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위종

한자 李瑋鍾
영문 Lee Weejong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러시아 연해주지방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6년 1월 9일
활동 시기/일시 1902년 7월 18일
활동 시기/일시 1903년 9월 1일
활동 시기/일시 1904년 2월 7일
활동 시기/일시 1904년 3월 18일
활동 시기/일시 1905년 11월
활동 시기/일시 1907년 6월
활동 시기/일시 1908년 4월
수학 시기/일시 1914년
추모 시기/일시 1962년
출생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학교|수학지 미국 워싱턴시
학교|수학지 러시아
성격 독립운동가|외교관
성별
대표 경력 헤이그 특사
정의

일제 강점기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서 활동한 외교관이자 독립운동가.

개설

이위종(李瑋鍾)[1886~?]은 1906년 초 주러 공사관이 철폐될 때까지 아버지 이범진(李範晉)의 대유럽, 대러시아 외교 활동을 도왔고, 1907년 6월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의 특사로 파견되어 외교관으로서의 능력을 발휘했다. 이후 연해주에 집결한 의병 세력을 중심으로 구성된 동의회의 후원자, 조력자로서 항일 무력 항쟁을 전개했다. 러시아 혁명 이후에는 소비에트 적군 지휘관으로 활약하였다.

가계

이위종의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할아버지는 훈련대장을 지낸 이경하(李景夏), 아버지는 외교관 이범진(李範晉)이다. 형은 이기종이다. 스웨덴 외교관의 후손이자 토볼(Tobol)주 주지사 놀켄 남작의 조카딸인 아내 엘리자베스 발레랴노부나 놀켄(Elizabath Valelianovna Nol’ken)과 결혼하기 위해 러시아 정교회에 입교해 블라디미르 세르게예비치 리(Vladimir Sergeevich Li)라는 러시아 이름을 가졌다. 아내 엘리자베스와의 사이에 베라(Vera), 니나(Nina), 예브게니야(Evgeniia)를 낳았다.

활동 사항

이위종은 1886년 1월 9일 서울에서 이범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896년 주미 공사[주차 미국 특명 전권 공사]로 임명된 이범진을 따라 미국으로 가서 3년 6개월가량 체류하다가 이범진이 다시 주러, 주불, 주오 삼국 특명 전권 공사로 임명되자 파리로 이동하였다. 이위종은 1896년 가을부터 1900년 봄까지 미국 워싱턴에서 약 4년간 장송 드 라이리(Janson de Lailly) 학교를 수료하였으며, 1901년부터 2년 동안 생시르(St. Cyr)에 있는 특수군관학교[육군유년학교]를 다녔으나 3년 과정을 마치지 못하였다. 1902년 7월 18일 주불 공사관 서기생, 1903년 9월 1일 주러 공사관 3등 서기관, 1904년 2월 7일 주독 공사관 참서관에 임명되었다. 1904년 3월 18일 러일 전쟁 발발 직후 주러 공사관 참서관에 임명되어 파리를 떠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동하였다. 러일 전쟁 기간에 아버지 이범진과 함께 러시아를 위해 활동한 공로로 러시아 황제로부터 스타니슬라브 3등 훈장을 수여받았다.

1907년 6월 15일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되자 이위종이상설, 이준과 함께 고종의 특사로 헤이그에 파견되었다. 1907년 6월 25일경 헤이그에 도착한 특사들은 대회 참가 대표들과 외국 언론을 상대로 을사늑약의 불법성과 일본의 한국 침략상을 폭로하는 등 외교 활동을 전개했다.

헤이그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 이위종은 얼마 후 항일 투쟁의 본거지인 연해주로 이동했다. 1908년 4월경 최재형, 이범윤, 안중근 등과 의병 단체인 동의회를 조직하였다. 안중근, 엄인섭이 이끄는 동의회 소속의 약 200명으로 구성된 의병 부대는 1908년 7월 국내로 진격해 1개월 동안 경흥의 홍의동과 신아산, 그리고 회령의 영산 등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귀환한 이위종은 1911년 초 아버지 이범진의 자결 이후 일제의 끊임없는 감시를 받으며 생활하였다. 1914년 파리에서 마치지 못한 군사 교욱을 계속하고자 블라디미르군사학교에 입학해 1년 반 정도 사관교육을 받고 러시아군에서 장교로 활동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여부는 밝혀지지 않으나 러시아 혁명 후 내전 기간에는 적군 장교로 복무하였다. 특히 우파(Ufa) 탈환 시에는 기관총부대장으로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후 소비에트 정부의 동양 혁명 책임자들과 더불어 우랄산맥 서쪽 지역의 한인 적위대 조직을 책임지는 적군 지도자로 활약하고 있었다는 일제 측 첩보 자료를 마지막으로 이위종의 최후는 알려진 바가 없다. 1921년 이후 이위종에 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없는 점으로 미루어 1920년 무렵 시베리아 내전 당시 전사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상훈과 추모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이위종의 공적을 기려 건국 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반병률, 『여명기 민족운동의 순교자들』(신서원, 2013)
  • 오영섭, 「이위종의 생애와 독립운동」(『헤이그특사와 한국 독립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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