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지연

한자 張志淵
영문 Jang Jiyeon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러시아 연해주지방 블라디보스토크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64년
활동 시기/일시 1898년
활동 시기/일시 1901년
활동 시기/일시 1905년
활동 시기/일시 1908년 2월
몰년 시기/일시 1921년
추모 시기/일시 1962년
출생지 대한민국 경상북도 상주시
활동지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시
성격 언론인
성별
대표 경력 『해조신문』 주필
정의

근대 개항기 애국 계몽 운동가이자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서 활동한 언론인.

개설

장지연(張志淵)[1864~1921]은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 언론인으로 활약하면서 애국 계몽과 민족 자강 의식 고취에 힘썼다. 1914년부터는 일제 침략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논설들을 게재하며 친일 행위를 하였다.

가계

장지연의 본관은 인동(仁同)이다. 아명은 장지윤(張志尹), 자는 화명(和明)·순소(舜韶), 호는 위암(韋庵)·숭양산인(嵩陽山人)이다. 아버지는 장용상(張龍相)이며, 퇴계학파인 장석봉(張錫鳳)의 문인이다.

활동 사항

장지연은 1864년 경상북도 상주에서 태어났다. 1896년 7월 독립협회에 가입하였고, 1898년 9월 『황성신문』 기자로 활약하였다. 1898년 11월 만민공동회의 간부로 맹활약하다가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가 해산당할 때 체포, 투옥되었다. 1899년 『시사총보(時事叢報)』의 주필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였고, 출판사인 광문사를 설립해 정약용의 『목민심서』와 『흠흠신서』 등을 간행하였다. 1901년 『황성신문』의 사장에 취임해 민중 계몽과 자립정신 고취에 힘썼다. 1905년 『황성신문』에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폭로한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게재하여 일제의 침략과 을사 5적을 규탄하였다. 장지연은 민중의 총궐기를 호소하는 논설을 작성하여 일제 헌병대의 사전 검열을 거치지 않고 전국에 배포하여 체포, 투옥되어 65일 후 석방되었다. 이와 함께 『황성신문』도 압수 및 정간 처분되었다.

장지연은 1906년 윤효정, 심의성, 임진수, 김상범 등과 함께 대한자강회를 조직해 국권 회복을 위한 본격적인 애국 계몽 운동을 시작하였다. 『대한자강회월보』, 『조양보(朝陽報)』 등에 전 국민이 각성해서 실력을 향상하여 구국 운동에 나설 것을 호소하는 논설과 1907년 신문과 잡지 등에 국채 보상 운동에 참여할 것을 독려하는 글들을 게재했다. 헤이그 특사 이후에는 일제의 애국 계몽 운동 탄압에 대한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장지연은 일제의 탄압을 피해 1908년 2월 최봉준, 정순만 등이 간행하고 있던 『해조신문(海潮新聞)』의 주필에 초빙되어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했다. 『해조신문』이 폐간되자 1908년 6월 24일 상해를 거쳐 중국을 유랑하던 중 양쯔강의 배 안에서 괴한의 습격을 받고 8월에 귀국하였다. 장지연은 귀국 즉시 『해조신문』에서의 격렬한 일제 침략 규탄이 문제되어 일제 헌병대에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었다. 그 후 장지연은 1914년 12월부터 1918년 12월까지 『매일신보』에 조선총독부의 시정(施政)과 동아시아에서 일제의 역할을 긍정적으로 서술한 글들이 포함된 700여 편의 글들을 기고하였다. 1921년 마산에서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장지연의 저술은 『증보 대한 강역고』, 『유교 연원』, 『위암문고』, 『대한 최근사』, 『동국 역사』, 『일사유사』, 『농정전서』, 『만국 사물 기원 역사』, 『소채 재배 전서』, 『화원지』 등 다수가 있다.

상훈과 추모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장지연의 공적을 기려 건국 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박환, 『러시아 지역 한인 언론과 민족 운동』(경인문화사, 2008)
  • 노관범, 「한국의 약사가 장지연」(『한국사 시민강좌』47, 2010)
  • 김경선, 「위암 장지연의 아언각비 소개와 수목 명칭을 둘러싼 한·중 문화: 황성신문 연재 내용을 중심으로」(『문화와 융합』37-1, 한국문화융합학회, 2015)
관련항목
이전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