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 韓人新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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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문화·교육/언론·출판 |
유형 | 문헌/연속 간행물 |
지역 | 러시아 연해주지방 블라디보스토크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창간 시기/일시 | 1917년 7월 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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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신문 |
관련 인물 | 한용헌[발행인 겸 편집인]|김치보[고본단 단장]|이형욱[부단장]|김철훈[고본단 서기]|윤능효[재무]|채성하[회계 검사원]|강양오[회계 검사원]|김병흡[사장]|김하구[총무]|주용운[인쇄] |
발행인 | 안드레이 한[아크 한, 韓容憲] |
1917년 전로한족중앙총회가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간행한 신문.
1917년 5월 21일부터 31일까지 11일 동안 한인 대표 1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러시아 연해주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 모여 ‘전로한족회 대표자회의’를 개최했다. 전로한족회 대표자회의에서는 러시아 연해주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 본부를 둔 전로한족중앙총회[고려국민회]를 조직하기로 결정하였다. 1917년 6월 4일 러시아 연해주 니콜스크우스리스크에서 각지 대표 96명이 참가한 가운데 전로한족대표자회[한족대회, 대회장 최만학]가 개최되었다. 원호인[러시아 국적자 이주 한인]이 중심이 되어 러시아 임시 정부의 지지를 결정하고 정기 간행물을 출판할 것 등을 결정하였다. 전로한족대표자회 결정에 따라 러시아 연해주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는 7월 5일부터 그리고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7월 8일부터 『청구신보』와 『한인신보』가 각각 창간되었다. 『한인신보』에는 러시아 귀화 여부를 불문하고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의 영향력 있는 한인들이 모두 참여를 했다. 특히 원호인들을 경계하면서 러시아령 한인의 자치와 권익 옹호와 항일 독립운동의 전면화를 원하고 러시아 임시 정부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참여를 하였다.
『한인신보』는 1면에 논설, 전보, 2면에 전보, 고국 통신, 잡보, 본항 시사, 중국 시사, 3면에 연재물, 광고, 4면에 광고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논설은 「자녀를 사랑하거든 교육을 시키라」[제10호], 「양심론」[제11호], 「생활난」[제13호], 「위생론」[제14호], 「우리는 사람의 길로 나가옵니다」[제15호], 「단군 대황조 聖誕紀元節(성탄기원절)」[제18호], 「미일 협약에 대하여」[제19호], 「찾는 힘」[제21호], 「각 곳에 年終總會(연종 총회)」[제23호], 「새해의 첫 아침을」[제25호], 「수양의 요령」[제26호] 등을 들 수 있다. 자녀의 교육, 양심, 생활, 위생 등 한인의 계몽과 관련된 내용과 단군과 관련하여 민족의식 고취에 대한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
『한인신보』는 러시아 시베리아 특히 연흑룡주, 간도 훈춘 지방, 상해 북경 지방, 미국 샌프란시스코, 하와이 등지에 1,400부를 배포하였다. 『한인신보』 중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창간호[1917년 7월 8일], 제11호[1917년 9월 30일], 제12호[1917년 10월 7일], 제13호[1917년 10월 14일], 제14호[1917년 10월 22일], 제15호[1917년 10월 28일], 제16호[날짜 미상], 제18호[1917년 11월 17일], 제19호[1917년 11월 25일], 제21호[1917년 12월 9일], 제23호[1917년 12월 23일], 제25호[1918년 1월 6일], 제26호[1918년 1월 13일] 등이다.
『한인신보』 발행에 중심이 된 인물들은 사회주의 단체 출현에 매개가 된 사람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