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 李相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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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러시아 연해주지방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출생 시기/일시 | 1870년 12월 7일[음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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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06년 |
몰년 시기/일시 | 1917년 3월 2일 |
추모 시기/일시 | 1975년 |
출생지 | 대한민국 충청북도 진천군 덕산면 산척리 산직마을 |
거주|이주지 | 중국 북간도 |
활동지 | 러시아 연해주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특사|대한광복군정부 정도령 |
일제 강점기 러시아 연해주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이상설은 1870년 충청북도 진천에서 태어났다. 1896년 성균관 교수와 관장을 하였으며, 대한제국에서 한성사범학교 교관, 탁지부 재무관, 의정부 참찬을 역임했다. 1905년 을사늑약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1906년 북간도로 망명하여 여준, 정순만, 이동녕 등과 함께 북간도에 서전서숙을 설립하고 이주 한인 사회의 민족의식 고취를 위한 항일 교육과 애국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 이준, 이위종과 함께 네덜란드 헤이그에 특사로 파견되어 전세계를 상대로 국권 회복을 위한 외교를 펼쳤다. 1908년 7월 11일부터 15일까지 미국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개최된 애국동지대표회에 노령 연해주 대표로 참석하였다.
1909년 4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온 이상설은 연해주와 연추 혹은 밀산 등지를 왕래하면서 연해주 지역 민족 운동의 방향을 정립하고 인도하면서 최재형을 능가하는 한인 사회의 지도자로 부상했다. 당시 블라디보스토크 한인 사회의 교육, 계몽 운동을 주도하던 김학만, 차석보, 최봉준 등은 무장 항일 운동을 추구하던 의병 세력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반면, 이상설은 의병에 대해서도 역할과 기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그 노선에 동참하였다. 특히 이상설은 유인석과 함께 국외 의병 통합을 위한 십삼도의군 편성에 적극적이었으며, 십삼도의군에서 도통신(都通信) 혹은 외교대원(外交大員) 이라는 직위로 유인석과 이범석 간의 중재, 여러 의병들 간의 세력을 조정하거나 대외 교섭을 담당하였다.
1910년 8월 한일 병탄이 현실화되자 병탄 조약 무효를 선언할 항일 단체 성명회를 조직하였다. 이로 인해 러시아 당국은 8월 30일 성명회와 십삼도의군의 주요 인물 42명을 체포하였다. 이때 체포된 이상설은 니콜리스크로 추방되었다가 1911년에 블라디보스토크로 귀환하였다. 1911년 5월 권업회의 의사부의장으로 활약했으며, 1914년 이동휘, 이동녕, 이종호, 정재관 등과 대한광복군정부를 결성하고, 제1대 정도령으로 실질적인 책임자가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으로 러시아와 일본의 동맹으로 권업회의 해산 등 한국 독립운동이 탄압을 받자 중국 상해로 이동하여 상해 지역의 신규식, 박은식, 북경 지역의 유동열, 성낙형, 그 외에 이춘일, 유홍열 등과 1915년 3월 신한혁명당을 결성하였다. 1917년 3월 2일 48세를 일기로 순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상설의 공적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