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延邊 쌀의 代表 브랜드 御谷米의 고장, 光昭村 下天坪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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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야 | 지리/인문 지리|지리/자연 지리 |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 지역 |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개산둔진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백두산에서 발원한 두만강은 북한과 경계를 이루면서 화룡시, 용정시, 도문시, 훈춘시를 차례로 거쳐 동해로 빠져 나간다. 모두 두만강을 통해 중국과 북한을 이어주는 통상구[해관]를 갖고 있는데, 용정시에는 삽합진과 개산둔진에 있다. 삼합은 북한의 회령, 개산둔은 북한의 종성을 마주보고 있는데, 회령과 종성 모두 조선세종 때 김종서 장군이 개척한 육진에 해당한다. 개산둔 통상구에서 도문시 방향으로 나가 광소촌 구역에 이르면 먼저 오른편으로 정동 학교 옛터를 만날 수 있다. 정동 학교는 1908년 정동 서숙으로 개산둔진 후저동에서 개교하여 1919년 3·13 반일 시위 이후 일제에 의해 방화되어 사라질 때까지 명동촌의 명동학교와 쌍벽을 이룬 민족 학교였으며, 1946년 정동 중학교라는 이름으로 다시 문을 열었으나 1990년대 중반 다시 폐교되었다.
그리고 바로 만나는 곳이 두만강변의 기름진 땅 천평벌이다. 두만강을 옆에 끼고 아득히 펼쳐진 천평벌에는 청나라 제11대 황제인 광서제[재위 1874〜1908] 초기부터 조선의 가난한 농민들이 건너와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점차 마을이 형성되었다. 천평벌은 기름진 땅, 맑은 공기, 짧은 무상일수와 풍부한 일조량 등 벼의 성장에 훌륭한 조건을 갖춘 덕에 벼가 매우 잘 여물어, 밥만 해놓아도 투명하고 점착성이 강하여 기름기가 찰찰 돌았다. 이러한 이유로 사람들은 이곳을 ‘하늘의 중심’이라고도 하였다.
천평이란 이름은 한자로 ‘천평(泉坪)’ 즉, 맑은 샘물이란 뜻이다. 오늘날까지도 ‘샘물 구팡’ 혹은 ‘천평’이라 불리고 있다. 천평벌은 말 그대로 맑은 샘물이 있는 곳이다. 옛날 천평벌의 샘물은 깨끗하고 그 맛이 좋다고 소문이 나서 샘물을 놓고 옥황상제의 왕자와 싸움을 벌인 전설까지 전해져 오고 있다.
1942년 만주국강덕 황제가 지정한 어곡전(御穀田)이 하천평벌에 생긴 유래는 다음과 같다. 1917년 2월 18일에 조선충청북도 청주군 학사면 원평리에서 태어난 최학출은 살길이 막막하여 사촌 자형 박종률을 찾아 1935년에 개산둔 하천평 마을로 왔다. 그러나 밭 한 떼기도 없는 최학출은 지주의 땅을 부쳐 먹는 소작살이로 근근이 생계를 유지해야 했는데, 한 가닥 희망만은 잃지 않았다. 어쨌든 두 손이 성한 것만큼 일만 잘하면 잘 살 수 있다고 믿고 소출을 많이 내어 자신의 몫을 더 늘리겠다는 생각에서 수확고를 더 높이는 방법을 탐구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벼 농사는 주로 산종(散種)을 했고 벼 모 이식을 조금씩 하는 정도여서 1㏊당 쌀 생산량이 많지 않았다. 최학출은 넓은 땅 전부에 모내기를 하겠다는 생각으로 한랭한 기후 조건을 이겨낼 수 있는 ‘기름종이 온상 육모법’을 도입하여 시험해 보았다. 그는 1941년 봄에 처음으로 유리 창문처럼 간이 문창을 짜서 백지를 붙이고 콩기름을 발라 햇빛이 잘 들어가도록 투명도를 높인 다음 벼모판을 만들고 씨앗을 뿌렸다. 그 결과, 모가 빨리 자라났을 뿐만 아니라 유별나게 벼모가 건실하게 자라났다.
