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특별한 이야기

용정 사람들과 함께 해 온 비암산과 일송정

한자 龍井 사람들과 함께 해 온 碑岩山과 一松亭
분야 지리/인문 지리|지리/자연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비암산 일송정 정자에 올라서서

용정의 이른 아침이 밝아 온다. 어제까지만 해도 볶아대던 날씨가 미안했던지 아침부터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다. 빗줄기를 보니 우산을 들기도 놓기도 애매한 양이다. 해란강(海蘭江) 다리를 지나는 사이 빗줄기가 제법 굵어지기 시작한다. 우산을 들고 나오기를 잘 한 듯싶다. 빗방울이 흘러내리는 창문 사이로 유유히 서전 대야(瑞甸大野)의 젖줄, 해란강이 보인다. 용정에서 서남쪽으로 4㎞ 정도를 가니 말로만 듣던 비암산(琵岩山)이 보인다. 정상까지 차가 힘차게 오른다. 정상에는 ‘일송정(一松亭)’이라 새겨진 사각형 모양의 일송정 기념비가 서있고, 그 좌우편에 시 「비암산 진달래」[조룡남(趙龍男)]와 노래 「용정 찬가」[이태수(李泰洙)]가 새겨진 바위 비석이 나란히 서있다. 주변을 보니 ‘「선구자」 노래비’와 ‘강경애 문학비’도 있다. 일송정 기념비(一松亭紀念碑) 뒤편으로 작은 길이 나있다. 좁고 수풀이 우거진 이 길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지났으리라. 오늘 내가 그 무수한 발자국 중의 하나를 남기고 있는 것이다. 그 길을 따라 가니 육각형의 누각이 나온다.

금새 그칠 줄 알았던 비가 여전히 멈출 줄 모른다. 과거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일송정 누각에서 이른 아침부터 내리는 비를 보고 있노라니 가슴 속 한 켠에 아련한 아픔이 느껴지는 듯하다. 일송정에서 사방이 내려다 보인다. 조용히 한 켠에 서서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며 「용정의 노래」인 「선구자」를 읊조려 본다. ‘일송정 푸른 솔은/늙어 늙어 갔어도....’. 저멀리 군데군데 마을들과 도시들이 보인다.

옅은 안개에 잠겨 있는 용정의 아침이 보인다. 아! 저곳이 바로 연변 항일의 상징, 용정이구나! 답사팀 안내자는 부지런히 사방을 가리키며 지리와 지형, 주변의 지형지물, 그리고 비암산일송정에 얽힌 한 많은 사연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비암산과 용정에 대한 무한 애정을 뿜어내 듯 칠순을 바라보는 안내자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비암산에 울려 퍼지고 있다. 마치 그 옛날 일본 경찰들을 꿇어 앉혀놓고 호령을 치듯이...

용정의 조선족들 치고 용정과 비암산, 그리고 일송정에 얽힌 이야기를 모르는 이가 누가 있을까! 그들 모두가 바로 이곳 비암산의 정기를 받고 태어나 자랐으리라. 저 멀리 서쪽으로는 해란강 물줄기가 은띠처럼 감돌아 흐르고 있다. 조국의 해방을 위해 얼마나 많은 선각자들이, 항일 인사들이 저 강을 바라보며 가슴 저며 했을까.

그리고 바로 강 주변에 젖과 꿀이 흐르는 연변의 ‘가나안(Canaan)’, 세전 평야가 펼쳐져 있다. 어디 그 뿐인가, 오른쪽으로는 용정 시가지가, 그리고 멀리 모아산(帽兒山)과 발아래 해란강이 마치 한 폭의 풍경화를 연상시킨다. “원더풀!, 원더풀!” 그저 감탄사만 절로 나온다.

비암산 바위 꼭대기에 자리 잡은 일송정 정자 옆에 아직은 작은 소나무 한 그루가 외롭게 비를 맞으며 서있다. 바로 우리의 주인공 소나무 ‘일송정’이다. 왜 이 소나무는 여기에 서 있을까? 너무도 많은 아픔을 겪어서 일까, 줄기에 흐르는 빗물이 마치 눈물이 되어 흐르듯 미끄러져 내린다. 바쁜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저 소나무가 안고 있는 가슴 깊은 사연을 잠시 들어보자.

