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 李鍾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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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 Lee Jongho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러시아 연해주지방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출생 시기/일시 | 188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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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06년 |
활동 시기/일시 | 1911년 |
활동 시기/일시 | 1911년 |
활동 시기/일시 | 1912년 12월 |
활동 시기/일시 | 1912년 12월 |
활동 시기/일시 | 1917년 |
몰년 시기/일시 | 1932년 |
추모 시기/일시 | 1962년 |
출생지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함경북도 명천 |
거주|이주지 | 중국 청도 |
거주|이주지 |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시 |
활동지 |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시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1910년대 러시아 연해주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이종호의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할아버지는 대한제국 내장원경(內藏院卿)을 지낸 이용익(李容翊)이고, 아버지는 이현재(李賢在)이다.
이종호는 함경북도 명천에서 태어났다. 이갑(李甲)이 창립한 서우학회(西友學會)와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를 통합해 서북학회를 만들고 평의원이 되어 1만 원을 기부하기도 하였다. 또한 『서북학회월보』를 간행하고 유능한 청년들을 해외에 유학시켜 인재 양성에 주력하였다. 1906년에는 미국에서 귀국한 안창호(安昌浩)를 맞이하여 이동녕(李東寧)·이갑·이승훈(李昇薰)·윤치호(尹致昊)·전덕기(全德基)·안태국(安泰國)·조성환(曺成煥)·최광옥(崔光玉)·이동휘(李東輝) 등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하고 비밀리에 민족 운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에는 서울에 경성학교(鏡城學校)를 설립하여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1910년 12월 일제가 소위 ‘105인 사건’을 날조하여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하려 하자, 이종호는 1911년 이른 봄 이갑과 함께 중국 청도(靑島)로 망명하여 안창호·유동열(柳東說) 등과 독립운동 방책을 논의하였다. 중국에 머물다가 러시아 지역으로 망명한 이종호는 1912년 12월 이상설(李相卨)·김립(金立)·김도여(金道汝) 등과 함께 권업회(勸業會)를 설립하고 『권업신문』을 발행하여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또한 블라디보스토크의 한인 교육을 위하여 한민학교(韓民學校) 등 학교 설립에도 공헌하였다.
이종호는 1917년 상해에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강제로 국내에 송환되었고, 1932년 사망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이종호의 공적을 기려 건국 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