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놈놈놈’의 모티브가 되었던 15만원 탈취 사건

한자 映畵 놈놈놈의 모티브가 되었던 15萬원 奪取 事件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지신진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19.3.1
1919.3.13
1919.1.3
1920.1.4
1920.1.10
1920.1.15
1920.1.23
1920.1.31
1921.8.25
동량 어구 산비탈의 ‘15만원 탈취 사건’ 기념비석

중국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에서 10리쯤 떨어진 곳에 있는 동량리(東陽里) 어구. 그곳 산비탈에 석조로 된 기념비 하나가 외롭게 서있다. 둥근 형태의 기념비석은 비탈에 세워진 것만으로도 적지 않은 수고와 땀이 스며있음을 알 수 있었고, 많은 사연을 간직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왜 이런 곳에 위풍당당 저런 비문이 세워져 있을까? 가까이 이르자 기념비문에는 ‘탈취 십오만원 사건 유지(奪取十五萬元事件遺地)’라는 문구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모든 것이 분명해지는 순간이다. 90년전 일단의 조선인 애국 청년들에 의해 발생했던 15만원 탈취 사건을 기념하는 비석이다. ‘15만원 탈취 사건’....무슨 영화 제목에나 어울릴 듯한 제목이 아닌가? 흥미롭게도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해서 2008년에 실제로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일명 ‘놈놈놈’]이 제작되어 적지 않은 흥행을 탄 적이 있다. 비문 뒤편에는 그때의 일을 기리는 의미로 사건의 주요 정황들이 애국 청년들의 실명과 함께 기록되어 있다.

일생을 조선족 사회의 항일 활동 관련 유적지 답사와 조사, 그리고 사진 촬영에 바쳐온 용정 3·13 기념사업회 부회장이자 용정시 문화관 관장을 지내셨던 이광평(李光平) 선생님은 벌써 수차례 오고 간 곳임에도 마치 처음 온 사람인 양 그때의 사건 속에 잠겨 목이 메인 듯 한동안 말이 없었다. 얼마 지나자 그는 당장이라도 그때의 일본 호송 경찰들을 때려눕힐 듯한 기세로 당시의 사건의 전말을 노년의 몸에도 불구하고 쉼 없이 쏟아 내셨다.

1920년! 그 연도를 떠올려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르고 가슴 한 켠에 울분과 뜨거운 그 무언가가 용솟음쳐 오른다. 오늘도 ‘15만원 탈취 사건’의 기념비석은 말없이 동량 어구를 지키고 있지만 그 현장에서는 아직도 6명 애국 청년들의 뜨거운 반일의 피 냄새가 느껴지고,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왜 그 청년들은 20대 황금기의 나이에 모든 안락함을 뒤로하고 험한 길을 택했을까? 이제 깊고 슬픈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 15만원 탈취 사건의 현장인 동량 어구에서 시간 여행을 떠나보자.

일촉즉발의 화약고가 되어가는 간도!

1919∼20년대....만주와 극동의 정치 정세는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뇌관에 불을 붙인 일촉즉발의 화약고처럼 용정을 중심으로 한 만주[간도]와 연해주를 중심으로 한 극동의 정세는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특히 1919년 3월, 한반도에서의 만세 운동 이후 간도와 극동에서 일제의 압박은 더욱 더 거세지기 시작했다.용정에서의 3·13 만세 운동 이후 일제는 본격적인 만주 침략과 점령의 구실을 찾고 있는 터였다.

1919년 3월 일본의 총영사관과 조선 은행 용정 지점, 동양 척식 주식 회사 용정 지점 등과 같은 일제의 주요 통치 조직들과 일본인 밀집 거주 구역과 근접해 있는 용정 시내의 중심 거리에서 3·13 만세 운동이 발생했다. 이때 맨손에 태극기만 들고 나섰던 조선인 애국 청년들과 학생들, 수많은 시위참가자들은 일제의 무력 앞에 철저히 유린당하고 말았다. 용정 시내 한 복판에서 자행된 일제의 3·13 만세 운동에 대한 유혈 진압은 조선인 사회의 가슴에 항일의 불을 뜨겁게 지펴놓았다. 그리고 이내 그 불은 무장 항일 투쟁이라는 더 큰 불길로 이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3·13 만세 운동과 일제의 잔혹한 무력 진압 이후 간도, 즉 연변 각지에서는 반일 무장 단체가 우후죽순처럼 조직되었다. 이들은 군사 훈련소, 사관 양성소 같은 반일 무장 단체들을 설립하여 무장 군인들을 양성하는 한편, 민간에 있는 엽총이나 재래식 무기들로 무장을 시작했다. 그 중 북로 군정서(北路軍政署) 소속 철혈 광복단연변 일대를 중심으로 친일파를 처단하고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바로 ‘15만원 탈취 사건’의 주인들인 6인의 영웅들도 끼어 있었다.

