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 高儉地 山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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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문 | 高俭地山城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요령성 본계시 환인만족자치현 목우자진 고검지촌 |
시대 | 고대/삼국 시대/고구려 |
성격 | 성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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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 | 포곡식 |
크기 | 성벽 길이 동벽 332m, 남벽 383m, 서벽 267m, 북벽 391m, 둘레 1,373m |
조성|건립 시기/일시 | 3세기경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80년 4월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90년 4월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94년 5월 |
훼손 시기/일시 | 1970년대 초반 |
문물 지정 일시 | 1961년 |
문물 지정 일시 | 1986년 7월 30일 |
문물 지정 일시 | 2002년 |
현 소재지 | 요령성 본계시 환인만족자치현 목우자진 고검지촌 뒷산 |
원소재지 | 요령성 본계시 환인만족자치현 목우자진 고검지촌 뒷산 |
요령성(遼寧省) 본계시(本溪市) 환인만족자치현(桓仁滿族自治縣) 목우자진(木盂子鎭) 고검지촌(高儉地村)에 있는 고구려 시대의 산성.
고검지 산성은 여러 산봉우리로 첩첩이 둘러싸인 해발 831m의 산 위에 위치해 있는데, 남쪽으로는 사방 1㎞ 정도의 넓은 개활지가 펼쳐져 있다. 동·서·북 3면은 산봉우리로 둘러싸여 말발굽형 분지를 이루고 있다. 잘 다듬은 쐐기형 돌로 산마루를 따라 성벽을 축조하였는데, 일부 구간은 절벽을 천연 성벽으로 삼았다.
성벽의 길이는 동벽 332m, 남벽 383m, 서벽 267m, 북벽 391m로 전체 둘레 1,373m이며, 불규칙한 장방형 모양을 이룬다. 성벽은 보존 상태가 양호한 편인데, 북벽 동단의 경우 밑 너비 4.4m, 윗너비 3.3m, 외벽 높이 3.9m, 내벽 높이 2.1m에 이른다. 성벽 위에는 성가퀴가 잘 남아 있는데, 너비 0.5~1.0m, 높이 0.4~0.7m 전후이다. 서벽 북단의 성가퀴 안쪽에는 기둥 구멍 9개가 1.8~2m 간격으로 남아 있다.
성문은 남벽 1, 북벽 2, 동벽 1 등 4개가 확인되었는데, 많이 허물어졌다. 북문의 동측과 동문의 북측에 방형(方形)의 적대(敵臺)가 남아 있는데, 역시 많이 허물어졌다. 남벽 동단을 비롯한 산봉우리에 장대(將臺)나 망대가 남아 있고, 북벽 부근에는 병사 주둔지로 추정되는 원형 구덩이가 다수 남아 있다. 서남쪽에 물웅덩이가 있고, 중앙으로 개울이 흐르고 있다. 다수의 토기편과 쇠 화살촉, 쇠창 등이 채집되었다.
고검지 산성은 요하 지류인 태자하나 소자하 유역에서 고구려 초기 중심지로 향하는 교통로상의 요충지에 자리 잡고 있다. 정문이 산의 중턱에 위치한 산정형 포곡식 산성인데, 성곽의 입지 조건이나 축성 방식 등으로 보아 3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축조한 고구려 산성으로 파악된다. 이에 고검지 산성을 고구려목저성(木底城)이나 창암성(蒼巖城)으로 비정하기도 하지만, 명확한 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고구려가 3세기경부터 도성을 중심의 군사 방어 체계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축조한 성곽으로 파악되며, 평양 천도 이후에도 국내성 방면의 군사 방어 체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을 것으로 파악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