이 해 최학출은 남보다 한 절기를 앞서 벼모를 내었는데, 다른 이들이 산종한 벼들의 이삭이 겨우 필 때 최학출의 벼는 이미 이삭을 숙이게 되었고 소출도 뜻밖에 아주 높아졌다. 그리고 수확한 햅쌀로 지은 밥은 백옥같이 희고 기름기가 있어 그야말로 천하진미요, 천하진품이 되었다. 최학출이 새 영농법으로 벼 단위당 수확고를 높였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널리 퍼졌다. 최학출의 벼는 연길현과 간도성 농산품 전시회에 출품하여 호평까지 받아 전 만주국으로 소문이 났다.
최학출의 온상 육모법은 만주국강덕 황제에게까지 전해졌다. 마침내 만주국 중앙에서는 사람까지 파견하여 조사하게 하고 쌀을 가져가 검증한 후, 1941년 12월에 최학출을 만주국 수도인 신경[지금의 장춘]으로 불러 그에게 상금 천 위안과 일본에서 만든 괘종 시계를 선물로 주었다. 동시에 천 평의 논밭을 맡겨 벼를 생산하게 하고 가을에 입쌀을 진상하게 했다. 개산둔 하천평벌에 어곡전이 만들어진 것이다.
최학출이 맡은 어곡전은 주위에 울타리를 둘러 멀리에서도 쉽게 알아볼 수 있었고 사람들이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촌 공사와 경찰서, 현의 관원들은 어곡전을 호위하고 일해 준다는 구실로 초봄부터 늦가을 타작에 이르기까지 최학출의 집에 머물면서 맛 좋은 음식과 술로 포식하였다. 이에 연길현과 간도성에서 받은 장려금과 신경에서 받은 상금 천 원이 모두 그들의 먹자판에 들어가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일이 생기기도 하였다.
어곡전은 봄에 논갈이를 할 때만 소의 힘을 빌었을 뿐 그 외의 일들은 모두 사람의 힘으로 해야 했다. 논에 일을 하러 들어갈 때엔 우선 손발을 깨끗이 씻어야 했고, 가을에 벼를 거두고 탈곡할 때면 현과 성의 해당 인원들이 내려와 현지 검사를 했고 탈곡이 끝나면 상급 기관에 보고하였다. 어곡미를 황궁에 진상하는 일은 참으로 번거로운 일이었다. 우선 먼지가 없도록 키를 위 아래로 흔들어 까붐질을 한 다음 정미를 하고 온 마을 처녀들을 끌어다 무보수로 쌀을 고르게 하였다. 처녀들은 유리판 위에 쌀을 펴놓고 한 알 한 알씩 골랐는데, 쌀알의 귀가 조금 떨어져도 안 되고 빛깔이 좀 달라도 안 되었다. 마지막으로 순면으로 만든 통일된 규격주머니에 어곡미를 넣었다.
당시 최학출의 벼 품종은 ‘소전대 5호’[올종]를 선택했는데 벼모의 방식은 점조식이었다. 모를 키우는 모상판의 너비는 1m, 길이는 8m로 지금의 담배모를 키우는 것처럼 나무틀을 만들어 모판을 다지고 그 위에 씨를 뿌린다. 그 후 흙으로 덮고 위에 모래를 얇게 펴고 기름 종이를 씌워 벼모가 자라도록 했다. 최학출의 벼 농사 기술은 날이 가면서 사람들의 인정을 받게 되었다. 마침내 1943년 봄, 최학출은 만주국 중앙 농업 대표단의 일원으로 일본 농업을 학습, 고찰할 수 있는 기회까지 갖게 되었다. 1945년 해방 후에도 어곡전은 정부의 특별한 지원을 받았고, 하천평벌의 입쌀은 장춘, 북경, 중남해에까지 공급되었다. 그러나 어곡전의 주인 최학출은 해방 후 많은 고생을 하다가 1980년 3월 6일 63세로 세상을 떠났다.
