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농부들과 만나는 두만강변의 양수진 농경지

한자 北韓 農夫들과 만나는 豆滿江邊의 凉水鎭 農耕地
분야 지리/인문 지리|지리/자연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도문시 양수진  
시대 현대/현대
연변조선족자치주 도문시 양수진의 무농약 ‘명품쌀’

양수진(凉水鎭)은 동쪽으로 훈춘시 밀강향(密江鄕)과 41㎞, 서쪽으로 도문시(圖們市)와 21㎞, 북쪽으로 왕청현(汪淸縣)과 45㎞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남쪽으로는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함경북도 온성군과 맞닿아 있다. 원래 왕청현에 량수향으로 소속되었다가, 훈춘현에 귀속되어 양수진으로 승격되었고, 1991년에 다시 도문시에 귀속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양수(凉水)’라는 지명은 양수촌 뒷산 기슭의 샘물이 맑고 차가워 ‘양수천자(凉水泉子)’라고 부른 데서 유래하였다. 양수진의 전체 면적은 370.4㎢이며, 12개 행정촌과 22개 자연 마을을 포함하고 있다. 2010년 현재 전체 가구수는 4,437호이며, 인구는 1만 2343명이다. 조선족은 인구수 대비 67%를 차지하고 있다.

양수진은 한 갈래의 큰 길을 중심으로 양쪽에 아담한 단층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는 가로 환경을 취하고 있다. 1970~1980년대까지만 해도 거리에는 버스역, 공소 합작사, 영화관, 생필품 백화점, 양고기 뀀점 등이 호황을 누렸다고 한다. 또 대규모 질그릇 공장이 즐비하여 동북 3성으로 김장독이나 쌀독을 공급했고, 주변에 크고 작은 탄광에서 대량으로 석탄을 채취했다고 한다.

지금은 이른바 ‘한국 바람’이 불어 닥친 이후, 양수진의 거리에는 한족의 몇몇 생필품 가게 및 조선족의 찰떡 가판을 제외하고 생필품 백화점의 면모는 찾을 길 없다. 질그릇 공장도 굴뚝용 오지 관과 기와만을 소규모로 생산하고 있고, 탄광도 양수 탄광에서만 소량으로 석탄을 채취하고 있다.

하지만 양수진은 국가급 차원에서 ‘환경이 아름다운 향진’으로 선정되었으며, 성급 차원에서 ‘위생 향진’으로 선정되었을 만큼 다른 지역에 비해 자연 환경이 빼어나며 가로 환경도 위생적이다. 특히 양수진의 유기 입쌀은 중국 전역에서 ‘명품쌀’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두만강 유역의 비옥한 농토에서 철저히 무농약으로 경작을 하기 때문이다.

조선족이 떠난 빈 농토를 한족이나 몽고족이 소작농 혹은 계약농으로 경작하고 있지만, 그들도 조선족이 경작했던 옛 방식을 고수하고 있어 ‘명품쌀’로서 명성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양수진과 맞닿은 두만강변의 한 작은 섬에서, 북한 농부들도 같은 방식으로 ‘명품쌀’을 경작하고 있다.

줄배로 두만강을 건너와 ‘명품쌀’을 경작하는 북한 농부들

양수진의 최남단이라고 할 수 있는 온성 대교 인근에서 두만강의 한 지류인 청계하가 두만강의 본류로 흘러든다. 두만강과 청계하 사이에는 ‘온성섬’이라고 부르는 작은 섬이 있는데, 강 사이에서 자연스레 형성된 땅이라 비옥하기 비길 데 없다. 원래 주인 없는 땅이었지만 언제부터인지 함경북도 온성군 풍서리 농부들이 줄배를 타고 두만강을 건너와 100㏊의 경작지를 일궜다. 풍서리 농부들은 봄이면 농기구들을 줄배에 싣고 온성섬으로 건너와 모를 심었다. 섬인지라 소까지 끌고 올 수 없어 모든 것을 두레식 수작업으로 경작을 한다. 가을이면 풍농을 이뤄 줄배에 한가득 벼를 싣고 콧노래를 부른다.

양수진을 비롯하여 도문시에는 북한과 접경한 곳이 많아 곳곳에 북한군 초소가 자리 잡고 있다. 누구든 공식적인 교통이 아니라면, 두만강을 건너 올 수 없고 건너 갈 수 없다. 그러나 온성섬으로 온성군 풍서리 농부들이 드나든 것은 자유롭다. 그렇다고 해서 변경 지역에서 벌어질 법한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지도 않는다. 풍농이 들면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일념으로 두만강의 물을 퍼 올려 수전을 만들고 벼를 키운다.

