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豆滿江 나루터 船口와 船口 山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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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 지역 |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개산둔진 선구촌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 현 소재지 |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개산툰진 선구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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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조선인 이주 1세대들은 일찍부터 두만강(豆滿江)과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중국 동북 지방에 이주·정착했다. 이와 관련해서는 현재의 용정시 개산둔진 선구촌(開山屯鎭 船口村)[당시 화룡현]에 자리 잡은 이주 1번지 선구(船口)[나루터]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선구란 이름은 두만강에 자리 잡은 작은 충적지인 간도(間島)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나루터 선구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간도라는 명칭은 어떤 관계가 있고, 또 어떤 흥미로운 이야기가 숨어있을까? 간도 명칭의 유래와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이곳 두만강 바닥에는 오랜 시기 동안 진흙과 모래가 쌓여 길이 2,500여 m, 너비 500여 m 정도의 충적지가 생겼다. 당시 중국에서는 이 충적지를 ‘가강(假江)’이라고 불렀다. 1878년 경 부터 조선종성(鐘城)의 농민들이 두만강을 건너와 이 충적지를 일구고 농사짓기 시작하였다. 1881년에 그들[종성 농민들]이 두만강 북쪽에다 물도랑을 빼는 바람에 이 충적지는 ‘섬’처럼 변해버렸다. 그때부터 그들은 이를 ‘간토(墾土)’ 혹은 ‘사이 섬[간도(間島)]’이라고 불렀고, 중국인들은 ‘협강(峽江)’ 혹은 ‘가강(假江)’이라고 불렀다.
1888년부터 중국 측에서는 이 ‘섬’에서 농사짓는 조선의 종성 농민들로부터 땅세를 받았다. 적지 않은 조선 사람들은 간도로 일하러 간다는 구실을 대고 중국에 불법 입국을 하였다. 이곳에는 뗏목이나 작은 배를 타고 오가는 사람들이 점차 많아지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나루터가 생기게 되었다. 나루터를 중국말로 선구(船口)라고 하는데, 그 한자음에 따라 조선말로 ‘선구’라고 불리게 되었다.”
1883년 9월, 청나라 조정과 조선 조정은 길림·조선 상인 무역 지방 규정(吉林朝鮮商人貿易地方規定)을 체결하였다. 이에 근거하여 1885년 화룡욕(和龍峪)[현 용정시 지신향, 달라자(大拉子)]에 통상국(通商局)이 세워졌고, 광제욕(光霽峪)[현 용정시 개산둔진 광소촌(光昭村), 선구촌과 인접한 곳]과 서보강(西輔江)[현 훈춘시 삼가자향 고성촌(三家子鄕 古城村)]에 통상분국이 세워지며 조선의 회령(會寧), 종성(鐘城), 경원(慶源) 등의 지방에 대한 통상 사무를 처리하게 하였다. 또 같은 해 청 조정은 두만강 이북 지역에 길이 700여 리[약 274.9㎞], 너비 40~50리[약 15.7~19.6㎞] 크기의 조선 이민 특별 개간구를 정하고 월간국(越墾局)을 설치 한 후 조선 이민의 개간 사무를 관리하게 함으로써 조선 이민들이 농사를 짓는 데 편리를 조성해 주기도 했다.
1903년 조선 관원[간도 관리사(間島管理使)] 이범윤(李範允)은 월간국에 공문을 보냈다. 이 공문에서 그는 ‘협강’을 ‘간도’라 칭하고, 조선 농민이 개간·경작하고 있기 때문에 간도를 조선 영토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청 정부는 이를 부정했다. 이것이 공식적으로 ‘섬’ 즉, ‘사이 섬’이 ‘간도’로 불리게 된 계기이고, ‘간도 문제’의 시작이다. 그 후 1904년 6월 15일, 조·청 두 나라의 지방 관리들은 조청 변계선 후 규약(朝淸邊界線後規約)을 체결했고, 그 제8조에 “간도라고 하는 광제욕가강(假江)의 땅을 의연히 종성 조선인들이 경작하게끔 세를 준다”고 명시하였다.