일송정에 담긴 이야기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지난 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

지난 세기 1940년대 초에 창작된 「선구자」의 첫 소절 가사이다. 본래 이 노래는 1943~1944년 초에 윤해영(尹海榮) 작사, 조두남(趙頭南) 작곡의 「용정의 노래」였다. 이후 「용정의 노래」 일부 가사가 개사되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선구자」라는 제목으로 불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선구자’의 파급 효과는 자못 컸다. 이 노래의 파급과 더불어 세인들은 용정에 일송정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연변의 조선족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한민족들도 구름처럼 연변 용정에 찾아오기 시작하였다.

한 그루의 소나무, ‘일송정’이 자리 잡고 있는 비암산은 용정에서 서남쪽으로 약 4㎞ 되는 곳에 웅크린 호랑이 모양, 혹은 절반 잘린 비파 모양으로 생긴 낮은 산이다. 50여 년 전 까지만 해도 비암산 제일 북쪽 낭떠러지 바위 꼭대기에 두 아름도 넘는 소나무가 서 있었다. 소나무의 모양이 흡사 돌기둥에 푸른 청기와를 얹은 정자 모양의 소나무 한그루가 우뚝 서있는데, 예로부터 사람들은 그 소나무를 ‘일송정’이라고 불렀다.

오늘날 사람들은 ‘일송정’과 누각이 서 있는 그곳을 묶어서 일송정이라고 부르고 있다. 과거부터 용정 지역에 사는 조선인들은 희귀한 ‘일송정’을 성스러운 길상물(吉祥物)로 여겼다. 여인들은 생남(生男)하기 위해서 ‘일송정’과 그 바위를 기자석(祈子石)으로 삼았고, 농부들은 가뭄이 들 때면 일송정을 향해 기우제(祈雨祭)를 지냈으며, ‘일송정’의 정기를 받는 것을 향수로 삼았다.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가와 항일 선각자들은 소나무가 서 있는 그 곳, 즉 일송정을 비밀 집회 장소로 이용했고, 1928년에 중국 공산당 용정 지부가 건립된 후에는 용주사와 일송정에서 비밀 회합의 장소로 이용했다. 이 무렵 용정에는 27개소의 중소학교와 동흥(東興)·대성(大成)·은진(恩眞)·광명(光明) 등 6개 중학교가 있었다. 애국 인사와 교사, 청년들은 자주 일송정에 올라와 정기를 호흡하고 가곤 했고, 학생들은 비암산에서 봄, 가을철에 야영을 하기도 했다.

용정의 조선인들이 비암산일송정을 귀하게 여긴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산 밑의 용주사에서 일송정을 바라보면 그 모양이 마치 바위 위에 호랑이가 버티고 앉아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호랑이를 길상물로 여겨 온 백의민족의 후손답게 용정의 조선인 이민자들은 호랑이 모양의 일송정이 밤낮으로 용정을 굽어 보면서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헤아리고 지켜준다고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용정에 일본 총영사관(日本總領事館)까지 설치하고 연변 침략과 강탈의 기회만 보고 있던 일제에게 비암산일송정은 언제나 눈의 가시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민간에서는 소나무 ‘일송정’과 관련해 한 편의 이야기가 회자되고 있다.

“용정의 일본 총영사관에 있는 영사들이 무슨 영문인지 자꾸 시름시름 앓았다. 그래서 점쟁이를 청해 알아보니 서쪽에서 오는 음침한 기운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에 일본놈들이 그 음침한 정기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를 점장이에게 물었더니 저 비암산의 ‘일송정’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므로 그걸 없애야 한다는 답을 듣게 되었다. 그러자 일본인 영사들은 일본 군대를 시켜 일송정을 과녁삼아 총도 쏘고 박격포를 쏘았는데, ‘일송정’ 소나무는 죽지 않고 여전히 서 있었다. 이에 화가 치밀어 오른 일본 총영사관 놈들이 사람을 시켜 한밤중에 ‘일송정’ 나무기둥에 구멍을 판 후 그 구멍 안에 호두씨[혹은 후춧가루]를 넣고, 쇠못을 박았다. 그 후 얼마 안 가서 두 아름이나 되는 ‘일송정’ 소나무는 말라 죽었다.”

