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범도

한자 洪範圖
영문 Hong Bumdo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러시아 연해주지방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68년 8월 27일
활동 시기/일시 1895년 10월
활동 시기/일시 1907년
활동 시기/일시 1908년 11월
활동 시기/일시 1910년
활동 시기/일시 1919년
활동 시기/일시 1920년
활동 시기/일시 1927년
활동 시기/일시 1937년
몰년 시기/일시 1943년 10월 25일
추모 시기/일시 1962년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20년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20년
출생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안북도 양덕
거주|이주지 카자흐스탄 얀쿠루칸 지방 사나리크
거주|이주지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시 비르쿨라코프 거리 2
활동지 중국 북간도
활동지 러시아 연해주
묘소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시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대한의용군 부총재
정의

일제 강점기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개설

홍범도(洪範圖)[1868~1943]는 구한말 의병 전쟁에 참여했으며, 1908년 망명 후 대한독립군을 편성하여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청산리 전투에서는 북로군정서 제1 연대장으로 참가하였다.

가계

홍범도의 본관은 남양(南陽), 호는 여천(汝千)이다. 아버지는 홍윤식이며, 아내는 이인복이다.

활동 사항

홍범도는 1868년 8월 27일 평안북도 양덕에서 태어났다. 1883년 평양감영의 나팔수로 입대해 3년간 병영 생활을 하였다. 1886~1893년 황해도 수안군 총령(悤嶺) 아래에 있는 제지소에서 노동자로 일하였다. 1894년부터 약 1년 6개월가량 금강산 신계사(神溪寺)에 들어가 지담 대사의 상좌승으로 수도 생활을 하였다. 명성 황후 시해 사건이 일어난 후 1895년 10월 강원도 회양에서 김수협과 함께 봉기하여 의병 활동을 시작하였다. 1907년 후반까지 북청군 안산사 노은리에서 사냥과 농사에 종사하며 안산사 일대 포수들의 동업 조직인 포연대(捕捐隊)의 대장으로서 포수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907년 9월 3일 제정·공포된 총포 및 화약류 취체법이 강제 시행되자 11월 15일 차도선과 함께 안산사와 안평사 포수들의 동업 조직인 포계를 주축으로 화전 농민, 광산 노동자, 북청 진위대 해산 군인 등 70여 명을 모아 의병 부대를 결성하여 항일 구국 운동을 전개하였다.

홍범도는 1908년 11월 초 중국 북간도로 망명한 후 이범윤·안중근과 연합하여 활동하였으며, 1910년 6월 유인석·이범윤·이위종·이상설 등과 함께 십삼도의군을 조직하였다. 1910년 한일 병탄 뒤 십삼도의군 간부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성명회에 참여하였다. 1911년 6월 이종호·이상설·최재형 등과 함께 러시아 연해주에서 창립한 권업회에 참여해 부회장을 맡았고, 12월 17일 사찰부장에 선임되어 신문 발간 사업, 민족 교육 사업, 한인의 경제력 향상 및 권익 보호 활동을 하였다. 1912년경에는 노동회를 조직해 군자금 마련을 도모하였으며,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이범석, 유상돈 등과 결의 동맹 ‘21형제’를 조직하였다.

홍범도는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대한독립군을 편성해 대한북로독군부, 대한신민단 등과의 연합으로 봉오동 전투를 승리를 이끌었다. 그 후 북로군정서 제1연대를 이끌고 청산리 대첩에 참가하였다. 홍범도는 청산리 대첩 후 간도 토벌대와 전투를 치르며 자유시로 이동했지만, 원동공화국 한인부에서 조직한 전한군사위원회 산하의 대한의용군과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의 후원하에 조직된 고려혁명군정의회가 지도하는 고려혁명군 간의 군권 대립으로 인한 자유시 참변을 겪었다. 전한군사위원회는 상해 임시 정부와 연관을 가지고 있었고, 중심인물은 이용, 채영, 박 일리아 등이었다. 군정의회에는 김하석, 오하묵, 최고려, 유동열 등이 활동하고 있었다. 홍범도대한의용군에 참여해 부총재로 선임되기도 하였으나, 6월 초 부대원 440여 명을 대동하고 군정의회 측에 가담하여 고려혁명군 제3연대로 편성되었다.

자유시 사변 이후 한인 무장 세력은 러시아 공산당에 의해 많은 활동의 제약이 가해졌다. 홍범도는 1927년 소련 공산당에 입당하고 이만, 연해주 등의 집단 농장, 협동 농장 등에서 농업에 종사하면서 농민들의 생활 향상과 한인 동포들의 권익 보호에 힘썼다.

홍범도는 1937년 스탈린에 의해 카자흐스탄 사나리크로 강제 이주되었고, 1938년 4월 초 크질오르다로 이사하여 살다가 1943년 10월 25일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홍범도는 자서전 『홍범도 일지』[1938년 추정]를 남겼다.

묘소

홍범도의 묘소는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시의 공동묘지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홍범도의 공적을 기려 건국 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반병률, 『홍범도 장군-자서전 홍범도 일지와 항일 무장 투쟁』(한울, 2014)
  • 『한국 근현대사 강의』(한울,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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