그러나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침략적 야심을 채우기 위하여 간도 문제를 조작하였다. 그들은 간도의 지리적 개념을 확대시켜 두만강 이북의 땅을 ‘북간도’, 압록강 이북의 땅을 ‘서간도’라고 명명하고 구분 지었다. 이어 1908년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비합법적으로 이른바 도사장제(都社長制)를 건립하고, 지리적으로 확대된 간도를 조선과 연결시켜 4개의 구역으로 나누었다. 즉 북도사, 회령 간도, 무산 간도, 종성 간도로 나누었다.
이후 1909년 9월 4일, 일제는 부패한 청나라 정부를 협박하여 북경에서 두만강 청조 계무 조약[圖們江淸朝界務條約] 즉, 간도 협약(間島協約)을 체결했다. 일제는 이 조약에 의하여 이른바 간도를 중국 영토, 두만강을 조·청 두 나라의 변계선임을 정식으로 승인했다.
하지만 일제는 야욕을 곧바로 드러냈다. 그들은 곧바로 용정촌과 국자가 등지에 일본의 상무지를 개설하였으며, 간도 조선인들에 대한 영사 재판권(領事裁判權)과 길회 철도 부설권[吉林~會寧 鐵道敷設權]을 획득했다. 1909년 11월 1일에는 조선 통감부 간도 파출소(朝鮮統監府間島派出所)를 철소하고, 이튿날에는 용정에 간도 일본 총영사관(間島日本總領事館)을 공공연히 세웠다. 나아가 일제는 상무지에 분관을 세우고 의연히 연변 지구를 ‘간도성(間島省)’으로 행정구역을 설정했다. 청과 조선, 두 나라 간에 풀어야 될 영토 문제가 일제의 개입으로 인해 결정적으로 꼬여버린 안타까운 순간이었다.
1999년 10월 3일, 필자는 두만강의 나루터인 선구의 유래를 재확인하려고 오토바이를 타고 선구촌으로 달려갔다. 그 곳에서 나루터의 유래를 잘 알고 있는 선구촌 장동골에서 태어난 박흥송(朴興松) 노인을 만났다. 박 노인은 필자를 반갑게 맞이하며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려주었다.
“저의 아버님 박현구(朴賢久)께서는 100 여 년 전에 이 나루터를 거쳐 조선함경북도 풍곡면 풍천동(豊谷面 豊川洞)에서 지금의 선구촌 장동골에 건너왔답꾸마. 아버님의 말씀에 따르면 130년 전에 종성 하산봉의 이형수 형제네가 뗏목을 타구 이곳으로 건너와 이 천평(泉坪)벌에 개척의 괭이를 박았답꾸마. 그 후 어윤중(魚允中)이 ‘월강죄 불가진살(越江罪不可盡殺)’이라 한 후부터 이씨 형제는 가정을 데리고 아주 이사를 왔다잼둥.
중국 정부에서 조선 이민들을 받아들이자 이곳을 거쳐 뗏목을 타고, 배를 타고 오가는 사람들이 많게 되었답꾸마. 그 후엔 이쪽 나루터로부터 저쪽 대안 나루터에까지 굵은 와이야줄[강삭(鋼索), 여러 가닥의 강철 철사를 합쳐 꼬아 만든 줄]을 팽팽하게 매여 놓구서 그 와이야줄에 나룻배 뱃줄을 걸고서 오가게 했답꾸마. 큰 배 둘을 묶어서 만든 나룻배가 얼마나 컸던지 3대의 곡식수레를 싣구두 20여 명의 행인들이 더 탔답꾸마. 나루터가 커지자 인구가 많이 불었구, 나루터옆엔 일제가 세운 세관과 경찰 분주소, 세무소가 들어앉았잼둥. 마을엔 학교, 상점과 요리점들두 선후로 늘었답꾸마.
1934년에 개산둔 국경 철도 공로 다리가 개통되기 전까지는 이 나루터가 북간도의 주요한 대외 수출구로 되였답꾸마. 콩과 목재와 같은 물자들이 배에 실려 두만강을 따라 일본에 나가기두 하구, 또 종성에 집중되었다가 일본에 나갔답꾸마. 그땐 정말 가관이였다구 합더꾸마. 콩을 실은 배가 두만강에 가득 찼다는 뜻에서 두만강을 ‘두만강(豆满江)’이라고 불렀다는 향토 전설까지 나오지 않았겠숨둥?”