이 이야기가 실화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두 아름이나 되는 ‘일송정’ 소나무는 1938년 경에 끝내 말라죽어 없어지고 말았다. 사람들은 일제의 미움과 탄압을 받아 ‘일송정’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어쩌면 실제로 ‘일송정’은 일제의 시기와 탄압으로 정말 죽었는지도 모른다. 그만큼 일제의 탄압이 서슬 퍼렇게 연변의 조선인 사회를 강타하던 때였다.

일송정 복원 이야기

개혁개방 이후 수천 수만에 달하는 해외 관광객들이 용정을 찾았고, 비암산일송정을 찾았다. 이에 용정시 인민 정부와 각계 인사들은 용정의 역사가 배어 있는 일송정을 복원시켜 용정을 홍보하는 상징물로 삼고자 했다. 또한 이를 통해 용정의 관광 사업을 발전시키고, 용정과 고향, 조국을 사랑하는 애국심을 키워주는 기지로 삼고자 했다.

1991년 3월 13일, 용정시 인민 정부 부시장 이준일(李俊一) 등의 적극적인 추진으로 비암산일송정 복원 사업이 시작되었다. 부시장을 비롯한 인민 정부 관계자들은 해외에서 자금을 인입하여 ‘일송정’이 자라던 코숭이 바위 위에 정자처럼 생긴 소나무 한그루, ‘일송정’를 옮겨 심었고, 그 나무 옆에 육각 정자를 세웠다. 이어 용정시 인민 정부에서는 일송정 관리와 비암산 관광사업을 시 건설국에서 책임지도록 했다. 그러한 노력으로 인해 다행히도 ‘일송정’은 그 어려운 자연환경 속에서도 잘 자랐다.

2001년 9월, 용정시 인민 정부는 일송정 복원 10주년 기념 행사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그런데 기념 행사 며칠 전인 9월 4일에 불미스런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 누군가가 한밤중에 비암산일송정에 올라 ‘일송정’ 소나무를 톱으로 베어버린 것이다. 행사 관계자들 뿐만 아니라 용정의 조선족 모두가 놀랄 만한 일이 발생한 것이다. 결국 9월 10일, 인민 정부 관계자들은 일송정에 임시로 부근의 소나무를 옮겨다 심고 10주년 기념 행사를 진행하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나무 또한 자리를 잡지 못하고 말라죽고 말았다.

이듬해인 2002년 3월 27일, 용정시 인민 정부 부시장이며 용정시 조선족 문화 발전 추진회(朝鮮族文化發展推進會) 회장인 이준일의 노고로 해외로부터 자금을 인입하여 일송정에 소나무를 다시 심었다. 이 소나무는 광신향(光新鄕) 승지촌에서 자란 40여 년생 나무였는데, 이식 기술의 미흡으로 옮겨 심은 소나무는 끝내 다시 죽고말았다. 그로 인해 주변에서는 이러쿵 저러쿵 많은 말들이 퍼져나가기도 했다.

