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 池靑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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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 Lee Cheongcheon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러시아 연해주지방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출생 시기/일시 | 1988년 1월 2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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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906년 |
수학 시기/일시 | 1908년 |
수학 시기/일시 | 1909년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5월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
몰년 시기/일시 | 1957년 1월 15일 |
추모 시기/일시 | 1962년 |
출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 30번지 |
학교|수학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
학교|수학지 | 일본 도쿄도 |
활동지 | 러시아 연해주 |
활동지 | 중국 간도 |
묘소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동작구 현충로 210[사당 2동 산41-2]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대한의용군 부사령관|조선광복군 총사령관|민주국민당 최고위원 |
일제 강점기 러시아 연해주 지역 한인 빨치산 부대의 지휘관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
지청천은 1888년 서울 종로구 삼청동 30번지에서 태어났다. 1906년 배재학당을 졸업하고 1908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교함으로 군인의 길을 걷게 되었다. 1909년 정부 유학생으로 동경육군중앙유년학교(東京陸軍中央幼年學校)에 들어가 1913년 졸업한 뒤 일본 육군 장교로 복무하다가 1919년 중국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9년부터 지청천은 간도 일대에서 신흥무관학교 교성대를 이끌었고, 1920년 5월 안동현에서 홍범도의 부대와 연합해 대한의용군으로 재편한 후, 홍범도가 총사령관, 지청천이 부사령관을 맡았다. 홍범도와 지청천이 이끌던 대한의용군은 밀산에서 북로군정서와 통합하여 대한독립군이 되었다.
1920년 말 홍범도와 지청천은 러시아 연해주 자유시로 이동했다. 자유시에 도착한 독립군 부대들은 무장 해제라는 예기치 못한 상황과 마주했다. 중국에서 이동한 모든 한인 부대의 무장 해제를 명령한 러시아군의 태도에 독립군 부대들은 선택을 해야 했다. 독립군 부대 가운데 김좌전, 서일 등은 무장 해제를 거부하고 다시 간도로 돌아갔으며, 홍범도와 지청천은 무장 해제를 받아들이면서 자유시로 이동하는 것을 선택했다.
1920년 말 자유시에서는 한인 무장 부대 통합을 두고 전한군사위원회와 고려혁명군정의회가 대립하고 있었다. 지청천은 초기에는 전한군사위원회 쪽을 지지했으나 통합의 주도권을 코민테른 극동비서부가 쥐게 되자 방향을 바꿔 코민테른 극동비서부의 지원을 받고 있었던 고려혁명군정의회를 지지했다. 고려혁명군정의회에서는 지청천을 교관으로 선임했다. 이후 지청천은 만주와 중국에서 활동을 전개했으며 조선광복군 총사령관을 역임했다.
광복 이후 지청천은 귀국하여 26개 청년 단체를 통합해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을 창설하고 단장을 맡았으며, 제헌 국회 의원과 초대 무임소 장관을 역임하였다. 제2대 국회 의원, 민주국민당 최고 위원을 지냈다. 지청천은 1957년 1월 15일 서울 신당동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지청천의 묘소는 서울특별시 동작구 현충로 210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있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지청천의 공적을 기려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