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봉준

한자 崔鳳俊
영문 Choi Bongjoon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러시아 연해주지방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60년
활동 시기/일시 1908년
활동 시기/일시 1908년 3월 21일
활동 시기/일시 1910년
몰년 시기/일시 1917년 9월 11일
추모 시기/일시 1996년
출생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함경북도 성진군
거주|이주지 러시아 연해주 연추
활동지 러시아 연해주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해조신문사 사장
정의

일제 강점기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개설

최봉준(崔鳳俊)[1860~1917]은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한인 사회의 교육 계몽 사업을 주도했다. 『해조신문(海朝新聞)』의 사주(社主)이며 블라디보스토크-원산 간을 오가던 준창호(俊昌號)를 소유한 블라디보스토크 한인 사회의 최고 거부였다.

가계

블라디보스토크 민회의 재무를 맡고 있던 최예부(崔禮簿)는 최봉준의 맏조카였다.

활동 사항

1860년 함경북도 성진군에서 태어난 최봉준은 1868년 러시아 연해주 연추로 이주했다. 1880년경에 학교와 교회당을 건축하고 재러 동포들의 교육에 진력하였다. 1904년 러일 전쟁 발발 시부터 재산을 모으기 시작하였으며, 화물선 준창호(俊昌號)의 운영을 통하여 국내 및 일본과 무역을 하였다. 특히 최봉준은 생우(生牛) 무역을 통하여 많은 부를 축적하였다. 1905년 국내에서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최봉준『해조신문』을 창간하여 매년 1만 원씩 10년간 『해조신문』 간행에 투자하는 등 막대한 기부금을 제공하였다. 1908년 3월 2일 장지연이 해조신문사에 입사하여 주필로서 활약하게 된 것도 최봉준의 기여가 컸다. 1908년 3월 21일 최봉준안중근(安重根)의 「인심결합론(人心結合論)」을 『해조신문』에 게재하고 안중근의 의거 후에 안응칠유족구제회를 세워 유족들을 지원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준창호의 사무장인 박응창을 통해 최봉준에게 압력을 가했고, 이에 1908년 5월 26일 『해조신문』은 폐간되었다. 이후 최봉준은 과격한 항일 논조를 자제하고 계몽 활동에 주력하였다. 1908년 8월 15일 『대동공보(大東共報)』 제1차 발기인총회가 개최되었는데 최봉준이 지원해 1908년 11월 18일 창간할 수 있었다. 1910년 일제에게 조선이 강점될 위기에 처하자 최봉준은 동지 624명과 함께 성명회(聲明會) 선언서에 서명하였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에 최봉준고려족 중앙총회의 임원으로 활동하였고, 1917년 9월 11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6년 대한민국 정부는 최봉준의 공적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 유공자 공훈록』(국가보훈처, 1986)
  • 박민영, 『대한제국기 의병 연구』(한울, 1998)
  • 계봉우, 「아령실기」(『독립신문』, 1920. 2. 20~1920. 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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