비암산일송정에 소나무를 이식해 과거처럼 길상물이었던 ‘일송정’을 재생시키자는 용정 조선족 사회의 열망은 계속되었다. 이준일 부시장은 다시 자금을 인입한 후, 2003년 3월 15일에 비암산일송정에 소나무를 다시 심었다. 이식 과정에서 관계자들은 실패의 경험을 교훈삼아 이식 자리를 예전에 심었던 자리에서 동쪽으로 5m 가량 옮긴 후, 바위를 파내고 그 자리에 몇 트럭분의 흙을 담아다 부었다. 이어 그 자리에 소나무를 이식한 후 주변에 담을 쳐주고 수분도 적당하게 맞추어 주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소나무가 죽지 않고 잘 자랐다. 소나무를 동쪽으로 약간 옮김으로써 햇빛을 더 잘 받게 되고, 바위를 파내고 새로운 흙으로 환경을 조성해 준 것이 ‘일송정’ 소나무의 성공적인 이식과 생존의 열쇠였으리라 짐작된다. 물론 이 보다 더 큰 것은 ‘일송정’을 복원하고자 하는 용정 조선족 사회의 열망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새로 옮겨 심은 ‘일송정’ 소나무는 10년 가까이 잘 자라오고 있다. 그 사이에 키도 크고 가지도 보기 좋게 뻗쳐져 있다. 현재 수많은 사람들이 일송정을 찾으며 과거의 아픔을 되새기고, 내일의 발전을 위해 마음의 창을 열고 각오를 다지고 있다. 여기에 더해서 용정시 인민 정부에서는 ‘비암산 관광 유람구’를 건설할 장기적인 목표를 세우고, 비암산 정상과 일대에 일송정 기념비와 「선구자」 노래비, 강경애 문학비, 텔레비전 중계탑 등을 세웠다. 그리고 비암산 기슭에 해란강 경기장, 실내 체육 문화 활동실, 간부 휴양소, 미술관 등을 세우고, 용정, 연변 뿐만 아니라 해외 한반도에까지 관광객들의 발길을 이끌고 있다. 유서 깊은 일송정이 다시 살아나 용정의 홍보물로, 관광 유람업의 효자 노릇을 잘하고 있는 것이다.

비암산을 내려가며....

일송정을 내려갈 시간이 되자 어느새 비가 멈추어 있다. 마음 속의 이야기를 다 쏟아낸 듯 안내자는 얼굴에 만족스런 미소가 머금고 있다. 사람들이 올 때마다 수없이 찾아온 곳이건만 그는 언제나 열정과 사명감으로 용정과 일송정에 얽힌 사연을 외부인들에게 전하고 있다. 어쩌면 용정의 역사를 알리고 전하는 것이 그의 마지막 남은 사명인지도 모르겠다. 어느새 요 며칠 사이 쌓여 있던 피로가 일송정의 아름다운 풍경과 맑은 공기에 싹 사라지고, 온 몸의 힘이 솟아남이 느껴지는 듯하다. 나도 이곳에 머무는 잠시 동안 비암산의 강한 기운과 정기를 받았나 보다.

해마다 수천 수만의 국내외 관광객과 시민들이 이곳으로 여행을 오며 산을 오르고 있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비암산일송정의 정기를 받고, 마음의 안식을 얻으며, 나아가 큰 꿈을 키우고 미래를 다짐하고 돌아간다. 비암산일송정은 이제 연변의 명승지이자 용정이 자랑하는 성지가 되었다. 한민족 모두가 아끼고 보호하여 자자손손 대대로 물려주고 보호해 나가야 할 것이다. 비암산을 내려가는 길, 어느새 입가에서 「선구자」가 다시 흥얼거려지고 있다.

참고문헌
  • 백민성, 『유서깊은 해란강반』(연변인민출판사, 2001)
  • 전광하·박용일, 『세월 속의 용정』(연변인민출판사, 2002)
  • 룡정시 조선족 문화 발전 추진회 문화총서, 『일송정』제5기 (연변인민출판사, 2002)
  • 김춘선 외, 『중국 조선족 혁명 투쟁사』(연변인민출판사, 2009)
  • 김춘선·김철수, 『중국 조선족 통사』상(연변인민출판사, 2009)
  • 김춘선·김철수, 『중국 조선족 통사』중(연변인민출판사, 2009)
  • ˂중국 연변(북간도)에 복원 20주년기념 일송정 방문˃ (http://blog.daum.net/srlee22/16042170, 2011.09.30)
  • ˂一松亭 소나무와 용주사가 복원되고 있다˃ (http://www.chinainfor.com/tax/index.php?action=view&number=1746&ca_no=56&page=24, 2005.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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