박흥송 노인은 필자 일행을 이끌고 이번에는 나루터 옛터로 나갔다. 그는 제방 둑에서 내려 서쪽으로 돌아 작은 호수 옆에 멈춰 섰다. 박 노인은 호수 면과 약 1m 정도 경사진 오른쪽 논머리 쑥대 속에 묻힌 서까래 절반 크기의 콘크리트 위에 오르더니 다시 생생한 증언을 이어 나갔다.
“바로 발밑의 이 콘크리트 덩이가 그 옛날 와이야줄을 맸던 자리입꾸마. 바로 이곳에 작은 나무 다리가 놓여있었습꾸마. 그 나무 다리로 작은 강을 건너서 섬에 오르구 섬 동쪽 기슭에서 나룻배에 올라가 강을 건넜답꾸마. 60여 년의 시간이 지난 오늘 나루터의 흔적마저 찾을 수 없잼둥?”
박 노인은 제방 둑을 쌓았기에 이제는 과거의 나루터 모습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했다. 필자 일행은 박 노인을 따라 제방 둑을 넘어 이전에 와이어 로프(wire rope)가 드리워졌었던 자리를 따라 나무배를 탔다던 섬 기슭에 이르렀다. 박 노인은 강 건너편을 가리키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
“와이야줄이 이곳으로 해서 강 건너까지 갔답꾸마. 그런데 조선에서도 제방 둑을 높이 쌓아서 건너편 나루터 자리를 볼 수 없잼둥. 그땐 다니는 사람들이 정말 많았습지.”
박 노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필자는 나룻배가 다녔다는 강물을 바라보았다. 두만강은 잔잔한 파도를 일구면서 흘러간다. 그 옛날 조선인 선조들이 이 강물에 흘린 눈물이 얼마이고, 그들의 원한 또한 얼마였을까? 만약 두만강물이 말을 할 줄 안다면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우리한테 들려줄 수 있었을까!
개산둔 선구촌 미도둔(尾島屯)[현 선구 제6촌민소조] 서북쪽 용정과 도문을 통하는 포장길 옆에 한글과 한자로 ‘길림성 중점 문물 보호 단위 선구산성(吉林省重點文物保護單位船口山城)’이라 새겨진 기념비가 나란히 서있다. 이 기념비에서 서북쪽으로 약 2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작은 산언덕이 있다. 바로 그 언덕에 발해 시대부터 금 시대까지 계속해서 사용된 선구산성 유적지가 위치하고 있다. 『용정현 문물지(龍井縣文物志)』에서는 선구산성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선구산성은 동남성과 서북성의 두 부분으로 이뤄졌는데, 성터의 모양은 능형이고 방향은 140°이다. 동남성의 둘레는 1,960m, 서북성의 둘레는 1,814m이고, 토성의 높이는 약 4m이다. 토성은 산등성이를 따라 쌓여져 있다....... 동남성은 중심이 되는 성이고 서북성은 부속된 성이다.......”
한편 연변 문학가 김재권(金在權)의 글에 묘사된 선구산성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선구산성의 높이는 해발 201m이고, 성벽은 흙으로 쌓아 만들어 졌으며, 산성은 내성과 외성으로 되어있다....... 남쪽과 북쪽에 성문이 각각 하나씩 있는데, 성문은 원형을 이루고 있으며 지금은 마사져[부서져] 완전하지 못하다.......성내에 있는 유물로는 세 줄로 된 20여 개의 주춧돌과 꽃무늬가 있는 검은색, 붉은색, 누른색의 기와 조각과 도자기 조각이 있으며, 그리고 돌절구 등도 남아있다. 성 남쪽에는 망루(望樓)의 유적이 있다.”