의기투합하는 6명의 철혈 광복단 애국 청년들

한편 시위에서 일제의 무력에 무기력하게 무릎을 꿇었던 윤준희(尹俊熙)를 비롯한 10여 명의 철혈 광복단원들은 시위 직후 가장 연장자였던 윤준희 집에서 모임을 가졌다. 그들은 무기를 들고 무장 투쟁을 하는 것만이 일제를 물리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당시 체코 군단은 내전에서 패배한 후 소총 1자루와 탄약 100발을 일본돈 30원에 매매까지 하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철혈 광복단원들은 러시아 혁명 이후 내전에 참전하고 있던 체코 군단으로부터 무기를 구입하여 항일 투쟁에 사용하고자 계획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 자리에서 철혈 광복단원들은 조선 총독부조선 은행 용정 지점 은행을 털어 군자금을 마련하자는데 의견을 일치를 보았다. 당시 일본 은행을 털어 군자금을 확보하자는 생각은 윤준희의 아이디어였다.

유일한 생존자인 최봉설(崔鳳卨)[1899∼1973]의 증언은 김준(金俊)의 역사 장편 소설 『십오만원 사건』에 역사적 신뢰성을 더해주고 있다. 소설에는 당시 윤준희를 비롯한 철혈 광복단원들이 어떤 계기로 총기를 보유하기로 결심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자세한 논의 과정이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태극기만 들고 만세를 불러서 독립을 한다는 것은 통분한 죽음 뿐이다. 총을 들고 나서자[임국정]. 그 말이 천번 만번 옳은 말이다....이제 총을 들고 나서서 원수도 갚고 독립도 하자[최봉설]. 오늘부터 그놈들[일본 경찰들-필자]을 하나씩 칼로라도 암살을 해서 원수를 갚자[한상호]....총을 쥐고 나서야 한다는 생각이 이제는 아이들께두 다 있다. 좋다. 그런데 총을 어디서 얻겠는가 말이다[윤준희]....돈만 있으면 로씨야 오연발 총과 단총을 얼마든지 살 수가 있어....백파들도 팔아먹고 전쟁판에서 총을 맨체 집으로 돌아 온 군인들도 팔더라[임국정]. 그런데 돈을 어디서 얻겠나?....상점이고 뭐고 다 그만두고 용정일본 은행을 털자[윤준희]....”

거꾸러지는 일본 호송 경찰들, 그리고 마침내 15만원을 수중에 넣다!

거사가 있기 얼마 전인 1919년 6월, 북로 군정서 소속 철혈 광복단 단원들인 윤준희·임국정(林國楨)·최봉설 일행은 부처골 어귀에서 또 한 번의 비밀스런 만남을 가졌다. 그 자리에서 청년들 중 임국정·한상호(韓相浩)·최봉설·박웅세(朴雄世) 등 4명이 해삼위(海蔘威)[블라디보스톡(Vladivostok)]에서 단총을 사오기로 결정을 했다. 그 후 청년들은 연해주에서 노동을 해서 힘겹게 번 돈으로 소량의 무기[권총 4자루, 소총 2자루, 그 외 몇 발의 수류탄]를 구입해 들어왔다.