연변의 어디를 가더라도 자기 고장의 입쌀 자랑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용정뿐만 아니다. 왕청과, 화룡, 그리고 연변에서 가장 넓은 들녘을 자랑하고 있는 훈춘에서도 자신의 입쌀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하다. 화룡시 동성진에서는 유기 입쌀 문화 축제까지 열고 있다. 실제 어느 지역을 가나 식당에서 나오는 쌀밥은 모두 맛있다. 특히 길림성 성도인 장춘의 위만 황궁 박물원에서 전시하고 판매하고 있는 어곡전의 어곡미는 연변의 대표 브랜드 입쌀로 손색이 없을 것이다.
장춘위만 황궁 박물원과 용정시 어곡전 관광제품개발 유한 회사의 상호 협력과 공동 발전의 원칙에 따라 설립한 위만 황궁 박물원 어곡전 전시관에는 여러 가지 규격으로 정교하게 포장한 어곡미와 어곡전에 관한 역사 자료, 도편이 전시되어 있다. 그밖에 만주국 황제 부의가 어곡미를 생산한 최학출에게 하사했던 벽시계와 상금 및 당시 어곡미를 고르던 처녀들이 일할 때 입었던 복장 등이 전시되어 관광객의 눈길을 끌고 있다.
개산둔 어곡전이 다시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하천평벌의 입쌀이 어곡미 브랜드로 개산둔과 용정을 넘어 연변을 알리는 명품이 된 배경에는 개산둔의 향토사가 심정호의 고향 사랑과 또 이를 뒷받침한 용정의 중의(中醫) 오정묵 원장의 민족 사랑이 있었다.
어곡전 마을 바로 이웃에 살고 있는 심정호는 개산둔 토박이로 그의 고향 사랑은 극진하다. 특히 심정호가 어곡전비를 두 번 세운 이야기는 그야말로 감동적이다. 심정호는 오래전부터 개산둔의 역사에 큰 관심을 가져왔는데, 강덕 황제의 수라상에 올랐다는 어곡미에 대한 자료 수집에 나서 1995년 초에 「강덕 황제의 어곡전」이라는 제목으로 『연변 일보』에 발표하여 어곡전을 다시 세상에 알렸다. 심정호는 기사 한 편에만 그칠 것이 아니라 기념비까지 세워야 의의가 더 클 것이라 생각하였다. 기념비라면 자연석이나 화강암을 깎아 세워야 무게도 있고 멋도 있겠지만 그에겐 그만한 비용을 충당할 돈이 없었다. 그래서 심정호는 개산둔 폐품 수집소에서 너비 1m, 길이 1.5m의 두꺼운 철판과 3m의 삼각철 두 대를 사다가 마을 대장간 일꾼에게 50위안을 주고 용접하고, 상점에서 하얀 페인트와 빨간 페인트를 사서 친구에게 비문을 써줄 것을 부탁했다. 심정호는 동생과 함께 트랙터에 기념비를 싣고 가서 어곡전 기념비를 세웠다. 이어 심정호는 제막식에 연변의 보도 매체와 개산둔진 정부 지도자, 인근 촌의 지도자들과 촌민 등 관련 인사들을 초청하였다.
마침내 어곡전 기념비 제막 의식이 시작되었다. 몇몇 사람들은 이런 기념비를 세워놓고는 무슨 제막 의식이냐며 돌아가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끝까지 자리를 지키면서 심정호가 기념비를 세우게 된 동기와 어곡전에 대한 역사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심정호는 자리를 지킨 사람들에게 감사 인사를 표하고 집으로 초대했다. 당시에 『연변 일보』이철억 기자가 의미 있는 축하 인사를 건넸다. “오늘 심정호 선생을 비롯한 많은 분들의 노력으로 천평벌에 어곡전 기념비가 섰습니다. 비록 보기에는 보잘 것 없는 같지만 이 기념비가 앞으로 개산둔진을 홍보하는 데 아주 큰 역할을 하리라 믿어 의심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모인 여러분들이 합심이 되어 이 일을 도와 나신다면 꼭 어곡전은 희망이 있을 것입니다.”
