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Корейский передвижной драматический теат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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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
유형 | 지명/시설 |
지역 | 러시아 사할린주 유즈노사할린스크시 |
시대 | 현대/현대 |
준공 시기/일시 | 194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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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개장 시기/일시 | 1949년 11월 |
증설|폐설 시기/일시 | 1959년 6월 |
최초 설립지 | 러시아 사할린주 유즈노사할린스크시 극장 거리 |
원어 항목명 | Корейский передвижной драматический театр |
성격 | 한인 극장 |
1948년 러시아 사할린주 유즈노사할린스크시에 설립한 음악과 연극을 순회공연하는 재러 한인 이동 극장.
1948년 사할린주 집행위원회 문화 분과에서 사할린주에 근거지를 두고 음악과 연극을 순회공연하는 재러 한인 이동 극장을 설립하기로 결정하였다.
1947년 사할린주립 필하모니 산하에 한인 음악 공연단과 연극 공연단이 설립되었다. 1948년 사할린주 집행위원회문화 분과에서 음악 공연단을 기반으로 한인 이동 극장을 설립하기로 결정하였다. 사할린 한인 이동극장은 1948년 러시아 소비에트연방 공화국 장관회의 산하 예술위원회의 8월 27일 자 명령 제832호에 따라 정식으로 국가 극장 체계에 포함되었다. 초기에는 장소를 확보하지 못해 창고를 전전하며 연습을 하였으나 1949년 11월 극장의 거리 79번지에 위치한 구 일본 극장 건물을 시청에서 받을 수 있었다.
설립 초기 사할린 한인 이동극장은 단원 구성에서부터 난관을 겪었다. 주로 북한에서 지원자를 받아 한인 배우단을 구성했는데, 대부분이 전문 배우가 아니라 배우 희망자였기 때문에 무용가 김춘수를 제외하면 전문 예술가가 거의 없었다. 사할린 한인 이동극장은 연극 소재의 부족, 전문 번역가의 부재로 곤란을 겪었다. 또한 엄격한 관료주의 명령 체계 속에서 독립적인 문화 기관을 만드는 일도 어려운 과제였다. 극장에 필요한 인부 8명을 채용하기 위해 전연방 소비에트 장관회의 산하 국가 상설위원회에 허락을 요청해야 하였다. 전연방 소비에트 장관회의 의장 보로실로프에게 직접 청원을 올린 기록도 남아 있다. 또한 지역 행정 기관의 지원이 충분하지 않았다. 극장 소품과 소도구를 확보하는 일도 어려웠다. 한국 전통 악기, 복장 등은 북한에서 가져오는 수밖에 없었다.
극장은 초대 단장 김기철과 1954년 학업을 마치고 귀향한 김 그리고리 페트로비치 등의 지도로 활발한 공연 활동을 펼쳐 나갔다. 첫 공연 「심청전과 춘향전」은 한인들뿐 아니라 다른 민족들에게도 매우 반응이 좋았다. 사할린 한인 이동극장은 1년에 300회 이상의 공연을 했다. 그 중 사할린 남부 도시 등 한인 밀집 거주 지역으로 찾아가 공연한 것이 200회 이상 되었다. 공연 표 값은 5루블에서 21루블로 비싸지 않은 편이어서 모든 계층의 국민에게 공연을 볼 기회를 제공했다.
사할린 한인 이동극장은 다른 극장들과 달리 벌목 현장이나 조업 현장 등 도시에서 떨어진 외딴 곳까지 순회공연을 다녔다. 1952년을 예로 살펴보면 어업 현장에서 200회 이상 공연했고, 사할린주 광산들에서 약 80회, 벌목 현장에서 25회를 공연했다.
1958년 사할린 한인 이동극장은 10주년을 기념하여 단원 전원이 중앙아시아 순회공연을 갔다. 스탈린 시대 강제 이주로 많은 수의 한인들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단원들의 자신감이 커지고 있던 때 극장이 갑자기 폐쇄되었다. 1959년 6월 23일 사할린주 집행위원회는 한인 극장이 설립 당시의 목적에서 멀어져 사실상 음악 공연 그룹만이 활동을 하고 있으며 공연은 대부분 러시아 주민들이 관람하고 있으며, 13명으로 구성된 연극 그룹은 관객의 감소로 적자를 보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극장의 폐쇄를 결정했다.
사할린주 집행위원회는 1959년 7월 1일부터 사할린 한인 이동극장을 사할린 한인가무단으로 재조직하여 사할린주 필하모니에 포함시켰다. 극장 폐쇄 이후 극단의 예술가들은 대부분 사할린을 떠났다. 김 그리고리 페트로비치는 우즈베키스탄으로 떠나 나망간 주립 나보이 극장의 총감독으로 활동했고 우즈베키스탄 국민 예술 활동가의 명예를 얻었다. 무용가 김춘수는 사할린에 남아 1960년대 말까지 학생들에게 한국 예술을 가르치는 일을 계속했다.
사할린 한인 이동극장은 살아남기 위해 처음부터 연극 그룹 13명과 음악 공연 그룹 14명으로 두 개로 나누어 운영했다. 이는 경제적인 면에서 상당히 합리적인 구성이었다. 연극 그룹의 활동은 거의 적자를 면치 못하는 수준이었으나 음악 공연으로 경제적인 부분을 충당할 수 있었다.
사할린 한인 이동극장은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한국 전통 연극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고 자신만의 고유한 색깔을 찾아 나갔다. 나아가 러시아 연극과의 접점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1951년 태장춘(Тхай Дян Чун)의 「38선 이남」, 채영의 「심청」, 「즐거운 인생」, 구삼룡의 「조국」, 1952년 무흐타로프의 「가족의 명예」, 1953년 김기철의 「홍길동」, 1954년 오스토로프스키의 「죄없는 죄인들」, 카타예프의 「소비에트 권력을 위하여」, 스페시네프의 「위험한 교차로」, 1955년 채길준의 「장한몽」, 송영의 「태어난 집으로의 귀향」, 1957년 뮤프케(Мюфке)의 「내일은 우리의 것이다」, 태장춘의 「놀부 흥부」, 채영의 「심청」, 유지호의 「늑대」 등이 사할린 한인 이동극장에서 공연된 연극들이다.
사할린 한인 이동극장은 비록 10년이란 짧은 기간 활동하였으나 사할린주의 문화 역사에 이름을 길이 남겼고 다른 소비에트 지역 한인 예술 활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또 사할린 지역에 한국 전통문화를 알리고 사할린 한인의 한국 전통문화에 대한 공감대 형성, 민족 자긍심 고양에 일조했고 사할린 한인 간 연대를 강화했다. 또한 공연을 한국어로 진행하면서 사할린 한인의 한국어 보존에 일정한 역할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