한편 비슷한 시기에 연변 지역의 항일 인사들이 군자금을 모아 대한 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 군사부장이자 철혈 광복단원인 김하석(金河錫)에게 부탁하여 2,000여 자루의 총과 다량의 탄약을 은밀히 입수하다가 도중에 실패한 일이 있었다. 이에 김하석은 철혈 광복단원이었던 최봉설에게 빠른 시일 내에 군자금 마련을 지시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철혈 광복단원 청년들이 일본 은행을 털기로 뜻을 모았지만 그것을 실행에 옮기기에는 사전 준비가 너무 부족했다. 청년들은 여러 궁리 끝에 은행 내에 있는 인물을 통해 정보와 협조를 얻어내는 것이 성공의 지름길이라 여겼다. 이에 윤준희·최봉설·임국정은 정보를 탐색하던 중 국민회 회원인 전홍섭(全弘燮)[작가 김준은 소설에서 ‘전홍섭’을 ‘전기설’로 명명하고 있다]이 조선 은행 용정 지점에서 서기로 일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얼마 후 은행을 털 목적을 염두에 두고 전홍섭을 만났던 최봉설임국정은 은행에 돈이 남아 있는 경우는 거의 드물기 때문에 은행을 상대로 거사를 하는 것은 그다지 바람직스럽지 못하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이어 전홍섭으로부터, “오래잖어 길회 철도[길림-회령 철도: 필자] 부설비 30만원이 회령에서 용정 은행으로 옵니다. 그 돈을 빼앗는 것이 더 쉽고 더 유익합니다. 말 11필이 옵니다. 무장한 순사 11명과 내가 타고 오는 말들입니다. 내가 탄 말 앞에 선 말 4필은 돈을 실은 말들입니다. 내 뒤에 오는 말들은 다른 짐을 실은 말들입니다. 돈 가지려 우리가 떠난다는 통지를 내 당신들께 할 것입니다....사격할 적에 내 넓적다리를 노아 부상시켜야 합니다. 내 죽지 않는다거나 총에 맞지 않는다면 일이 인차 발각될 것입니다. 실수없어야 합니다....”

전홍섭으로부터 현금 수송 정보를 건네들은 최봉설임국정은 마치 벌써부터 거사에 성공한 듯 가슴이 벅차올랐다. 1920년 1월 3일 저녁, 윤준희·한상호·임국정·최봉설·박웅세·김준 등 6인은 교동에 있는 김계하 집에 모여 천지가 깜짝 놀랄만한 은밀한 논의를 했다. 청년들은 습격 시간을 1월 4일 저녁으로 정했고, 습격 지점은 동량 어구로 정했으며, 이어 두 개 팀으로 나누어 양 방향에서 거사를 하기로 입을 맞추었다. 또한 거사 후 조선이나 러시아 쪽으로 가면 잡힐 우려가 있으니 동성참을 거쳐 해란강을 건너 와룡동(臥龍洞), 의란거우[의란구(依蘭溝)], 이어 그곳에서 블라디보스톡으로 넘어가기로 동선을 잡았다.

1920년 1월 4일 오후 8시, 거사 당일. 6명의 애국 청년들이 중국인 학생 복장에 부처골 어귀에 나타났다. 그들은 일부러 중국어로 대화를 했다. 그 중 박웅세와 김준은 현금 수송대를 기다리는 동안 부처골(佛洞) 어귀의 한 술집에 들어가 바깥 동정을 살피며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박웅세와 김준은 범을 잡기 위해 놓은 밑밥 주변에 숨어 기다리는 포수처럼 묘한 흥분감에 주변 상황을 주시했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이윽고 돈을 실은 수송대의 모습이 김준의 눈에 들어왔다. 다른 곳에 숨어 있던 나머지 청년들은 수송 행렬의 뒤에서 계획된 행동을 준비했다. 권총과 장총으로 무장한 일본 무장 호송 경찰들은 말을 타고 허리에 군도까지 차고 호위를 하고 있었다. 일본 경찰들은 조선 은행 회령 지점에서 용정 출장소로 길림-회령 철도 부설 자금 30만원을 수송 중이었다. 6명의 애국 청년들은 사전 계획에 따라 그저 그런 평범한 학생들처럼 중국어로 왁자지껄하며 양 방향에서 수송대를 향해 다가갔다. 긴장감이 동량 어구를 가득 메운 순간이었다.

최봉설이 수송대를 향해 달려나가고 윤준희가 뒤를 따랐다. 정적을 깨고 윤준희최봉설의 총이 거의 동시에 앞서 가던 일본 경찰들을 향해 불을 뿜었다. 그들의 총에 의해 4명의 경찰들이 말에 굴러 떨어졌고, 뒤에서는 2명이 굴러 떨어 졌다. 두 사람은 말고삐를 틀어잡았다. 옆에 있던 다른 경찰도 청년들이 쏜 총에 쓰러졌다. 굴러 떨어지는 동료들을 내버려두고 생존한 일본 경찰들은 도주했다.