2001년 6월 5일, 필자는 오토바이를 타고 선구촌에 달려가 선구산성을 잘 안다는 윤희철(尹熙哲)과 함께 산성에 올랐다. 가는 길에 다시 동남성에 속하는 배 밭에서 일하던 선구촌 6 소조손철산(孫哲山)을 만나 동행을 했다. 그는 앞장서서 우리 일행을 동쪽 토성 터와 가까운 곳에 있는 작은 우물가로 안내하였다. 우물의 직경은 0.5m를 훨씬 넘을 것 같았다. 우물 둘레에는 동그란 강바닥 돌들을 동그랗게 쌓았는데, 고추개구리 몇 놈이 물속에서 노닐고 있었다. 이 우물가에서 윤희철은 소년 축구공보다 조금 작고, 여러 가지 색깔의 무늬가 아롱진 돌을 주었다. 그는 앞장서 가며 돌들을 주어 우물 둘레에 더 쌓기도 했다. 윤희철이나 손철산도 이 우물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며 전문가들의 연구와 고증을 거쳐야 할 것이라고 했다. 그동안 산성에 대해서는 조금 알고 있었다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무수한 미지수가 담긴 신비로운 우물과 산성을 보면서 필자 또한 아는 것이 너무나 적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름을 느꼈다.
필자는 토성 터 중에서도 모양이 제일 뚜렷한 곳의 촬영을 제안을 했고 그들은 북쪽으로 20여 분 떨어진 곳에 위치한 끊어진 토성으로 안내해 주었다. 토성은 불도저로 훼손되었는데 토성 횡단면에 의해 토성 밑 너비가 약 4~5m, 높이가 약 4~5m, 토성 윗면 너비는 1~2m 정도로 추측할 수 있었다. 산등성이를 따라 쌓은 토성은 구불구불 뻗어나갔는데, 그 위에는 각종 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라서 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선구산성 터를 여기저기 바삐 돌아다니다 보니 시계는 이미 낮 12시를 훨씬 지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배에서 꼬르륵 꼬르륵 밥을 달라고 불만스럽게 보채는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답사에만 신경을 쓰다 보니 점심 식사 준비를 해 오지 않았다. 그 순간 일행에게 미안한 마음 들었으며 식사를 준비하지 않은 내가 미웠다. 필자는 미안하다고 말하면서 일행에게 내려가자고 제의를 했다. 하지만 그들은 이왕 올라왔으니 조금 더 돌아보자는 답을 주었다. 참 고마운 순간이었다.
우리 일행은 『용정현 문물지』에 있는 지도를 펼치고 위치를 확인한 후 나무숲을 헤치고 다니며 흔적들을 찾고 또 찾았다. 다행히 우리는 20여 개의 크기가 비슷한 검붉은 색의 돌들이 줄지어 놓여있는 것을 발견했다. 문물지의 기록에 의하면 32개의 주춧돌들이 3줄로 동서 방향에 따라 놓여있는 이곳이 바로 선구산성의 중심이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우리가 선구산성의 중심을 찾은 것이다. 그 돌들 주위에는 깨여진 기와 조각들과 질그릇 조각들이 많이 널려있었다. 그 돌들을 자세히 살펴보던 필자는 발방아확[디딜방아 확]처럼 홈이 파진 돌 하나를 발견했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인공적으로 가공된 흔적이 분명하다는 느낌이 확 들었다. 필자는 조심스레 주위의 잡초들을 제거하고 신비한 돌들이 상하지 않도록 주의해서 카메라 렌즈에 담았다.
어느 덧 오후 두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욕심 같으면 옹문(擁門) 자리도 가봤으면 좋으련만 지치고 배고픈 건 물론이고 오후에 다른 볼일이 있다는 그들을 더 잡을 수는 없었다. 우리들은 다음에 다시 오기로 하고 지친 다리를 끌면서 마을로 내려와 윤희철의 집에서 가볍게 점심을 먹었다. 볼 것을 보고 찾을 것을 찾은 후에 먹는 때 지난 점심은 꿀맛 그 자체였다. 식사 후 필자는 도움을 준 일행의 개인 일정에 지장을 주지 않으려고 바삐 오토바이를 타고 용정으로 돌아왔다. 올 때마다 새로운 무언가를 얻고 배워간다는 생각에 돌아가는 길 내내 가슴 속 한편에 뿌듯함이 밀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