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인정교보』

한자 大韓人正敎報
분야 문화·교육/언론·출판
유형 문헌/연속 간행물
지역 러시아 자바이칼지방 치타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창간 시기/일시 1912년 1월
폐간|종간 시기/일시 1914년 6월 1일
제작|간행처 러시아 자바이칼주 치타시 아스트라한스카야 거리
관련 인물 이종호|이상설|최봉준|최재형|안창호|장택상|이강|정재관|이광수
창간인 이강
발행인 문윤함
판형 석판
총호수 11호
정의

1912년 1월 러시아 자바이칼주 치타시에서 간행된 대한인국민회 시베리아 지방 총회의 재러 한인 대상 기관지.

개설

『대한인정교보』는 러시아 정교회 치타 교구의 발행 허가를 받아 1912년 1월 러시아 자바이칼주 치타시에서 간행된 후 1914년 6월까지 총 11호가 발행되었다.

창간 경위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이강, 정재관 등은 월보의 간행을 통해 재러 한인들의 민족 의식 고양, 문명화를 추구하고 한인들이 러시아로 동화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하였다. 치타시 지역 한인들은 독립운동 단체를 결성하여 인재를 양성하고 재정을 마련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고자 『대한인정교보』의 발간을 추진하였다.

형태

창간인은 이강, 발행인은 문윤함이었고 석판 인쇄로 간행되었다. 이종호, 이상설, 최봉준, 최재형, 안창호, 장택상 등이 자문단으로 참여하였다.

제1호를 1912년 1월 2일, 제2호를 3월 1일[4월 1일?], 제3호를 5월 1일, 제4호를 6월 1일, 제5호를 8월 1일, 제6호를 9월 1일, 제7호를 12월 1일, 제8호를 1914년 2월 1일, 제9호를 3월 1일, 제10호를 5월 1일, 제11호를 6월 1일에 각각 발행하였다.

2호는 정확하게 언제 발간되었는지 알 수 없다. 2호는 2월 1일 혹은 3월 1일이나 4월 1일에 간행된 것일 수도 있다. 발행이 늦어진 것은 러시아 당국의 검열을 통과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구성/내용

『대한인정교보』의 내용은 제1호부터 제8호[1912. 1~1914. 2]까지와 제9호부터 제11호[1914. 3~1914. 6]까지의 두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번째 시기에는 대체로 논설, 교회 소식, 잡보, 광고, 본국 통신, 세계 소문, 교회 학술 등 러시아 정교와 관련된 내용을 항일 운동과 관련된 것보다 많이 싣고 있다. 이에 반하여 두 번째 시기에는 동정 교회, 교회 통신 등 교회 관련 기사 외에 우리의 주장, 새지식, 바른 소리, 우리 글, 우리 시 등의 난을 새롭게 마련하여 조선 민족의 주장을 반영하고 있다.

1912년 1월 2일에 러시아 치타의 아스트라한에서 발행된 창간호에는 정교 신앙의 확산을 표면적으로 표방하였지만, 재러 한인의 민족 의식 고양, 문명 계몽, 인재 양성, 독립운동 전개를 위한 재정 마련 등도 제시하였다. 특히 제2호부터는 일본의 학정을 강력히 비판하였다. 이에 따라 일본의 방해로 정기적인 발간이 어렵게 되었고, 12월에 제7호가 간행된 뒤에는 정간되기도 하였다. 1913년 말에 다시 간행하여 1914년 2월부터는 이광수(李光洙)[1892~1950]를 주필로 삼아 6월까지 제11호를 발행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러시아와 일본이 협력 관계를 맺으면서 러시아 영토 안에서 항일 운동이 탄압을 받게 되었다. 대한인국민회 시베리아 총회의 기관지였던 『대한인정교보』엔 항일과 관련된 기사가 주로 실렸다. 일제는 러시아 정부에 이를 항의하였다. 러시아 정부는 이강정재관 등 기관지 간행에 관여한 7명을 러시아 정교 신앙 강조, 재러 한인 계몽, 민족 의식 고취 등을 한다는 명분으로 체포하였고, 결국엔 폐간되었다.

변천과 현황

『대한인정교보』의 재정은 기부금, 잡지 대금, 광고료 등으로 충당되었다. 배포 지역은 러시아 여러 곳뿐만 아니라 만주, 일본, 미국 하와이, 멕시코에 이르렀다.

의의와 평가

초보적인 사회주의 사상을 피력하고 있으나 다른 재러 한인이 발간했던 신문과 달리 진보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참고문헌
  • 『권업신문·대한인정교보·청구신보·한인신보』(한림대학교 출판부, 1996)
  • 박환, 『러시아 지역 한인 언론과 민족 운동』(경인문화사, 2008)
  • 계봉우, 「아령실기」(『독립신문』, 1920. 2. 20~1920. 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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