상황은 순식간에 종료가 되었다. 6명의 애국 청년들은 현금 탈취에 성공했고, 3개의 자루에 돈을 나누어 4인[윤준희·임국정·한상호·최봉설]은 와룡동 쪽으로, 나머지 2인은 반대 방향으로 몸을 숨겼다. 아쉽게도 30만원 전액을 탈취하는데는 실패했지만 15만원 만으로도 거사는 대성공이었다.

블라디보스톡 신한촌(新韓村)에서 무기 밀매에 나서는 애국 청년들

사건 직후 용정 소재 일본 용정 경찰서는 발칵 뒤집혔다. 조사 끝에 현금 탈취 주동자들이 조선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일본 경찰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일제는 가용할 수 있는 모든 경찰 인력을 동원했고, 이성을 잃은 일본 경찰들의 수색 작전에 주변 지역과 마을은 완전히 쑥대밭이 되었다. 무고한 조선인 청년들이 마구잡이로 검문을 당하고 억울하게 잡혀가 구타와 고문을 받았다. 현금을 불시에 탈취당한 일제가 무고한 조선인 양민들을 어떻게 대했을 지는 가히 상상이 가고도 남는다.

4일 거사 당일 밤, 윤준희 일행은 삼봉동(三峰洞)을 넘고 부르하통하[布爾哈通河]를 건너 5일 새벽에 와룡동최봉설의 집으로 갔다. 그곳에서 그들은 눈을 붙인 후 당일 저녁 8시쯤에 달구지에 돈을 싣고 대한 국민의회 군사부장이자 철혈 광복단원인 김하석이 있는 의란구 류채구로 갔다. 이어 1월 10일 아침, 4인[윤준희·최봉설·한상호·임국정]은 돈을 갖고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했고, 15일에 연해주 모구위[포시에트(Посьет)]에 도착하여 약 1주일간 체류한 후, 22일에는 희열과 흥분감을 안고 블라디보스톡행 배에 몸을 실었다. 이때 박웅세와 김준은 명동촌에 남아 있었다. 윤준희 일행의 배는 23일에 블라디보스톡금각만(金角灣)에 들어섰고, 이튿날 청년들은 신한촌(新韓村)으로 들어갔다.

용정에서 일본 경찰들이 윤준희 일행을 체포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던 그 시간,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한 4명의 애국 청년들은 신한촌에서 비밀리에 대한 국민의회 간부 김하석을 만나고 있었다. 청년들은 김하석에게 “이 돈은 우리가 일본 현금수송대에서 탈취한 목숨과도 같은 독립운동 자금이오. 무기를 구입하기 위해 여기까지 왔소이다”라고 말했다. 한편으로 윤준희 일행은 신한촌 한인 거류민단 단장이던 채성하(蔡成夏) 집에서 은신하며 최의수를 통해 일본돈을 루블(рубль)로 교환하여 무기상들과 접촉을 시도했다. 무기 입수에는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청년들은 당분간 신한촌에서 머물러야 했다. 계획대로 일이 성사만 된다면 애국 청년들은 3만여 자루의 총을 구입할 수가 있는 상황이었다. 이때까지 모든 상황은 순조로운 듯 보였다. 그러나 계획은 예상치 못한 엉뚱한 곳에서부터 어그러지고 있었다. 무기구입을 책임진 임국정이 친분이 있는 엄인섭(嚴仁燮)[1875∼1936]을 찾아가 무기 구입을 두고 상론한 것이 끝내 화근이 되었던 것이다.

일제의 끈질긴 추적, 그리고 앞잡이의 밀고로 무너지는 애국 청년들의 꿈!

1920년 1월 28일, 블라디보스톡 일본 총영사관에 임국정 일행이 약 3만정의 다량의 무기 구입을 의뢰했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애국 청년들에 대한 포위망이 서서히 좁혀지기 시작했다. 밀고를 한 자는 당시 일제의 밀정이었던 엄인섭으로 알려지고 있다.

1920년 1월 31일 밤, 신한촌에 몸을 숨기고 있던 청년들의 거처에 일본 무장 헌병들이 급습을 했다. 윤준희·임국정·한상호 일행은 거세게 저항했지만 총을 든 일본 헌병들을 이겨낼 수 없었다. 하지만 운이 좋게도 뒷방에서 머물고 있던 최봉설은 구사일생 재빨리 몸을 피할 수 있었다. 최봉설은 문을 박차고 나가면서 앞에 서있는 일본군을 발길로 걷어찬 후 달려가면서 민첩하게 담장을 훌쩍 뛰어 넘었다. 일본 헌병들은 최봉설을 향해 집중 사격을 퍼부었고, 그 과정에서 최봉설은 오른쪽 어깨에 총탄을 맞았다. 하지만 그는 흘러나오는 붉은 피를 한손으로 감싸며 앞으로 달렸고, 그 길로 채성하의 집으로 몸을 숨겼다. 최봉설은 구사일생으로 탈출에 성공했다. 하지만 윤준희 일행은 모두 체포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체포되는 과정에서 보관하고 있던 일화 13만원과 무기들도 모두 고스란히 압수되었다.

