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S (독립국가연합)
특별한 이야기

고려인의 풀뿌리 문화 예술, 고려인 소인예술단

원어 항목명 Коллектив художественной самостоятельности
영문 Soviet-Korean Amateur Art Groups, Soin Yesuldan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CIS  
시대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상세정보
원어 항목명 Коллектив художественной самостоятельности
정의

CIS 각지에서 활동하며 한민족 문화 예술의 대중적 전파와 전승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고려인 아마추어 문화 예술 단체.

개설

소인예술단은 연령별, 직업별, 계층별, 성별로 또는 이와 관계없이 조직되었으며, 활동 분야도 노래, 춤, 연극, 연주 등에 따라 단일한 분야에 한정하기도 하고 둘 이상의 여러 종목들을 종합하기도 하였다. 또한 콜호즈, 솝호즈, 공장, 사무소 등 생산현장에 따라, 또는 도시, 농촌, 어촌 등의 지역적 차이에 따라 다양한 형태를 보여 준다. 고려인 소인예술단은 노래·춤·연극 등 한민족 문화 예술의 대중적 전파·전승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소인예술단은 1920년대 구 소련 원동 ‘신한촌’에서 시작된 비전문 예술 집단이었지만 1932년 한민족 최초의 전문 예술 극장 ‘고려극장’을 태동시킨 중요한 문화 예술 단체이기도 하다.

소인예술단의 의미

소인예술단은 아마추어 예술단으로, 사회주의 국가에서 문화·예술 활동은 정치·사회적인인 체제 안에서 적극적으로 장려되었으며 문맹의 퇴치는 물론 소수 민족들의 정체성과 문화 유지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었다. 소인예술단은 노래와 춤 그리고 연극 등 문화 예술의 대중적 전파, 전승 과정을 파악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소인예술단은 해외 한민족 문화 예술 집단 중에 가장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문화 예술 단체인 ‘고려극장’의 전신이기도 하다. 아마추어 예술 집단인 소인예술단과 전문 예술 집단인 고려극장은 단순히 공연 예술 집단의 의미를 넘어 한민족의 문화유산을 전승하고 한글을 보전하고 유지 발전시키는 데 커다란 공헌을 하였고, 고려인들의 정신적인 어머니 역할을 한 문화 예술 집단이다. 소인예술단은 여러 민족들이 함께 활동한 경우가 많아서 민족 문화 교류의 장이 되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소인예술단의 노래, 춤, 연극 등 다양한 분야들에 대한 분석을 통해, 한편으로는 민족 문화의 보존과 확산과정을, 다른 한편으로는 다양한 민족 문화들의 상호 영향 관계를 함께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예술 단체이다.

소인예술단의 형성 배경

1918년 시작된 시베리아 내전은 1922년 10월 러시아 원동 지역에서 일본군의 철수로 종결되었다. 이후 러시아 원동 지역은 급속한 소비에트화 과정을 겪었다. 러시아는 혁명과 내전이 남긴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침체를 수습하는 데 수년간의 세월이 필요했으며 1920년대 말 이후 본격적인 사회주의화가 시작되었다. 이른바 ‘위로부터의 사회주의 건설’에 따라 ‘반우파 투쟁(反右派鬪爭)’과 전면적인 집단화가 진행되었다. 반우파 투쟁으로 당의 청결과 반토호 투쟁(反土豪鬪爭)이 격렬하게 진행되었으며 이른바 ‘불순 당원’들이 출당되고 토호[부농, kulak]들이 처벌, 혹은 추방되었다. 1930년초 고려인들이 다수 거주하고 있던 블라디보스토크현의 수찬구와 포시예트구에서 고려인 농가 90%가 집단화될 정도로 급속한 집단화가 진행되어 고려인 농촌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갖게 되었다. 1933년에 이르러 고려인 농촌 사회의 집단화는 거의 완성되었다.