어곡전 기념비 제막 의식 내용은 『연변 일보』에 소개되었다. 심정호는 어곡전이라는 명품을 통해 사람들이 고향을 사랑하게 하고, 후대들이 민족의 역사를 알게 하고, 어곡미로 농민들의 수입을 제고하기 위하여 개산둔진에 녹색 문화 애심회를 설립하여서 어곡전과 어곡미를 크게 홍보하였다. 바로 이때 용정시 노간부 요양원의 오정묵 원장이 어곡전 기념비를 세우도록 비준한다는 주 문화국 발급 문건을 가져다주면서, 재정 문제는 걱정하지 말고 어곡전 기념비를 다시 세울 것을 심정호에게 부탁하였다.
2006년 9월 22일 높이 3m, 무게 8톤의 자연석에 조선족 출신 정순주 장군의 글씨체를 돌에 새긴 두 번째 어곡전 기념비 제막 의식이 거행되었다. 그날 제막식에는 연변조선족자치주 내의 지도자들이 참석하였고 개산둔진 내의 각 촌 간부와 촌민, 그리고 한국에서 온 관광객들까지 모두 천여 명 되는 사람들이 참석하였다. 이렇게 철판으로 만들어 세워진 어곡전 기념비는 자연석 기념비로 훌륭하게 탈바꿈되어 세워졌고 제막식도 두 번이나 진행되어 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2007년 8월 27일[음력 7월 15일] 오정묵 원장의 지원으로 새롭게 만들어진 어곡전 마을 농촌 광장은 축제의 기쁨으로 넘쳐났다. 심정호의 고향 사랑과 오정묵 원장의 민족 사랑,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곡전 마을의 광소촌김용수 촌 서기의 헌신적인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것이다. 2007년 초부터 개산둔진 정부는 두 차례에 걸쳐 민속, 문화, 관광 등 각 분야의 학자, 전문가를 초청하여 어곡전 민속촌 건설 세미나를 가져 어곡전 민속촌 건설 전망 계획을 추진했는데, 마침내 음력 7월 15일 백중절(百中節)에 어곡전 민속 대축제 ― 농부락(農夫樂) 농부절 행사를 개최한 것이다.
다음은 『길림 신문』 2007년 9월 4일자 「어곡전 마을의 농부락」 기사 내용의 일부이다. “광소촌에서는 이번 어곡전 민속 축제를 준비하면서 올해부터 7월 백중을 광소촌의 명절ㅡ농부절로 정했다고 한다. 이날 이 촌에서는 예를 갖추어 백중제[마을의 안녕과 농사 풍작을 기원하는]를 올렸고, 제1회 어곡전 장원을 선발하여 5천 위안을 시상하였다. 장원 농부를 꽃가마에 태우고 농악단까지 따르는 ‘농자 천하지대본’이란 연전을 든 60~70명의 대행렬이 어곡전 광장을 들썽케 한 장관을 이루었다. 광소촌김용수 촌장은 어곡전 협회 회원 농민을 비롯해 광소촌에서는 어느 때보다 농사 열의가 높아가고 있으며 어곡미 생산에 농민들의 관심이 크다고 한다. 어곡전 개발로 입쌀의 브랜드화가 실현되고 관광 농업까지 겸할 수 있어서 농민들은 어느 때보다도 기뻐한다고 한다.”
개산둔 어곡전 마을의 농부절 행사는 2008년 길림성 무형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어곡전 마을의 브랜드화에 한 몫을 단단히 하고 있다. 비록 농부절 행사일이 아니더라도 용정과 연변 일대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연변의 대표 브랜드 입쌀 어곡미의 고장 어곡전 마을을 찾지 않을 수 없게 만든 것이다. 한민족의 전통 명절인 백중절을 회복하고 이를 두만강변의 기름진 땅 천평벌의 역사 문화 자원으로 살려 ‘농부절’이라는 새 명절로 만든 조선족 사회의 노력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