1920년 2월 초, 윤준희 일행은 일본 군함에 실려 시모노세키, 부산(釜山), 경성(京城), 원산(元山) 등지를 경과하여 청진(淸津) 감옥으로 압송되었다. 이후 다시 서대문 형무소로 압송되었고, 그곳에서 공개 재판에 처해졌다. 윤준희·임국정·한상호는 심한 고문을 당했고, 결국 사형을 언도받은 후 1921년 8월 25일에 사형 집행 되었다. 이때 윤준희의 나이는 30세, 한상호는 23세, 임국정은 27세였다. 이 무슨 역사의 장난이란 말인가! 누가 이 꽃다운 청춘들을 저 사지로 몰아넣었단 말인가!

김준 장편 소설 『십오만원 사건』

1964년 카자흐스탄(Kazakhstan)의 알마타(Alma-Ata)에서 김준[1900~1979]에 의해 역사 장편 소설 『십오만원 사건』이 발간되었다. 이 소설은 1920년 1월에 용정 동량 어구에서 북로 군정서 소속 철혈 광복단원 6명의 열혈 애국 청년들에 의해 발생했던 일제의 ‘15만원 탈취 사건’을 토대로 쓰여진 작품이다. 그런데 거사자의 일원이었던 김준의 존재에 대해서는 약간의 이견이 있는 것 같다. 작가 김준은 소설의 첫머리 ‘저자의 말’에서 집필에 임하는 소감과 마음가짐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5 만원 사건’의 주동 인물들인 대담한 여섯 사람[윤준희, 임국정, 최봉설, 한상호, 박웅세, 김성일]에게 저자는 제일 큰 주목을 돌리였습니다....그래서 여섯 사람의 외형, 성실, 동작, 말씨 등을 올바로 묘사하려고 힘을 썼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기에는 나에게 있어서 매우 곤난한 일이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을[최봉설을 제외하고-집필자] 필자는 한번 대해 본적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묘사함에 있어서 봉설의 말과 그들의 사진에 근거하였습니다. 사진에서 어느 정도 성질과 동작을 알아 내려고 노력했습니다....”

부연하면, 중국 조선족 학계에서는 거사자 6인에 ‘김준’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한국 조선족 연구자들 또한 거사자 6인에 ‘김준’이 속해 있는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 나아가 이 거사자 ‘김준’이 바로 『십오만원 사건』의 저자 ‘김준’으로 이해하고 있다. 즉, 일반적으로 연구자들은 거사에 참여한 6명 중에 소설 『십오만원 사건』의 저자인 ‘김준’이 포함된 것으로 여기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정작 저자 ‘김준’은 소설 첫머리에 유일한 생존자인 최봉설의 증언을 토대로 소설을 썼고, 최봉설을 제외하고 나머지 거사자들과는 일면식도 없다고 밝히고 있다.

오래 전의 역사적 사건인 만큼 사건에 대한 연구과정, 혹은 전달 과정에서의 오류, 또는 동명이인 등의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본다.

살아남은 자들의 이야기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최봉설은 연해주 이만(Iman)[지금의 연해주 달네레첸스크]에서 대한 의용군사회(大韓義勇軍事會)가 조직한 사관 학교를 졸업한 후 중대장으로 활동했다. 이후 1922년에는 백위파에 대한 하바로프스크(Khabarovsk) 탈환의 고비가 되었던 볼로차예프(Bolochaevka)가 전투에도 참여하기도 했다. 1923년에 그는 다시 간도 영안현 영고탑(寧安縣寧古塔)에서 적기단(赤旗團)을 조직하고 단장으로 활동하다가 1925년 1월에는 적기단 해체 이후 연해주그로데코보(Grodekovo) 지역으로 다시 넘어 갔다. 그곳에서 그는 안드레예프카 콜호즈(Kolkhoz Andreevka) 회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또한 1937년에 스탈린(Joseph Stalin)에 의한 강제 이주라는 소용돌이를 피해가지 못했고, 우즈베키스탄(Uzbekistan)의 호레즘(Khorezm) 지역으로 강제 이주를 당했다. 그는 구리스탄(Guristan)에서 콜호즈 회장을 지내기도 했고, 이후 아들 최일훈을 따라 우즈베키스탄페르가나(Fergana)를 거쳐 카자흐스탄의 크즐오르다(Kzyl-Orda)로 이주해 왔다. 이후 1959년에 그는 침켄트(Chimkent)주로 다시 이주해 갔으며, 그곳에서 마지막 생을 마감했다.