러시아 원동 지역 한인 사회의 가장 큰 변화 가운데 하나는 사회주의 건설을 담당할 교육 문화 기관이 양적으로 크게 확대되었다는 사실이다. 특히 1920년대 말과 1930년대 초의 이른바 ‘위로부터의 사회주의 건설 과정’에서 1917년까지 4년제 초등학교가 15개에 불과했던 것이 강제 이주 직전인 1937년 8월에는 초등학교 300여 개, 초급중학교 60여 개, 중등학교 및 전문학교 20여 개, 기타 모범종람소 등의 군중 문화 기관 150여 개로 급증하였음을 보여준다. 출판물 역시 1,000여 종에 달하게 된다.

소인예술단과 고려극장의 관련성

리길수의 회상에 따르면, 블라디보스토크의 국립극장이나 원동공장 문화회관에서 매년 3·1절 기념행사가 열린 후에 소인 연극이 상연되었다. 또한 신한촌의 스탈린구락부에서 연극이 자주 상연되었는데, 레완트 연초공장의 노동자들로 구성된 소인연극단[정후겸, 전윅토르, 김익수, 리 나제즈다, 최봉도 등], 9년제학교의 교원들과 학생들로 구성된 연예부[연성용, 최길춘, 김해운, 한영혜, 채경신, 리길수]가 출연하였다. 1928년 봄 신한촌구락부에서 개최 블라디보스토크 조선소인예술단 연극경연대회에는 당시 주요한 한인 소인연극단이었던 스탈린구락부, 9년제학교, 당학교, 노동학원의 연예부 등이 참가하였다. 이 경연대회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조선 사람들의 연극 운동이 활발해지며 소인 배우들의 연기 수준이 높아져 직업적인 면모를 띠기 시작했음을 보여 준 계기가 되었다.

고려극장의 극작가·연출가로 활동하고 희곡 『홍범도』를 쓴 태장춘은 1926년 이후 신한촌 노동자들의 소인예술단인 ‘노동자구락부’, ‘노동청년구락부’에 참여했던 소인 배우 출신으로 1931년에 ‘조선노동청년극장’에서 공연한 「황무지」에서 배우로 출연하였다. 그러나 조선노동청년극장이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해산이 되자 태장춘은 원동어업직업동맹이 조직한 ‘문화부리가다’에서 계속 활동하였다. 김진, 리함덕에 이어 카자흐스탄의 인민 배우가 된 리장송은 어린 시절부터 노동을 하면서 피오네르 소인예술단 사업에 참여하다가 고려극장에 극장 미술가 조수로 들어와 직업적 배우가 된 경우이다.

소인예술단의 예술 활동

1) 1940년대

1940년대의 상황은 1950년대에 들어가서도 크게 변하지 않지만 소인예술단은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양상을 보인다. 1940년대와 비교하여 소인예술단은 연령별, 직업별, 분야별로 다양화·전문화되었으며 지역적으로도 다변화되어 여러 고려인 콜호즈에서 소인예술단들이 조직되었다. 고려인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하고 있던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주에서 대학 내 소인예술단으로서는 카자흐스탄공화국 카라간다주에 있는 사범학교의 소인예술단이 대표적이다. 사범학교의 소인예술단은 1951년 레닌그라드국립종합대학 출신의 러시아어문 교수 케프 윅토르 예브게니예위츠가 부임하여 조직하였는데 합창단, 성악단, 무용단 등 여러 분야를 망라하여 소인 예술의 종합적 형식을 구비하였다.

2) 1950년대

카자흐스탄의 경우 1950년대 중반에 이르러 노동자, 사무원들로 구성된 소인예술단이 비약적인 발전을 보이게 된다. 이것은 소련공산당 제21차대회[1958년]에서 제시된 소인 예술을 포함한 예술 사업에 대한 당의 정책에 힘입어 소인예술단의 역할이 커졌기 때문이다. 1955년 당시 카자흐스탄에는 공업 기업소, 운수 기업소, 건축소, 콜호즈, 엠테스 등에서 창가·무용·연예 등 분야에 약 8,000여 개의 노동자, 사무원 소인예술단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이 가운데 약 3,000여 개의 소인예술단이 1955년 알마티에서 개최된 예술 경연에 참가하기 위한 준비 기간에 조직되었다.

