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업신문』

한자 勸業新聞
분야 문화·교육/언론·출판
유형 문헌/연속 간행물
지역 러시아 연해주지방 블라디보스토크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창간 시기/일시 1912년 4월 22일[러시아력]
폐간|종간 시기/일시 1914년 8월 30일[러시아력]
성격 기관지
관련 인물 이종호|신채호|한형권|장도빈|박동원|이근용|이상설|최병숙|윤해|김하구|뽀랴노브스키|포드스타빈|듀꼬브|빤데레프
창간인 권업회
발행인 권업회
판형 타블로이드판
총호수 126호
정의

1912년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시에서 창간된 재러 한인 독립운동 단체인 권업회의 기관지.

개설

국권 회복과 민족주의를 목적으로 1912년 4월 22일부터 1914년 8월 30일까지 약 2년 반 동안 총 126호가 순한글로 간행되었다. 최초 간행 당시 신문사 총무에는 한형권, 부장겸 주필은 신채호, 부원에 박동원, 이근용 등을 임명하였다. 1912년 2월 포랴노브스키, 포드스타빈, 듀코프를 명예 회원으로 하였다. 신문 발행인을 듀코프로 하고 허가를 신청하여 1912년 4월 7일 러시아 당국의 인가를 받았다. 주 1회 1,400부씩 4면, 일요일 석간으로 간행되었다. 1913년에는 사장 겸 주필이 이상설로 바뀌었으며, 사장에는 최병숙, 총무는 윤해, 주필은 김하구가 담당했다. 장도빈은 주로 논설을 작성하였다. 『권업신문』은 재러 한인 사회의 권익 옹호와 계몽에 앞장섰다.

창간 경위

권업회는 1911년 6월 1일 발기한 이후 동년 7월 3일 청년 근업회와 통합되었다. 청년 근업회는 1911년 6월 18일부터 『대양보』를 발행하고 있었는데 권업회 발기회에서는 신문부원으로 이종호, 유진률 등을 임명하여 『대양보』권업회의 기관지로 활용하고자 했다. 1911년 7월 26일 대양보사를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으로 옮기고 『대양보』를 계속 발행하던 중 유진률이 사직하자 러시아인 포랴노브스키, 듀코프, 판데레프 등을 명예직으로 추천, 임명하고 신문의 간행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1911년 9월 17일 밤에 15,000자에 달하는 신문 활자를 도난당하여 『대양보』는 14호를 끝으로 휴간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종호에 의하여 권업회 발기회가 조직되었으며, 대양보사도 재정 문제로 권업회로 넘어갔다. 1911년 12월 19일 러시아의 인정 하에 블라디보스토크 한인 학교에서 권업회가 창립되자 권업회에서는 신문부를 만들었다. 1912년 4월 7일 『권업신문』 인가장을 러시아 당국으로부터 받았으며, 1912년 5월 5일[러시아력 4월 22일] 『권업신문』 제1호를 창간하였다.

형태

순한글로 등사한 타블로이드판 신문이다.

구성/내용

내용은 논설, 각국 통신, 전보, 본국통신, 잡보, 단평, 별보, 광고, 기서 등으로 구성되었다.

변천과 현황

최초 발행지는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하바롭스크 거리 10번지였으나 1912년 12월에 하바롭스크 거리 20번지로 이전하였다. 1914년 제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1918년 8월 30일 블라디보스토크에 계엄령이 발표되었으며, 일본의 요청으로 러시아 당국은 권업회 해산을 결정하고 『권업신문』의 간행을 금지시켰다. 이상설은 신문을 지키고자 노력했으나 역부족이었으며, 주필이었던 신채호는 상해로 떠났다.

의의와 평가

『권업신문』은 1910년대 초반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한 재러 한인의 유일한 신문이었으며, 한인의 권익 옹호 및 계몽과 항일 관련 기사 등 민족의식을 고취하는데 기여했다.

참고문헌
  • 박환, 『러시아 지역 한인 언론과 민족 운동』(경인문화사, 2008)
  • 박환, 『사진으로 보는 러시아지역 한인의 삶과 기억의 공간』(민속원,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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