강제 이주 전의 죽음의 회오리[숙청]에서도 벗어난 최봉설의 생존은 조선족의 역사에 큰 의미를 가져다주었다. 카자흐스탄에서 작가 김준과 최봉설의 만남은 간도의 조선인과 소련의 고려인 사회에 한민족 애국 청년들의 기상을 다시 한번 각인시켜 놓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작가 김준은 연해주 이만 근교 출생으로 블라디보스톡원동 국립 종합 대학(遠東國立綜合大學) 산하 노동 학원을 졸업한 후 모스크바 국립 종합 대학에서 본래는 철학을 전공했던 인물이다. 그는 강제 이주 이전부터 『선봉』 신문사의 기자로 활동하며 많은 문학 작품을 발표한 바가 있으며, 강제 이주 이후에도 『레닌 기치』의 기자로 일하며 시, 소설 등의 문학 작품 집필 활동을 하며 자신의 문학 세계를 넓혀 나갔다. 1960년 말, 알마타에서 김준은 생존자 최봉설의 생생한 증언을 토대로 역사 장편 소설 『십오만원 사건』을 탈고했다. 1955년부터 집필이 시작된 이 작품은 1964년에 총 7장으로 구성되어 다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현재 작가 김준의 묘는 카자흐스탄크즐오르다에 있는 홍범도 공원 주변에 있다. 그의 묘비에는 ‘가던 길을 다 못가 애닯으다. 김준’이라고 새겨져 있다.

유일한 생존자인 최봉설의 묘는 현재 카자흐스탄침켄트 신 공동 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자녀로는 아들 최일훈과 최다니엘(Choi Daiel), 딸 최수라(Choi Sura)를 두고 있다. 몇 해 전 필자는 한국 정부 기관의 초청으로 서울에 온 최봉설의 손자 최 블라디미르 일훈노비치(Choi Vladimir Ilkhunnovich)를 만난 바 있다. 그는 할아버지 최봉설의 영웅적인 거사를 자랑스럽게 가슴에 품고 있었고, 항일 유공자 자손으로서의 의연함을 간직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참고문헌
  • 최봉설, 「간도 15만원 사건에 대한 40주년을 맞이하여」(1959)
  • 김준, 『십오만원 사건』(알마타, 1964)
  • 독립 기념관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소, 『국외 항일 운동 유적(지) 실태 조사 보고서-Ⅱ』2002
  • 박보리스·부가이 니콜라이 저, 김광한·이백용 옮김, 『러시아에서의 140년간』(시대 정신, 2004)
  • 국가 보훈처-독립 기념관, 『국외 독립운동 사적지 실태 조사 보고서』7(2007)
  • 연변조선족자치주 위원회 문사 자료 위원회, 『연변 문사 자료 휘집』1(연변인민출판사, 2007)
  • 국가 보훈처-독립 기념관, 『국외 독립운동 사적지 실태 조사 보고서』8(2008)
  • 김춘선 외, 『중국 조선족 혁명 투쟁사』(연변인민출판사, 2009)
  • 김춘선·김철수, 『중국 조선족 통사』상(연변인민출판사, 2009)
  • 독립 기념관, 『1920년대 전반 만주·러시아 지역 항일 무장 투쟁(49권)』(2010)
  • 이정선, 「김준의 『십오만원 사건』에 나타난 항일 투쟁의 형상화 고찰」(『국제 한인 문학 연구』 제5호, 국제 한인 문학회, 2008)
  • 「15만원 탈취 사건」, 우리 역사 바로 알기-13(http://yanbian.moyiza.com/?document_srl=8282&mid=t02_1)
  • 인터뷰(용정 3·13 기념 사업회 부회장|용정시 문화관 관장 이광평, 남, 1944년생, 2011. 8.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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