우즈베키스탄의 경우에는 1950년대에 타슈켄트주에만 30여 개의 고려인 인민창작협주단이 있었다. 1954년에 ‘폴리토트델 가무단’이 조직되었다. 타슈켄트주 중치르치크 구역의 ‘북극성’ 콜호즈에는 소인 예술 드라마가 이미 1940년대에 조직되어 조선 극작가들의 희곡과 현대 조선 인민의 생활과 풍습을 반영한 지방 작가들의 희곡을 여러 차례 상연하였다. 크질오르다주 소인예술단 활동에서 주목되는 것은 연극 크루소크에 기초하여 인민극장이 조직되기 시작한 점인데, 크질오르다 사범대학 내에 인민극장이 처음으로 조직되었다.

3) 1960년대

1960년대에 들어오면서 고려인들만으로 구성된 소인예술단들은 활발한 활동을 전개한다. 이는 스탈린 사후 1950년대 후반에 시작된 흐루쇼프의 부분적인 자유화 조치와 민족 문화에 대한 관대한 정책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카자흐스탄의 경우 1937년 강제 이주 당시의 첫 정착지인 우슈토베에서 고려인 노인들로 구성된 조선노인가무단이 등장한다. 이 노인가무단은 우슈토베 문화회관 소인 예술단 내에 조직되었다. 70세의 최재진 노인이 지도하였으며 40세부터 70세까지의 노인 25명의 단원들로 구성되었다. 우즈베키스탄 폴리토트델 콜호즈에는 1968년 9월 에스트라다 악단이 조직되었다. 1960년대 말 우즈베키스탄에서 유명했던 고려인콜호즈는 타슈켄트주폴리토트델, 북극성, 프라우다, 스베르들로프, 지미트로프 등이었는데, 이들 콜호즈의 문화궁전, 문화회관, 구락부가 문화 사업의 무대로 활용되었다. 이들 가운데 북극성 콜호즈 인민극장, 폴리토트델 협주단, 지미트로프 콜호즈 소인예술단이 유명하였다.

4) 1970년대

1970년대에 명성을 날렸던 대표적인 소인예술단은 폴리토트델 콜호즈에 속했던 청춘 가무단이다. 폴리토트델 콜호즈에는 1954년부터 소인예술단 사업이 적극적으로 시작되었는데, 1970년대 초부터 폴리토트델의 소인예술단은 ‘청춘’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다. 1974년에 ‘인민 집단’ 칭호를 수여받았으며, 1976년에는 우즈베키스탄 공화국 레닌공청동맹상을, 1978년에는 전국소인예술단 경연에서 제1급 상장과 금메달을 수여받았다. 또한 1972~1973년에 열린 전국청년축전, ‘우리는 애국자-국제주의자’에서 계관 집단의 칭호를 받았으며 전국텔레비전 「청춘의 목소리」에서 표창을 받는 등 수상 경력이 화려하다. 청춘 가무단은 1977년 당시 악사 9명, 가수 4명, 무용가 7명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평균 연령이 22세였다. 카자흐스탄의 경우 청춘 가무단에 못지않은 명성을 누리게 되는 탈디코르간시의 ‘아침노을’ 가무단이 있었다.

1970년대에 특별히 거론해야 할 것은 전문적 직업 예술인들이 소인예술단 사업을 도움을 주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카자흐스탄 알마티 발하스 구역 ‘바흐바흐친스키’[박박티] 벼 재배 솝호즈는 일꾼들 대다수가 고려인들인데 이전까지는 문화 사업이 낙후되어 있었으나, 1970년 말 솝호즈의 남녀 청년들로 소인예술단이 조직되었다. 그리하여 이 소인예술단은 알마티의 국립고려극장에 협조를 요청하여, 인민배우 리함덕, 공훈예술가 연성용, 음악가 조트로핌이 한 달 동안 머물면서 소인예술단을 지도하였다.

