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휘

한자 李東輝
영문 Lee Donghwi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러시아 연해주지방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73년 6월 20일
수학 시기/일시 1881년
수학 시기/일시 1890년
활동 시기/일시 1905년
활동 시기/일시 1911년
활동 시기/일시 1914년
활동 시기/일시 1918년
활동 시기/일시 1919년 11월
활동 시기/일시 1921년 1월
활동 시기/일시 1922년
활동 시기/일시 1923년
활동 시기/일시 1924년
활동 시기/일시 1927년
활동 시기/일시 1928년
활동 시기/일시 1930년
몰년 시기/일시 1935년 1월 31일
추모 시기/일시 1995년
출생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함경남도 단천군 대성리
거주|이주지 중국 북간도 연길현 국자가
거주|이주지 중국 북만주 목릉현 팔면둔
거주|이주지 러시아 연해주
학교|수학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활동지 중국 간도
활동지 중국 상해
활동지 러시아 연해주
묘소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시 페르바야 레츠카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국무총리
정의

일제 감정기 러시아 연해주 지역과 중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개설

이동휘(李東輝)[1873~1935]는 구한말 애국 계몽 운동과 의병 운동을 이끌었으며, 1910년대 초기 중국 북간도와 러시아 연해주 한인들의 자치, 단결,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1910년대 후반 러시아 볼셰비키들과 제휴해 항일 운동을 국제적 차원으로 확대한 공산주의 운동의 선구자이며, 1919년 11월 3일 통합 상해 임시 정부의 국무총리를 역임하였다.

가계

이동휘의 본관은 해빈(海濱), 호는 성재(誠齋)이다. 아버지는 이승교(李承喬)[후에 이발(李發)로 개명]이다. 아내 강정혜와의 사이에 이인순, 이의순, 이경순, 이우석[후에 이영일로 개명]의 3녀 1남을 두었다. 첫째 사위는 정창빈, 둘째 사위는 오영선이다.

활동 사항

이동휘는 1873년 6월 20일 함경남도 단천군 대성리에서 태어났다. 1881년부터 사숙인 대성재에서 한학을 수학했으며, 18세 때 상경하여 이용익(李容翊)의 소개로 군관학교에 입학하였다. 군관학교를 졸업한 뒤 1907년 한국군이 강제 해산될 때까지 참령으로서 강화진위대(江華鎭衛隊)를 이끌었다.

이동휘는 무관이었지만 1905년 이후 강화도에 보창학교를 설립해 교육 운동과 기독교 전도를 통한 애국 계몽 운동을 전개했다. 군대 해산 후 대한 자강회, 대한교육회, 서북학회 등의 합법적인 애국 계몽 운동 단체와 비밀 결사 신민회의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 활약했으며, 양기탁, 안창호와 함께 국채 보상 운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대 초반에는 북간도와 연해주에서 간민교육회, 간민회, 권업회가 전개한 교육·종교·실업·문화 운동을 이끌었다. 1911년 초 북간도에서 광복단을 조직하였고 1914년 러일 전쟁 10주년을 계기로 조직한 대한광복군정부 비밀 결사 결성을 통해 만주, 연해주 지역에서 독립전쟁론에 입각한 무장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러시아 혁명 이후에는 한인사회당, 대한국민회의, 상해 고려공산당을 결성하여 만주와 연해주 지역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에 헌신하였다.

이동휘는 1917년 러시아 2월 혁명을 계기로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독립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던 중 러시아 헌병대에 체포되었지만 김 알렉산드라를 비롯한 러시아 볼셰비키들의 도움으로 석방되었다. 1918년 한인사회당을 조직하여 볼셰비키들과의 연대로 한국 독립운동을 국제적 차원으로 확대·강화시켰다. 1919년 3·1 운동 이후 대한국민의회와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통합에 힘을 쏟았으며, 11월 상해 임시 정부의 국무총리에 취임해 무장 독립운동 노선에 입각한 민족 운동, 사회주의 계열 운동의 통합을 모색했다. 그러나 1921년 1월 말 상해 임시 정부의 개혁 문제와 관련하여 이승만, 이동녕, 이시영, 신규식, 안창호와 대립하여 상해 임시 정부를 탈퇴했다. 이후 고려공산당 창당과 1922년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 베르흐네우딘스크 대회 참가, 국제공산당 코르뷰로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동휘는 1923년 46명의 청년들을 규합해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적기단을 조직하였고, 별도의 조선공화정부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였다. 1923년 국민대표회에서는 상해 임시 정부의 개조 입장을 견지하였다. 1924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 고려도서관을 건설하고 책임자로 활동했으며, 1924~1927년 중국 북벌 전쟁 시 손문의 요청과 국제공산당의 방침에 따라 중국 혁명을 지원하였다. 1927년 서울파, 상해파 연합의 조선공산당 3차 당대회에서 주외대표(駐外代表)로 선출되었고, 1928년 12월 테제를 바탕으로 김철수, 윤자영, 김일수, 최동욱 등과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동휘는 생애 말년인 1930년 이후 일제 통치하의 국내 형무소에 수감된 항일 투사와 사회주의자들, 그리고 그들의 가족을 후원하기 위하여 국제혁명운동희생자구원회[모플, MOPR] 원동 지역 한인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모플 모금을 위해 연해주 수청[현 파르티잔스크] 지방을 방문하던 중 독감으로 쓰려져 1935년 1월 31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나는 조선의 혁명이 성공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는다. 동무들은 반드시 고려소비에트공화국을 성립하시오.”라는 유언을 남기고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이동휘의 저술로는 『원동에서의 양잠업』이 있으며, 신문 기고문인 「동아일보를 통하야 사랑하는 내지 동포에게」, 「시대일보에 들임: 신년을 마즈면서」, 「레닌 서거 제1주년을 추회하면서」, 「해삼위 인상」 등이 있다.

묘소

이동휘의 유해는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시 페르바야 레츠카에 있는 묘역에 안장되었으나, 주변 환경의 변화로 현재는 위치를 정확하게 확인할 수 없다.

상훈과 추모

1995년 대한민국 정부는 이동휘의 공적을 기려 건국 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반병률, 『성재 이동휘 일대기-조국 광복만을 위해 살다 간 민족의 거인』(범우사, 1998)
  • 반병률, 「이동휘-선구자, 민족 혁명가, 공산주의자」(『한국사시민강좌』47, 일조각,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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