이었던 독일을 미움 속에 기억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그것은 그들이 전후 처리를 모든 이들이 납득할 만하게 단행하고, 무엇보다 과거의 행위에 대해서 반성하고 피해국들에게 사과의 마음을 표할 줄 아는 성숙함을 보여줘 왔기 때문일 것이다.

피해국에 대한 반성은 차치하더라도 일본은 오늘날 또 다시 군국주의의 망상 속에 사로잡혀 있다. 역사 속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민족, 그건 또 다른 불행을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김춘선 외, 『중국 조선족 혁명 투쟁사』(연변인민출판사, 2009)
  • 김춘선·김철수, 『중국 조선족 통사』상(연변인민출판사, 2009)
  • 독립기념관,『1920년대 전반 만주·러시아지역 항일 무장 투쟁』49권(2010)
  • 백민성, 『유서깊은 해란강반』(연변인민출판사, 2001)
  • 연변조선족자치주 위원회 문사 자료 위원회, 『연변 문사 자료 휘집』1(연변인민출판사, 2007)
  • 전광하·박용일, 『세월속의 용정』(연변인민출판사, 2002)
  • 이광평, 「이주 1번지 두만강 기슭의 조선족 선배들」(『재외한인연구』 20, 재외한인학회, 2009)
  • 인터뷰(용정 3·13 기념 사업회 부회장/용정시 문화관 관장 이광평, 남, 1944년생, 201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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