이 시기 소인예술단의 특징은 아마추어 예술단에 만족하지 않고 전문화된 예술단으로 발전하여 갔다는 점이다. 경제적으로 부강했던 북극성 콜호즈에서는 ‘가야금’ 가무단이 국립필하모니가 되어 전문 집단으로 성장하였으며 작곡가 박영진의 지도하에 음악 대학 출신들을 영입하여 관현악단 반주를 할 수 있도록 하였다. 1970년대는 소인예술단의 전성기이며 에스트라다[경음악단]의 활동이 왕성했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5) 1980년대와 1990년대

카자흐스탄 탈디코르간주 우스토빈스키 솝호스의 소인예술단은 1971년부터 연극을 무대에 올리기 시작하였는데, 10년만인 1981년에 ‘인민 집단’이란 ‘영예로운 칭호’를 부여받는다. 연극 작품으로는 초연한 한진 작 「의붓어머니」를 비롯하여 채영 작 「자식들」, 맹동욱 작 「막동의 출세」, 김이시프의 「사위 고르는 어머니」 등이 있다. 우스토빈스키 솝호즈 문화궁전에는 합창단과 35명으로 이루어진 가무단이 활동하였다.

1985년 당시 카자흐스탄의 탈디코르간 구역에는 2,000여 명, 25개의 소인예술단이 활동하고 있었는데 이는 소인예술단 가정협주단이 증가한 덕분이었다. 이 전문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공화국의 라디오를 통해서 올리는 노래를 창작하였다.

우즈베키스탄의 경우 1980년대에 활발한 활동을 한 소인예술단은 타슈켄트주의 지미트로프 콜호즈와 폴리토트델 콜호즈이다. 1950년대에는 타슈켄트주에만 30여 개의 인민창작협주단이 있었는데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오직 지미트로프 콜호즈에만 협주단이 남아 활동했고, 단원들도 모두 여성 노인들로 평균 연령이 72세였다. 1984년에 ‘진주’ 아동무용단이 조직되었는데 1988년 ‘인민 무용단’의 칭호를 수여받았다. 1970년대의 대표적인 인민집단 소인예술단이었던 ‘청춘’ 가무단은 1984년 최초의 직업적 ’조선가무단‘인 우즈베키스탄 국립필하모니 소속의 ‘가야금’ 가무단에 통합되었다. 새로운 이름은 ‘청춘’ 가무단으로 하였다.

1990년대에 들어와 소인예술단은 폭발적인 성장을 하게 되는데 1990년 3월 18일에 카자흐스탄 알마티 고려극장에서 개최된 카자흐스탄 고려인 소인예술단 경연대회는 이를 잘 보여 주었다. 그것은 페레이스트로이카 이후 “정치, 경제, 문화 각 분야에서의 민주화와 개혁이 진척되어가고 민족 정책이 올바르게 실시”된 결과였다. 그리하여 카자흐스탄 내에서 고려인들이 비교적 집중되어 살고 있던 지역에서 문화중앙, 협회들이 조직되어 민족어와 민족문화를 재생하기 위한 사업을 활발히 전개할 수 있었다. 1980년대 소인예술단들을 보면, 알마티시 소인예술단원, 알마티 에스트라다 전문학교, 고려인무용단 ‘양산도’, 알마티주 바흐바흐친스키 솝호즈 소인예술단, 탈디코르간주 소인예술단 ‘아침노을’, 탈디코르간주 우스토빈스키 솝호즈 소인예술단 ‘도라지’, 잠불주 조선인문화중앙 소인예술단 ‘연꽃’, 카라간다주 조선인문화중앙 소인예술단 ‘희망’, 크질오르다주와 침켄트주, 첼리노그라드주 조선인문화중앙및 협회들의 소인예술단들이 있다.

