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일

한자 全一
영문 Jeon Il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러시아 하바롭스크지방 하바롭스크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2년
활동 시기/일시 1918년 7월
활동 시기/일시 1919년
활동 시기/일시 1920년
활동 시기/일시 1930년
몰년 시기/일시 1938년
추모 시기/일시 2007년
출생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함경남도 길주군
거주|이주지 중국 북간도
거주|이주지 러시아 연해주 하바롭스크시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한인사회당 선전부장
정의

일제 강점기 연해주 지역의 한인 빨치산 부대 지휘관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개설

전일(全一)[1882~1938]은 1910년 일제에 의해 국권이 피탈되자 1911년 망명하여 간도, 연해주 지방에서 이동휘 등과 독립 전쟁론에 기초한 무장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신간회 참여를 통해 민족 운동의 통합에 힘썼으며, 러시아 연해주로 이동한 뒤 언론 활동을 통해 일제의 탄압과 독립운동을 널리 알리는 데 헌신했다.

활동 사항

1882년 함경남도 길주군에서 태어난 전일은 농림학교를 졸업한 뒤 1911년 북간도로 망명했다. 길동기독학당 법정과를 졸업하고 북간도 지역 한인 단체인 간민교육회와 간민회에서 이주 한인의 자치, 권리 옹호와 독립의식 고취를 위한 민족 교육 운동을 전개했다. 비밀 항일 결사 단체인 광복단 단장으로 활동하였으며, 이동휘가 세운 나자구사관학교에서 학생 모집을 담당하였다. 러시아 혁명 이후에는 연해주로 이동, 1918년 5월 하바롭스크에서 창당된 한인사회당에 참여하였다. 1918년 7월 일제 강점 이후 최초로 조직된 한인 무장 부대인 한인사회당 적위군에서 유동열과 함께 지휘관으로 복무했다.

전일은 1919년 대한국민의회 상설 의원이자 내무부원으로 연해주의 3·1 운동을 이끌었다. 개조된 한인사회당의 의원으로 선출되어 연해주 각지의 독립군과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1920년 2월~3월에는 재건된 대한국민의회 의원으로 ‘3·1독립선언기념회’ 서기를 맡아 행사를 주도하였고, 『한인신보』 총무로서 반일 언론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0년 3월 14일 한인사회당 중앙총회 선전부장에 선출되어, 일본군 철퇴를 선동하는 ‘신일본개조동맹회’ 명의의 ‘경고문’ 5만 부를 시베리아 주둔 일본 군대에 배포하려는 계획을 추진하던 중 3월 29일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었다. 전일은 5년형을 언도받고 청진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1923년 7월 8일에 12명의 장기수들과 탈옥을 시도하다 붙잡혀 4년의 추가형을 받았다. 1927년 9월 16일 만기 출옥하였지만 1928년 중국 국민당, 고려혁명당과 연락을 취한 일로 3년간 재류 금지를 당했으며, 이를 위반하여 간도 일본 영사관에 체포되어 1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이후 전일은 동아일보사 길주 지국에서 기자로 근무했으며, 1929년 7월 신간회 복대표위원회 중앙 집행 위원으로 활동했다. 1929년 11월, 3차 조선공산당(ML당 사건) 간부 김세연의 권유로 조선공산당에 가입해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1930년 2월 25일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았다. 석방된 뒤에는 연해주로 다시 망명하여 하바롭스크에서 주(州) 직업동맹 인쇄소 교정 담당자로 근무했다. 1937년 3월 18일에 소련군에 체포되어 1938년 4월 15일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5월 11일에 하바롭스크에서 총살되었다. 1957년 3월 13일에 원동주 군사 재판에서 무혐의가 입증되어 복권되었다.

상훈과 추모

2007년 대한민국 정부는 전일의 공적을 기려 건국 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반병률, 『1920년대 전반 만주·러시아지역 항일무장투쟁』(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 윤상원, 「러시아 지역 한인의 항일 무장 투쟁 연구(1918~1922)」(고려대학교 박사 학위 논문,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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