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땅배기

원어 항목명 Кын тан беги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언어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러시아 사할린주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원어 항목명 Кын тан беги
정의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사할린 한인에 대한 정치 이념 교육을 위해 러시아 사할린주로 이주한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을 지칭하는 용어.

개설

사할린 한인은 ‘지역 토착 한인’, ‘한국인’, ‘큰땅배기’, ‘북한인’의 4그룹으로 나누어진다. 큰땅배기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소비에트연방 정부와 사할린 한인의 상호 작용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사할린 한인의 분류

사할린 한인은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지역 토착 한인’, 대한민국 출신의 ‘한국인’, 중앙아시아 출신의 ‘큰땅배기’, 1946년~1949년 북한에서 일자리를 찾아 사할린에 온 ‘북한인’의 4그룹으로 나누어진다. 최근 10년 동안 ‘한국인’과 ‘큰땅배기’는 지역 토착 한인에 융합되는 경향을 보였으며, 사할린 한인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기도 했다.

큰땅배기의 형성 과정

1945년 이후 사할린 소비에트 행정부는 러시아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많은 수의 한인과 상호 의사소통을 해야만 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고려인들이 다시 사할린으로 오게 되었고, 이들은 큰땅배기라고 불렸다.

중앙아시아 고려인의 사할린 행은 당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수행되었다. 1947년 12월 25일 전 연방공산당 볼셰비키의 출장 차 33명의 고려인 공산주의자가 사할린주에 왔으며, 이후 추가로 30명이 더 왔다. 1948년에는 전연방공산당 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출장 차 우즈베키스탄에서 40명의 고려인이, 카자흐스탄에서 28명의 고려인이 사할린주로 왔다. 1946년부터 1952년까지 사할린 한인의 정치 이념 교육과 학교 교육을 위해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에서 거의 2,000명의 고려인이 사할린주로 왔다. 이후 큰땅배기의 일부는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으로 돌아갔으며, 일부는 사할린에 영구 체류했다.

큰땅배기와 사할린 한인의 갈등

큰땅배기들은 공산주의자였고 어업 공장, 광산, 신문 편집부, 한인 학교에서 지도적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큰땅배기의 주요한 임무는 사할린 한인들에게 소비에트 이데올로기를 교육하고 더 좋은 삶의 조건을 창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큰땅배기는 사할린 토착 한인의 풍습, 언어, 다른 특성들을 잘 몰랐다. 따라서 교육 과정에서 큰땅배기와 사할린 한인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기도 했다.

참고문헌
  • Дин Юлия Ивановна, 『Корейская диаспора Сахалина: проблема репатриации и интеграция в советское и российское общество』(Южно-Сахалинск: Сахалинская областная типография, 2015)
  • Пак Хен Чжу, 『Репортаж с Сахалина』(Перевод с японского, Южно-Сахалинск, 2004)
이전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