6) 1990년 개방 개혁 시기 이후

1990년 개방 개혁 시기[페레스트로이카] 이후에 독립국가연합에 남한의 음악이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전 시립대학교 한명희 교수는 국악공연과 워크숍을 열기 시작하였다. 국악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했으며, 2000년 이후에는 사물놀이 팀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2006년 8월 6일 카자흐스탄 알마티 고려극장에서 “아리랑을 찾아서” 음악회가 열렸으며, 이때에 정추 교수가 채록한 『소비에트 고려인의 노래』[한양대학교 출판부, 김보희, 정민 정리] 출판 기념 음악회를 열었다. 이 음악회에서 과거 고려극장 가수들이 부르던 아리랑과 가요를 불렀다. 이 음악회에 참석한 가수는 김조야, 문공자, 김블라지미르, 송게오르기, 리코마와 아리랑가무단을 이끌었던 이림마의 무용단 ‘비둘기’가 출연하였고, 2006년 KBS TV에서 아리랑을 중심으로 이 음악회의 일부분이 방영되었다.

2011년6월 17일에는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에서는 박영진 100주년 추모 국제 교류 공연을 가졌다. 작곡가 박영진은 고려인 최초의 서양 음악 작곡가이며 우즈베키스탄 공훈 작곡가이다. 이 음악회에서 박영진 작곡 「봄노래」는 폴리토트델 콜호즈에서 모여서 연습하는 소인예술단으로 고가이 알렉이 이끄는 남성 4중창단에 의해 연주되었다. 현재 타슈켄트에는 약 30여 개의 소인예술단 합창단이 활동하고 있으며, 안지산, 페르가나, 우르겐츠, 사마르칸트 등 각 지역의 노인회를 중심으로 합창단이 조직되기도 하였다. 오늘날에도 고려인은 소인예술단을 활동을 통해 취미와 여가 생활을 하고 있다.

맺는 글

소인예술단을 역사적으로 보면 1937년 중앙아시아로 이주해 온 이후부터 1950년대 말까지 고려인 소인예술단의 공연 종목에는 민족 문화적 요소를 결핍하고 있었다. 이것은 강제 이주와 스탈린에 의한 고려인 인텔리들에 대한 탄압과 한글 등 민족 문화에 대한 억압 정책에 따른 당연한 결과였다. 1960년대 이후 많은 고려인 소인예술단들이 성장한 고려인 콜호즈들의 경제적·정치적 지원 덕분으로 ‘인민 집단’ 칭호를 받게 될 정도로 수준이 향상되었고, 그 공연 종목에도 민족 문화적 요소가 더욱 보강되었다. 1980년대 중반 소련 사회 전반의 생산력 감퇴를 반영하여 고려인 콜호즈들 역시 경제적 어려움에 처하게 되고, 이는 곧바로 고려인 예술단들의 활동 부진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1980년대 후반 페레이스트로이카로 대변되는 개방·개혁 정책과 관용적인 민족 정책에 따라 소인예술단들이 다시 활기를 되찾기 시작한다. 이와 아울러 남한과 북한에서 각각 파견된 예술인들의 공연과 교육 지도 역시 고려인 소인예술단들의 기량을 향상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975년에는 소련의 당 제1서기인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가 방문해 ‘청춘’ 가무단 공연을 관람하였으며, 폴리토트델 콜호즈는 ‘성공한 콜호즈의 생활을 전시하는 곳’으로 공산주의 체제에서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선전되었다. 1975년 7월에 큰 명성을 떨친 소인예술단으로 거의 전문가 수준에 도달해 있었는데, 고려인 소인예술단은 타민족 간 민족 예술의 경쟁으로 생각해 소인예술단의 전문화에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고려인들은 고려극장의 순회공연에서 수준 높은 음악과 연극을 감상하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아마추어 집단에 너무 큰 기대를 건 것이 실패의 원인이 될 수도 있었다. 전문가들의 지도로 아마추어들을 전문가적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전문가들을 콜호즈원으로 영입해 공연을 맡기게 되면서 소인예술단의 자발적인 활동이 오히려 위축된 것이다. 전문가들의 음악을 선호하는 수동적인 자세로 관중들의 심리가 변한 것도 아마추어 예술 집단이 쇠퇴하는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페레스트로이카[개혁 개방 정책] 이후 소인예술단은 존폐 위기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이는 소인예술단이 자본주의의 영향으로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향 전환을 맞이할 수 있는 계기로 작용하리고 전망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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