이와 관련해서, “문전옥답 다 빼앗기고 거지생활 웬말이야 / 밭 잃고 집 잃은 벗님네야 어디로 가야만 좋을가나 / 아버님 어머님 어서 오소 / 북간도 벌판이 좋답니다”라는 노랫말이 있다. 또 “아버지 어머니 북간도로 갑시다 / 거기는 살기 좋고 농사도 잘 된대요 / 차라리 왜놈 없는 그 땅에 가서 / 마음 놓고 철을 맞춰 농사합시다”라는 노랫말이 있다. 일제 강점기에 간도 유민들의 공감을 얻어 광범위하게 전파되었던 창작 민요인데, 온성섬에서 경작하는 함경북도 온성군 평사리 농부들의 상황이나 심정과 견줄 수 있을 듯하다.

그리고 온성섬 이외 양수진 하서촌 최남단에 이름 없는 한 식당이 있다. 두만강에서 낚은 산천어·숭어·버들치기·쫑개·미꾸라지·키조개 등을 재료로 요리를 선보이는데, 식당 한 켠에는 지하수가 샘솟는다. 식당 앞으로 두만강의 한 지류가 흐르고 있지만, 온성군과 불과 몇 걸음을 사이에 두고 맞닿아 있는지라, 바로 지척에서 온성군 농부들이 경작하는 옥수수밭을 볼 수 있다. 온성군 농부들이 한여름에 일을 하다가 몇 걸음의 두만강 지류를 넘어 식당 앞의 지하수로 목을 축인다고 한다. 반면 한국 여행자 중에서, 이곳을 알고 있는 실향민들이 자주 들러 망향의 설움을 달랜다고 한다.

민족 분단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양수진의 ‘끊어진 다리’

양수진에는 끊어진 다리인 온성 대교가 반쪽만 덩그러니 남아 중국과 북한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온성 대교는 일제 강점기 당시 물자 수송을 위해 건설하였는데, 해방 이전까지 연변 지역 조선족들이 이 다리를 통해 북한을 넘나들었다고 한다. 전체 18개의 교각과 2대의 교대로 구성되어 있으며, 교각의 경간 길이는 25m, 교량 넓이는 6m, 총 길이는 500m이다.

1945년 8월 8일 당시 소련은 일본에 대일 선전 포고를 하고 150만의 병력을 집결하여 중·소, 중·몽, 중·조 변경 약 3,500㎞의 전선에서 네 갈래로 진격했다. 일본은 전세가 역전되자 소련의 기병과 탱크 부대의 진격로를 차단하기 위해 8월 12일 이른 새벽에 온성 대교 다섯 번째 교각에 폭약을 묻고 폭파해 버렸다.

두만강의 끊어진 다리, 그 다리 건너편으로 보이는 북한 들녘, 그 들녘을 우마차로 가로지르는 북한 농부를 바라보면 민족 분단의 현실과 민족 통일의 필요성을 다시금 환기하게 된다. 고난으로 점철된 민족사의 재확인과 분단 현실의 직접적 체험을 양수진의 온성 대교를 통해 할 수 있다.

또한 온성 대교에서 동쪽 방향으로 1㎞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조선 노동당 1차 당대회 기념비’를 조망할 수 있다. ‘김일성 항일 유적지’로서 건립한 것인데, 현실에서는 남북의 이념을 극복할 수 없지만, 양수진의 온성 대교라는 공간에서는 ‘김일성’보다 ‘항일’이라는 관념이 더욱 크게 작용한다.

양수진은 우리들로 하여금 이렇게 역사적 관심을 일본 제국주의 지배와 항일 운동, 그리고 민족 분단이라는 경험에 초점을 맞추게 한다. 양수진의 끊어진 다리가 언젠가 이어져 중국과 북한, 북한과 한국이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는 그 날을 꿈꿔본다.

참고문헌
  • 인터뷰(전 용정시 문화원장 리광평, 남, 1944년생, 2011. 8. 13.)
  • 인터뷰(도문시 양수진 정암촌 주민 신순호, 여, 2011. 8. 13.)
  • 도문시(http://www.tumen.gov.cn)
  • 네이버 블로그 「세상을 보는 眼 눈-두만강은 흐른다」
  • (http://blog.naver.com/cya0909?Redirect=Log&logNo=70093882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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